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1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 경제

정성진 교수의 에세이가 연재될 예정으로 있는것 같은데, 매우 반가운 일이다. 경제학 분야에 문외한이라 이분의 책을 사고 싶어도 내용이 이해가 안 갈거 같아 망설이는 중. 공부좀 해야할텐데, 쩝.

 

---------------------------------------------------

 

맞불 20 호
http://www.counterfire.or.kr

 

21 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경제

 

정성진의 맑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21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 경제

 

△억압적·무계획적인 자본주의 - 디에고 리베라의 1933년 작품 '현대 산업'

 

오늘날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이 확산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노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대중적 반감으로 점차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21세기 조건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없애고 민주적 계획경제 방식으로 더 나은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이들 분노한 대중은 사회주의보다는 좌파 케인스주의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이나 시장사회주의와 같은 개량주의를 대안으로 여긴다.

따라서 오늘날 21세기 조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필요성뿐 아니라 가능성, 나아가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급진좌파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로서, 생산·분배·소비 등 인간의 경제생활이 시장이나 국가와 같은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제되는 참여계획경제다.

 

그렇다면, 흔히 계획경제의 모델로 여겨지는 소련 동유럽 블록 경제는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가 아니라, 일종의 관료적 명령경제였을 뿐이라는 사실이 먼저 지적돼야 한다.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두고 오늘날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시장을 폐지하고 민주적 계획경제 방식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1세기 조건에서 시장 폐지의 불합리성 또는 계획경제의 불가능성 명제는 우리 나라 진보 학계에서는 거의 '공준'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나라 진보 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좌파 케인스주의자들이나 시장사회주의론자들은 21세기 세계화·정보화와 같은 변화된 조건에서 시장 폐지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효율성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물론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스탈린이 강변했던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하기가 점점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국사회주의'는 고전 맑스주의가 지향하는 국제적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계화는 각국 자본주의의 상호연관을 증대시켜 국제적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더 성숙시키고 있다.

 

한편, 정보와 복잡성이 천문학적으로 증대한 조건에서 시장이 아닌 계획에 의거해 자원을 배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을 수반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고도로 발전한 IT 기술 덕분에 지난 20세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가능해졌다. 예컨대, 오늘날 모든 상품에 부착된 "바코드"를 활용한다면, 전국적·전세계적 수준에서 대부분의 재화의 생산과 재고, 물류의 통합 관리와 소비자 수요 조사가 가능하다. 실제로, 개별 기업 수준에서 이와 같은 계획은 이미 첨단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와 같은 계획이 개별 기업 수준에 국한되고 사회 전체에서는 극심한 경쟁과 생산의 무계획성이 득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령 모든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이 의무화된다면,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이를 수집·분석해 전국적·전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제안한 구상, 즉 화폐와 가격을 폐지하고,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소득을 분배하는 구상은 오늘날 실제로 실행 가능하다. 즉, 맑스적 의미의 경제 계획 입안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로 구현된 노동시간의 계산 작업도 오늘날 발전된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다면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이를 통해 각자는 자신이 수행한 노동시간만큼 "노동증서"를 받고(물론 교육·의료와 같은 "사회적 소비"와 투자·기술혁신에 필요한 "사회적 축적" 기금 부분은 공제돼야 한다), 이 "노동증서"를 가지고 이와 똑같은 노동시간이 구현된 소비재를 구입한다는, 맑스가 말한 "공산주의 초기 단계"의 평등주의적 분배 원리를 실제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정보화의 핵심인 인터넷에 기반한 네트워크의 발전은 맑스적 의미의 계획, 즉 진정한 의미의 참여계획, 아래로부터의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온라인 토론과 인터넷 투표를 결합할 경우, 고대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경제와 정치 영역에 광범하게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계획경제에서는 개성과 자유가 억압되고, 민주주의의 후퇴와 계획 기구의 비대화·관료화가 필연적이라는 하이예크의 비판이나, 이와 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시장 기구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알렉 노브나 존 로머 같은 시장사회주의론자들의 주장은 인터넷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참여계획경제의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최근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주목하는 앨버트의 ≪파레콘≫이나 드바인의 '협상조정' 모델은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의 정신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가 제안한 노동시간 단위 계산을 배격하고, 신고전파적 "지시가격"(앨버트)이나 리카도적 "생산가격"(드바인)에 의거한다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시장사회주의론으로 퇴행할 가능성이 있다.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에서는 분업의 폐지를 통해 노동 소외가 극복돼 노동 의욕이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산자들이 아래로부터 참여하므로 오늘날 기술 혁신에 결정적인, 생산현장의 '암묵적 지식'과 정보 동원이 극대화된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에서보다 훨씬 역동적인 기술혁신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생산성 향상과 기술 혁신의 과실이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풍요로운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계획경제에서는 혁신과 생산성 둔화가 불가피하다는 하이예크 등의 비판은 맑스적 의미의 참여계획경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급진좌파의 대안적 경제 모델은 케인스주의적 사회적 시장경제나, 그 자체가 형용모순인 시장사회주의가 돼서는 안 된다. 시장경제 자체를 지양하는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 즉 참여계획경제여야 한다. 이에 바탕을 둠으로써만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짐승의 민족주의

