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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희망의 정수박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내가 가끔 찾아가는 조이여울 기자의 블로그에 한용운 님의 시를 보고,

문득 가슴 뭉클하여 글을 쓴다.

 

최근 상담소의 한 회원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사람을 다루는 업을 하다보니 인간에 대한 절망, 좌절, 운동 혹은 변화가능성의 부질없음을

토로하는 회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 느끼는 절망의 수위는 어디까지 일까?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는 과연 절망을 알고 있을까?

그 때는 내가 가진 희망들은 과연 어떤 희망일지, 회원의 절망감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그런데, 한용운시인의 '님의 침묵'을 다시 읽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란 구절을 깊이 음미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눈물로 쏟아내버리지 않고,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붇는다는 말...

 

그것은 또 얼마나 고되고, 고통스럽고, 쓰라린 일일까?

 

있는 표현, 없는 표현 하는데 익숙해버린 나의 운동, 나의 일상적 삶과는 사뭇 다른

시인의 삶이 자꾸만 내 마음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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