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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비웠으나, 허전함이 마음을 채운다

 

30년 된 집을 비웠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78년 우리 가족은 대구에서 부산 광안리 그 집으로 이사를 왔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그 집에서 보냈고, 작년 10월 서울 올라오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집을 정리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계시고, 이후에도 계속 병원에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한 때 그 집에 많게는 7명이 살았다. 대지까지 포함해서 40여평 되는 집. 지금 생각해보면 적지 않은 식구가 살았다. 우리 식구, 그러니 아버지,어머니,형,누나 그리고 나까지 5명에다 셋방 식구 2명까지 포함해 모두 7명이 된다. 70년대 말, 80년대 초까지 주택에는 어느 집 할 것 없이 조그만 부엌이 달린 방이 하나 있었다. 우리 집도 그런 방이 하나 있었고,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세를 줬다. 가난했던 그 시절 도시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책을 통해 70,80년대 공장 노동자들이 몸의 의탁했던 셋방, 벌집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래도 우리 집은 당시에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 살던 주거양식이었다.

 우리 집 셋방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오빠와 여동생 둘이 살았다. 오빠는 어느 회사에 다녔는지 기억에 나지 않지만, 여동생은 농협 직원이었다. 추측컨대 그 오빠도 양복을 입고 다녔으니 사무직 직원이였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 큰 오빠와 여동생이 한 방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이였겠지만, 그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형이 중학교에 가게 될 쯤 그 둘은 우리 집을 나갔고, 그 후로 쭉 우리 가족만 살았다.

 초등학교 기억을 돌이켜보면 부잣집 친구 집을 자주 놀러갔던 것 같다. 그 친구의 집은 2층 주택이다. 그리고 마당이 넓었다. 잔디는 기본. 그러다보니 그 마당에서 야구를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80년 초 당시 부자들의 주거양식은 돌이켜보면 2층 주택이었다.

 85년 중학교를 갔다.  초등학교와는 달리 내가 살던 광안동뿐만 아니라 근처 동의 아이들도 만나게 됐다. 당시 광안동은 압도적으로 주택이 많았고, 아파트라 해봐야 5층짜리 단독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파트 이름이 기억나는 곳도 있다. ‘금잔디’ 아파트다. 지나서 생각하니 참 당시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아파트 이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넓은 마당에 잔디가 당시 부잣집의 기본적인 모습이었으니, ‘금잔디’를 아파트 이름으로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다른 데로 잠시 샜다. 중학교에서 가서는 이전과 다른 부잣집 애들을 만났다. 2층 주택도, 5층 아파트도 아닌 10층 아파트, 그것도 단독이 아닌 대규모 단지에 사는 애들이었다. 그 아파트 이름은 ‘남천삼익’이다. 부산 광안리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당시 부산지역 부자들은 아마 죄다 거기 살았을 거다. 80년대 중반부터 돈 있는 사람들은 2층 주택을 떠나서 ‘남천삼익’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쯤부터 아파트 투기 바람 같은 것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집이 주거 개념에서, 치부의 대상으로, 재산증액의 대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으리라.

 80년대 중후반쯤 우리 동네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층 주택을 허물고, 3층 다세대 주택으로 올리거나, 아니면 두 집이 하나로 합쳐 ‘빌라’로 만들었다. 물론 이름만 ‘빌라’일 뿐 사실은 연립주택 수준이다. 서민들도 집을 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집의 개념이 당시 주거만 하는 곳이 아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87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임금이 올라갔던 것도 집의 변화를 불러온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런 변화가 생기는 와중에도 우리 집은 1층 그대로였고, 지금도 1층이다. 2번의 공사를 통해 벽에 단열재를 바르고, 높던 천장이 낮아지고, 마루 대신 온돌이 깔리는 나름 변화는 있었다. 더 큰 변화는 그 집에서 살던 식구들이 하나 둘 씩 그 집을 떠난 것이다. 제일 먼저 떠난 사람은 형이다. 형은 대학을 졸업하고 92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울산으로 갔다. 다음은 누나였다. 누나는 96년 결혼하고 자형 직장 따라 서울로 갔다. 아버지는 2000년 그 집에서 돌아가셨다. 3년 쯤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20여년 살았던 바로 그 집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냈다. 나는 계속 부산에서 살 줄 알았다.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 걸, 나도 작년 10월 서울에 올라왔다. 올 가을 쯤에 결혼할 여자친구가 인천으로 직장을 구해 올라오게 됐고, 고심 끝에 나도 여자친구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벌써 7개월째다. 지금은 누나 집에서 함께 얹혀 살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올라오고 혼자 계셨다. 10월 8일 짐을 가득 싣고 차를 몰고 부산 집을 출발 해 서울로 올라 올때, 어머니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쳐다보셨던 것이다. 아직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혼자 계시다가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내가서울로 오고 두달 후 쯤의 일이다. 집에 아무도 안 계셔셔 이틀 동안 집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셨다. 다행히 동네 아주머니가 어머니가 안 보이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셨고, 이틀을 안 넘기고 병원으로 모실 수 있게 됐다. 11월 추운 겨울에 만약 하루를 더 그렇게 넘겼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아직도 모연이 송골하다. 내가 올라오자 말자 그런 일이 생겨 지금도 마음이 착찹하다. 이런 마음은 언제 떠났던 우리 형제들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어머니는 재활을 열심히 했다. 어머니는 혼자 걸을 수 있게 돼 집에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요양병원에 모셔야 할 상태다. 살 가족이 없어 부산 집을 팔았다. 그 돈은 이후 어머니 병원비로 쓰기로 했다. 그 집은 지금은 팔려서 돈으로 바뀌었지만, 어머니 병원 셋방살이 돈이 됐다. 지금 생각해보니 집은 가족의 역사고, 그 사회상의 반영인 것 같다. 이제 부산에 가도 잘 데가 없어졌다. 마음이 허전하다. 결혼하면 부산 연산동에 있는 여자 친구 집에서 자게 되겠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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