지금이야 '월드컵 그런거 응원해봐야 무슨 소용이냐. 한국대표팀이 조기탈락 해버려서 정규뉴스 시간 안 잡아먹는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며 잘난체 하지만, 사실은 지독한 민족주의자 였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때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든 '다물' 이라는 소설이 원흉이었는데, 제목에서 짐작하실분 계시겠지만 '다물' 이란 '되찾는다' 라는 뜻의 고대어(?) 로, '고조선 시대에 빼앗긴 우리 땅을 다시 되찾자' 가 이 소설의 주제 되시겠다.


당시에는 그랬다. 대한민국이 그 넓은 중국땅을 차지하고, 일본놈들 혼내주고 미국 눈치 안보는게 그렇게 낭만적으로 느껴질수 없었다. 뚜렷한 비젼은 없었지만 아무튼 대한민국이 이른바 강대국, 선진국이 되면 사람들도 다 잘살것만 같이 느껴졌었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에 경악하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와 그 투쟁에 동감, 지지하면서도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면 '다 괜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한단고기' 니 '대쥬신제국사' 니 하는 책들을 구해보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북한은 당연히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을 전제로 함께 잘 살아야 할 대상이었고, 일본이나 만주와 요동반도는 물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까지 ( 엄연히 '쥬신' 의 옛땅 이니까 ) 장차 우리땅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이르렀다.


고백하는 김에 다 떠들어보자. 나는 그때 노트뒷장에 (통일)한국군이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저기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4개 부대로 나뉘어 만주땅을 차근차근 점령하는 시나리오를 낙서해가며 혼자만의 망상으로 빠져든적도 있고, 존경하는 사람중에는 '미국에 맞선 위대한 민족주의자' 라는 이유로 그 유명한 아돌프히틀러 도 있었다. 그때의 영향으로 '밀리터리 매니아' 종류의 취미에 빠져들었고 프라모델을 손댄것도 나치 독일의 기갑사단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던것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 조금씩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른바 PD 계열 운동권에 속하기는 커녕 단순한 농땡이일 뿐이었고,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읽어본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느 순간부터 프라모델이, 밀리터리가 재미없어 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무 의미없는 것으로 변해갔다. 한단고기나 대쥬신제국사 같은 책들이 허황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허황함을 넘어 '만에하나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안의 민족주의에 대한 환상은 그런식으로 깨져나갔던거 같다. 깨져나가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실로 농땡이 다운 변화라고나 할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들이 실은 일부 지배계급의 밥그릇을 늘리는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국익을 앞세운 논리가 짐승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인내만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군대에서 몰래 읽었던 책들에서 처음 깨달았었고, 제대이후 IMF 의 영향을 체감하면서 '대한민국 국민' 이라고 하더라도 다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TV 에서 보았던, 부천 대우자동차 노동자의 피로 범벅된 얼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당시 공장에서 내쫓긴 1700 여명의 노동자, 그의 가족들도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했었을 것이다.


지난 민주노동당 당직선거를 계기로, 민족주의 운동계열인 이른바 '자민통' 등 NL 계열 운동권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짐승 역시 그러한 비판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으며 전적으로 지지하는 편이다. 그러나 비판의 방향이 주로 그들 조직의 경직성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그들이 보다 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면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가 일정부분 해소될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꼴통' 이라고만 말하는것은 효과적이지도 않고 애초에 의도했던 취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짐승은 이제 진정한 문제인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지향점에 대해서 비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혹은 민족 이라는 단위로 변혁운동을 고민하고 그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해당 단위안의 모든 계급은 '같은 편' 으로 생각할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협조하고 단결할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그 단위 안에서 지배권력을 가진 일부계급이 현상적으로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이는 계몽을 거쳐 '친 민중적인 의식을 갖도록 끌어올려야' 할 계급이지 결코 해소시킬 계급은 아닌것이다.


그러나 계급의 차이는 그 존재의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으로 끌어올려 지는 어떤것이 아니다. 자본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것이 필수 불가결하고, 국가지배자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피지배민중의 존재 역시 필수적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에 따른 '계급협조주의'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계열은 보다 '양심적' 으로 보이는 지배계급의 특정분파에 대해 지지하는 양상을 보이며 해당 분파가 생산하는 사회 경제적인 착취와 모순들은 '부차적인것', 혹은 '현실단계에서 어쩔수 없는 것' 으로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지지하는 지배계급의 분파가 정치권력을 잡고 권력화 되었을때 일부 동조하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김대중 정권, 그리고 열린우리당의 대북정책에 대해 이들 세력이 대체로 동조하는 포지션을 취한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북한정권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 역시 민족을 그 단위와 지향으로 하는 근본적인 이념에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
'자민통 계열' 이 진보진영에 마이너스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이러한 계급협조주의 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가지 주의할것은 '계급협조주의' 와 같은 것이 민족주의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들 '자민통' 을 비판하면서도 의회 활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열린우리당 과의 공조를 염두에 둔다든지, '운동권 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노동계급에 치중하는것 보다 대중정당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 말하는 이른바 'PD' 계열내의 일부 분파들 역시 국가권력과의 타협과 협상을 중심에 두고 '보다 친민중적인' 지배계급내의 정치파트너를 찾는 이상 결과적으로 '계급협조주의' 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민족주의 운동 세력이 운동권내의 우파라고 한다면, '좌파' 경향 이라고 해도 위에서 말한것과 같이 지배계급과의 타협을 전제로 하는 세력들 역시 우파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 스스로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좌파에 묻어가려고 한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큰 틀에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여 반제국주의, 반전 운동의 의제에 대해서 부차적인 무엇으로 취급하거나 '민족주의적 의제' 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며 회피한다면 그 역시 좌파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것인데, 유감스럽게도 독도문제가 불거졌을때 민주노동당 내의 일부 '좌파' 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 비록 군대주둔과 같은 주장은 문제가 많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망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다.


 원래는 짐승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려다가 스케일이 넘 커져버린것 같은데, 아무튼 온라인상의 이런 저런 글들을 보다 보니 떠오르는것이 있어 대충 갈겨써봤다.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쓸데없이 길어지는것이 어쩌면 '천성' 인가 하는 불안한 생각도 불현듯 든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규직 노동자 양보론에 대해 - 무엇으로 현실을 바꿀것인가?

* 당직 선거중 정책위의장 선거와 관련하여 중앙당 게시판 에서 윤영상 후보의 '정규직노동자 양보론' 에 대한 토론이 진행중입니다. 이에 관련해서 허접하나마 끄적거려둔 글이지만, 반드시 선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됨으로 블로그에도 올려봅니다.

 

------------------------------------------------------------------------------------

 

저는 작은 웹 에이젼시 업체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고, 마포지역위원회 당원으로 정책위의장으로 김인식 후보를 지지하고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자신이 윤영상 후보를 지지하고 있고, 그의 정견에 동의한다면 김인식 후보를 지지하는 당원들과의 토론에 성실하게 임하면 그만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진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해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가 필요하다' 고 생각한다면, '윤영상 후보의 정규직 양보 개념은 문제가 있다' 고 주장하는 당원들의 주장을 꼼꼼히 읽어보고 차분하게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면 아무런 문제 될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범적인 토론의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윤영상 후보를 지지하시는 당원 동지들중 많은 분들이 성실하게 토론에 임하고 계십니다만, 게시판에서 오래 활동하시던 일부 당원들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것 같습니다. 단순히 상대방 후보 진영에 대해 '너희 정파는 원래 비현실적' 이라는 말로 도배만 하면 문제가 해결 되나요?


비록 윤영상 후보가 '정규직노동자 양보' 라는 말을 노무현 정권의 그것과 같은 의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동지들의 말 처럼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윤영상 후보의 주장을 현실로 연결시켜 본다면 결과적으로 자본에게 더 강력한 타격을 주고 그들로부터 더 많은 '양보' 를 쟁취하는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내에서의 임금 재분배 정도의 결과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현실' 을 만들기 위해서 민주노동당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현실적으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를 통제하고 민주노조 활동을 옭죄고 가로막고 있는" 모습들이 존재하는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 '양보' 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규직 노동조합 지도부가 그러한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해당 지도부에 대해서 비판하고 노동조합의 원칙과 방향을 올바로 세울수 있도록 현장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압력을 행사해야 하는 문제이지, 전체 정규직 노동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 '양보' 하라고 요구하는것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말입니다.


민주노동당이 위와 같은 퇴행적인 모습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를 저해하고, 정규직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제적 문제에만 매몰되도록 조장하는 투쟁회피적 지도부에 대해서 분명한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원하지 않고, 조합원들을 교육하거나 연대투쟁에 머뭇거리는 지도부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통해서 일반 조합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지도부가 행하고 있는 배신적 행위에 대해서 반대할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비정규직 노조를 통제하고 민주노조 활동을 옭죄고 가로막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행태가 바로잡아 질 수 있겠지만,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주장한다면 그 지도부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감하고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회임금제와 같이 제도적으로 규정할수는 없습니다. 사측이 노동자들의 요구에 '양보' 하듯이,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를 마치 노/사 의 관계와도 같이 나누어 분열시킴으로서 윤영상 후보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연대, 노동계급의 단결을 저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영상 후보를 지지하는 동지들은 '노동계급의 연대투쟁' 이라는 단어에 비관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진정으로 윤영상 후보가 주장하듯이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 를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연대를 건설하려면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진지하고 흔들림없이 연대투쟁을 진행 ( 금호타이어 공장의 모범적인 사례에서 보이듯이 ) 하는 가운데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시혜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연대의식의 발로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양보' 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인가, 그렇지 않은 방법인가 하는 부분은 단순하게 투쟁에 중심을 두느냐 그렇지 않고 의회협상에 중심을 두느냐 하는것으로 구분지어질수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 스스로의 상황이 보다 나아지길 바라면서, 그것을 위해서  정규직 노동조합, 그리고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보다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연대해서 싸울수 있도록 당이 비판해야 한다고 말하는, 비정규직 권리보장법안의 후퇴는 지배계급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더욱 옥죄게 만들수 있는 법적.이데올로기적 빌미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김인식 후보의 주장이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 만을 주장하고 있는 윤영상 후보의 주장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당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의회주의에 있습니다.

* 아래는 민주노동당 당원게시판에서 '은회색나무' 님이 쓰신 '당의 위기가 의회주의 때문이라는 거짓말' ( 원문보기 ) 에 대한 답글입니다. 답글로 달긴 했지만 의회주의 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담겨 있으므로 블로그에도 올려봅니다.

 

-------------------------------------------------------------------------------------

 

우선 이해할수 없는 부분부터 지적하고 싶습니다. 은회색나무 님은 "당 건설의 역사를 비판적지지와의 싸움이었으며, '원외중심','대중투쟁' 중심론과의 투쟁의 역사로 이해" 하고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비판적 지지와의 싸움이었다는 부분은 저도 의의가 없습니다만, '원외중심 대중투쟁 중심론과의 투쟁' 이라고 하신 부분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당 건설의 목표가 오로지 국회입성, 의회내 활동에 국한된 것입니까? 물론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동지들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당 내에 존재하는 여러 의견들 중 하나일 뿐이지 '당 건설의 목표' 가 될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대의원대회 등에서 승리한 사람은 '조합조직 지도부이고 투쟁단체 활동가들' 이며, 패배한 사람은 '사회(민주)주의가 좋아서 입당한 평당원들이고, 당 밖의 조직되지 않은 노동대중들' 이라고 말하며 활동가와 일반 평당원, 미조직 노동자들을 대립시켜 놓고는 이들 평당원과 미조직 노동자들이 마치 의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과 같은 것인양 말하는 부분은 심각한 왜곡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동지는 의회주의 비판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의회주의 비판은 국회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거나, '정치투쟁' 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의회주의에 비판적인 동지들은 지난 총선, 보궐선거때 선거운동을 하는 대신 '우리가 부르조아들의 국회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고 선전했어야 할 것입니다만, 오히려 그 동지들은 자기 시간을 쪼개가며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에 임했습니다. 의회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것은 의원들은 입법기관에서 전문가의 역활을 수행하는것과 동시에 제도권 안에서 투쟁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내는 마이크의 역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회내에서의 활동이 한계가 많다는 주장들은 우리 국회의원들도 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단병호 의원은 ( 최근에 비정규직 권리보장법안에 대한 후퇴한 수정안을 제출하긴 했지만 ) 그 동안 꾸준하게 열린우리당의 '비정규직 보호법안' 을 저지하는 힘은 의회내에 있지 않으며 거리에서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의 힘에 달려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적들은 우리의 능숙한 '타협의 기술' 에 감화받고 토론에서 설득당했기 때문에 민중의 이해를 위해 양보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자신들이 받을 타격이 현실로 닥쳐올때만 그렇게 움직일 것이며, 따라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것은 저들에게 양보를 강제할수 있을 만큼 피지배 민중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저지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리입법을 쟁취하는 문제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강력하게 투쟁할 필요가 있으며, 당은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는데 주력하고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동지는 집값파동,삼성X-file,조승수 의원직 박탈,지방의회 선거구 획정 등 사회 정치적 의제에 당이 전력을 기울이고 당원들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도 그러한 주장에 동의하며, 민주노동당이 보다 강력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향후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치 사회적 의제를 둘러싼 투쟁역시 국회 안에서의 한정된 '정치투쟁' 으로 승리를 보장할수 없습니다. 저들에게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의제를 둘러싼 민중운동을 진지하고 의욕적으로 조직하여 국회의원 몇몇의 '위로부터의 정치투쟁' 대신 아래로부터의 정치투쟁을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적들을 견딜수 없을 정도로 압박할때 비로소 정치 사회적 의제들도 우리의 뜻대로 이룰수 있을 것입니다.


몇몇 농민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얻어낸게 무엇이냐고 동지는 물었습니다. 물론 경찰청장 해임과 대책기구 설립 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 없다고 해도 그 역시 두분이 돌아가시고 수백명이 부상당하면서 싸웠던 투쟁이 얻어낸 성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만약 거대한 거리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의회활동에 치중했을때 우리가 얻어낼수 있는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치열하게 싸워서 압력을 넣어도 꼼짝도 안하는 정부가 별다른 지지행동도 없는 소수정당의 소수의원들 눈치를 보겠습니까? "농업보호정책의 필요성, 도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다양한 방법들,논리들" 을 고민하는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한 정책들을 실현시킬수 있는 힘이 먼저 필요한거 아닐까요?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정책이 허접해서 한나라당 과 열우당이 반대하고 있는 겁니까? 새로이 제출한 수정안을 포함해서 우리가 제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안이 법안으로서는 너무나 허접해서 열우당이 쳐다도 보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동지는 "조직된 대중을 민주노동당 지지로 이끌고, 원칙에 비타협적이었다는 명분을 살리면 충분합니까? 차라리, 원내에서 예산안을 볼모로 인권위 수준의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통과시키자고 했어야 옳았지 않았나, 말이라도 꺼냈어야 하는거 아닌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2월 20일 민주노동당 주최 ‘비정규 주체 간담회’ 에 참가한 학습지 노동자는 '우리는 민주노동당이 쌀 비준안 강행처리를 저지하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퇴한 수정안을 보고 무척 실망했다' 고 말했습니다. 전국비정규직연대회의 구권서 의장은 '민주노동당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정부 여당을 폭로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토론회에서 전국비정규직연대회의 오민규 집행위원장은 “수정안은 저들에게 법적·이데올로기적 빌미를 제공했다” 고 지적했습니다. 동지의 말대로 '인권위 수준의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통과시키자고 했었' 다면, 그를 위해서 열린우리당의 바지끄뎅이를 잡고 매달렸다면 도대체 무슨 얼굴로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할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에게 민주노동당이 희망적인 대안 정치세력으로 각인될수 있겠습니까? 


동지가 지적한 여러가지 당의 위기에 대한 원인들 - 무능함, 활동가들의 명확하지 못한 입장, 당 지도부의 권위주의, 비밀주의, 정파구도 등 - 에 대해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원인은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확실한 차별점을 가지고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함으로 인해서 스스로 지지율의 하락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에서 열린우리당과 공조하는 스탠스를 취했다가 뒤통수 맞았듯이 의회내에서 지배계급들과의 공조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모습들이 실제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자꾸 후퇴만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에 주었던 희망들을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은 동지가 지적했던 "구체적 사안에 대한 대처방법의 문제, 혹은 정치적 처신의 제약성, 당력의 크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대중투쟁이 아닌 의회내에서의 타협을 중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근본적인 문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고, 때문에 사안에 대해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힘없이 밀려나가는 모습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이 '무능' 하게 보여지고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부분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을 것입니다.


의회주의 노선은 겸직 금지 조항의 삭제 등의 부가적인 조치들을 수반하면서 정치활동을 국회의원들에게 집중시키게 될 것입니다. 민중운동의 힘이 기반이 된 정치활동이 아닌 의회 내부 활동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활동은 그 실효성에서도 의심스럽지만 무엇보다도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을 믿기보다 쟁점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며 국회활동에 이목을 집중하도록 만들것이고 이는 일반 당원들로 하여금 보다 수동적인 참여자로 남게 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이, 그리고 전체 운동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수 국회의원이 지배계급과의 공조여부를 중점으로 두는 위로부터의 운동 이 아니라 여전히 노동자 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추구하는 보다 좌파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런 이야기는 편파적이지 않아? - 중립에 대한 환상.

지난 아시아나 항공 조종사 노동조합의 파업때도 그랬지만, 온라인 게시판 등에서 토론하다보면 종종 제목과 같은 말을 듣고는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노조의 입장이지' 라는 것이죠. 비단 노동조합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강정구 교수를 둘러싼 논쟁이나 민주노동당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는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좌파적 시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당신의 이야기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듯 합니다.


좀 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전에, 먼저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 이 가능한지 부터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마다의 생각이 있고, 비단 '좌파 운동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어떤 사람이 사회과학이나 시사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지배자들이 교육시킨 생각들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관점이 없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관점이 지배자들의 관점에 대부분 동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죠. 설령 '유행과 연예인만 아는 젊은층' 이라고 하더라도 일부에서 이야기하듯이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중립적이지 않다' 는 이유로 비난하는것이 정당하려면 사회생활과 전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집단이 그 집단안에서 이 사회를 구경하면서 즐기는 담소의 자리 정도가 아니면 안 될것입니다. 모든 관점과 입장에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중립이란것도 존재할수 있겠지요. 그런게 가능하다면 외계인들의 집단 정도가 아닐까 하는데, 그나마도 그들이 지구에 찾아오는 어떤 목적이 있다면 ( 관광이든 우호방문이든 전쟁준비든 이민요청이든 ) 그 사회에 대한 일정한 분석이 필요하니 또 모를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중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보수층, 보수적인 의견도 존중해야 하는것 아니냐'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그들을 존중할 필요는 있습니다만 그런 의견 자체를 존중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 반드시 포함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파의 의견'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나 문화재를 지키자는것이 아니라 기존의 소수 기득권계층,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 이라는 개념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질까요? 그것은 현실 사회가 전혀 '중립적' 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그와 같은 역학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준 사건이 바로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지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이 명백한 위법행위를 저지른 다른 위원들은 그대로 두거나 오히려 사실상의 사면조치까지 내리면서 조승수 위원만 과중한 벌금형을 내린 것은 그야말로 법은 만인앞에 평등하지 않으며 법리해석이 중립적으로 이루어 지는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자본과 정치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각종의 제도와 장치들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피지배 계급들에게는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하고 교육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비단 조승수 의원의 건만 아니라 우리들은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매일 펼쳐보는 신문과 TV 뉴스 들에서 일상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한 상황들을 많이 보고 겪게 됩니다. 심지어 검찰 수뇌부들 처럼 중립이란 단어를 이상하게 비틀어서 이용하는 경우도 빈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일들이 거듭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세상이 전혀 '합리적인 원칙' 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다는것을, 즉 지배자들에게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 인식할수 있게 됩니다. 중립을 강조하는 경향은 그러한 편향성에 대한 일종의 반발인 것이죠.

 

그런면에서 보면 중립을 강조하는 경향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쪽에서 살펴본것처럼 중립이란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도 합니다. 혹자는 '보수, 진보 양 진영의 입장이 조화롭게 기능할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것이 중립이 아닌가?' 하고 물어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 기사 한 꼭지에 박수쳐주고, 한겨레신문 기사 한 꼭지에 박수쳐주면서 양쪽의 주장을 똑같은 정도로 지지해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이 될수는 없습니다. 그런 입장으로는 아무런 대안도 만들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적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사람으로 노암 촘스키와 함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는 '하워드 진' 의 '달리는 기차위의 중립은 없다' 라는 책은 그러한 입장이 왜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립이 될 수 없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책은 하워드 진이 진행해온 시민권 투쟁, 반전운동, 노동운동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이면서, 동시에 현 체제에 대한 비판이고, 그에 이끌려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워드 진은 이 책을 통해서 '이미 기울어져 있는 세상에서의 중립이란 현 체제의 유지' 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것이 사실은 보수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죠. '달리는 기차' 라는 단어는 이미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세계에서 반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찬성일 따름이며,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찬성아니면 반대의 이분법' 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일부도 있습니다만, 체제를 유지하는 중립의 입장을 취하면서 이분법 운운 하는것은 모순이고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당신의 이야기는 중립적이지 않아' 라고 말하는 비판에 수긍할수 없으며 그 비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말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입장은 중립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여성,장애인 등 피지배 계급의 입장에 철저히 '편파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더 옳바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순히 선, 악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이 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보다 나은 삶' 을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진보 란 바로 그런 삶을 만들어 가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quot;나의 페트로그라드여!!&quot; - 세계를 뒤흔든 열흘

부끄러운 고백부터 하나 하고 넘어가자면, 그다지 두껍지 않은 이 책 한권 보는데 거의 두달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입니다. 입버릇처럼 '짐승은 게으르다' 고 말하면서도 아직 고치지 못한 이놈의 나태함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_-;;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것은 좀 더 오래전의 일입니다. 모임이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서 같이 활동하는 분으로부터 이 책을 추천받았죠. 러시아 혁명에 관한 이보다 더 자세하고 생생하며 옳바르게 전달하고 있는 책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오래된 책인데다가 절판된지도 꽤 지난 시점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을거라고 하시더군요.


워낙 무식한 짐승인지라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소개 받습니다만 그 즉시로 사거나 다시 추천받거나 하지 않는이상 솔직히 책들의 제목을 100%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세계를 뒤흔든 열흘' ( 추천받을 당시에는 '세계를 뒤흔든 10일' 이라는 제목이었던것 같습니다 ) 만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더군요. 과연 찾는것이 쉽지는 않았는데, 올해 다시 번역되어 재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길가다 돈 주운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


중,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해 내는게 별로 달갑잖은 짐승입니다만, 중학교때 무엇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수입시간중 국사 선생님이 ( 아닐수도 있고...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 안납니다 ;; )  굉장히 재미있는 말을 하던것이 기억이 납니다. 대충 기억나는것만 해도 '농민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하고는 모순적이다' , '볼셰비키란 원래 다수파 라는 뜻이고, 멘셰비키는 소수파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볼셰비키들이 소수였다. 그 소수들이 힘으로 정권을 쿠테타 한것이 러시아 혁명이다' 등등의 말들을 하셨던거 같습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러시아의 10 월 혁명 이라고 하면 위와 같이 '볼셰비키의 무력 쿠테타' 라는 인식이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왜곡은 광범위하게 이루어 졌는데,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권력을 잡는것을 두려워하는 자본가 정권, 지배계급에 의한 왜곡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고 있는 좌파진영 안의 스펙트럼들 - 스탈린주의,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최근에 부상하는 자율주의 등등 -  에 따라 다양하게 왜곡되어 우리에게 알려져 왔습니다. 사회발전단계를 무시한 볼셰비키만의 독단적 결정이라는 주장, 무리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불필요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는 주장, '프롤레타리아 독재' 라는 독선적인 방식때문에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사람들을 탄압했다는 주장 등등 의 왜곡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대안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념 때문에 그에 배치되는 러시아 혁명을 깍아내리고 싶었겠지만, 그로인해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의 논리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 자신들 역시 탄압받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특파원으로 유럽에 건너간 미국인 저널리스트 존 리드 가 러시아 혁명의 한복판에서 혁명을 지켜보고 '중립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그러나 개관적으로' 기록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은 그러한 모든 왜곡들을 한번에 걷어내어 우리에게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볼세비키들이 어떻게 단 4-5개월만에 소수파에서 다수파로, 러시아 민중의 혁명의지를 온전히 실현하는 집권세력으로 성장할수 있었는지에 대한 과정이면서 동시에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에게 집중하지 않고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입장에서 써 내려간 기록들이기에 그 가치는 더욱 소중합니다.


1917년 2 월의 혁명을 통해서 로마노프 왕조는 사라졌고 전제정치도 역사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이후 임시정부를 주도한 러시아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카데츠 정당, 그리고 자본가들과 타협하려고 했던 멘셰비키들은 민중이 이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요구사항, 즉 러시아가 평화협상을 맺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는것과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토지재분배를 통해 농민들이 농업노동자 상태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하는 일 등을 수행할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 하에서 신음하던 피억압민족들의 자치에 대한 요구사항도 있었으나 임시정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지배계급의 일부에 대해서 타협하는 자세를 보이며 중도파로 남아 있고자 한 케렌스키 정권이 민중들의 삶을 무엇하나 나아지게 하지 못했고,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여 마침내 민중의 손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것은 현재의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좌파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할 것입니다.


기록은 10월 혁명이 노동자·병사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봉기 보름전의 소비에트 중앙회의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제외하고 아무도 봉기에 대해서 지지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봉기에 대한 안건이 부결되었을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는 봉기에 찬성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소비에트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날 것입니다' 라고 말한 부분, 봉기 직후 존 리드가 인터뷰한 한 사회혁명당원의 고백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 대중이 따르고 있는 것은 볼셰비키죠. 우리에게는 추종자가 없습니다.' 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책중에 언급된 장갑차 부대 병사들의 사례는 10월 혁명이 러시아 노동자,병사 들의 민주적 결정에 의한 것임을 잘 나타내어주면서 동시에 혁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병사들처럼 사태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연설을 경청했다.… 수많은 노동자·병사·수병 들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마침내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결의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바로 그것이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러한 노동자,병사 들의 지지에 힘 입어 혁명은 거의 무혈혁명에 가깝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을 완성하는것이 단순히 매끄럽게만 진행되었던것도 아닙니다. 임시정부 관료들과 카데츠, 도시의 소 부르조아들이 다수를 장악하고 있었던 시 의회(두마) 등이 새롭게 탄생한 노동자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구제위원회' 의 반혁명적 태도,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다가 도망친 케렌스키가 군대를 끌고 일으킨 내전 등은 몇차례나 소비에트 (평의회) 를 기반으로 새롭게 조성되고 있던 권력을 위기에 빠트렸고 노동조합 관료들은 일반 조합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혁명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러시아 혁명 뿐만 아니라 모든 혁명의 시기에 이와 같은 우파들의 조직적 반격이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들이 그러했듯이 이와 같은 시도들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은 러시아에서 1917 년 10 월에 무슨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마치 눈앞에서 펼쳐보이듯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단지 활자에 불과할 뿐인 기록된 사실들에 마음졸이고 흥분하고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 동시에 이 책을 통해서 단순히 '존재했던 사건들의 나열' 만을 얻지는 않을 것입니다. 혁명의 과정을 쭉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레닌의 추천사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 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충분한 이해' 를 가질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카탈로니아 찬가' 와 함께 르뽀문학의 걸작으로 불리며 '혁명을 기록한 모든 책들 중에서 단연 최고' 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을 짐승도 강추하고 싶습니다^^

 

운전을 하던 늙은 노동자는 한 손에 운전대를 쥐고 다른 손으로 저 멀리 빛나는 수도를 가리키며 환희에 찬 몸짓으로 말했다.


" 내 것입니다!" 그는 빛나는 얼굴로 외쳤다.

" 이 순간,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나의 페트로그라드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