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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있다면 서울이라도 괜찮아

-  이 글은 부산울산경남 열사추모사업회에서 일하던 후배에게 쓴 편지글입니다. 이글은 열사회 소식지 '솥발산'에 실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옛날 열사회에서 일했고, 이 후배는 내 후임으로 열사회에서 9년 동안 일해왔습니다. 

 

 너가 1월 말에 열사회를 그만두고 곧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월에 서울에서 결혼한다면서. 윤경씨가 전화를 했다. 너한테 편지를 써 달라고 하더라. 열사회 기관지 솥발산에 싣겠다며. 그래서 내가 “요즘에 애인한테도 편지를 안 쓰는데 내가 보경이한테 왜 편지를 쓰냐?”고 튕겼다. 그러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장면이 무엇인지 아니? 아마 99년이였을거야. 너가 부산대 구 정문 쪽 2층 집에서 방 하나를 얻어 하숙을 하고 있을 때였지. 그해 어느 날 너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고 한 참이나 종적인 묘연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난 너 하숙집을 무작정 찾아가서 막차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날 허탕 쳤지.


 왜 이 생각이 났을까? 그 때 너는 뿌리 없는 아이 같았지. 너가 결혼한단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도 가족이 생기는구나란 생각을 했다. 참 다행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떤 영화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이보그라도 괜찮아”란 영화에선 ‘미친 놈’이 ‘미친 년’도 좋아하는데, 멀쩡하고 게다가 번듯하기까지 하다면 ‘미친 짓’인들 못할랴? 내 봐라. 서울까지 여자 쫓아오지 않았느냐?


 요즘 어머니가 아프니 부산 가도 잘 곳이 마땅치 않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부산 광안리 집은 사람이 안산지 2달 가까이 돼 너무 춥다. 작년 연말에 부산 가서 집에서 잤다가 감기에 된 통 걸렸다. 새해 시작부터 고생 무지 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적응이 빠르다. 부산으로 첫 출장 갔다가 서울 올 때는 군대 첫 휴가 나온 신병이 복귀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서울로 오는 길이 집에 오는 기분이다. 빨리도 달라졌지. 물론 부산에 가도 잘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큰 이유겠지.


  불과 얼마 전까지 부산은 뿌리 내리고 산 곳이지만, 이제는 가더라도 잠시 마음 편히 쉴 곳이 없으니 씁쓸하다. 지금 부산은 나에게 어떤 곳일까?


 잊고 있었거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일이 불현듯 구체적으로 다가 올 때가 있더라.   지난 20일 여자친구랑 남영역 근처를 거닐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된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대공분실 앞에 딱 서게 됐다. 한 번도 그 앞에 간 적도 없었다. 우연이었지. 하지만 여기가 바로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진 곳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얼마 전 이곳에서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87년에는 난 중3이었으니 거리에서의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난 박종철 열사 부친이 생각났다. 97년 1월 어느 일요일, 합추사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첫 만남이었다.


 지금의 열사회, 그 때는 합추사였지. 겨우 1년 있었고,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한 기억으로 될 살아 날 때가 있다. 우연찮게 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서면 박종철 열사 부친이 떠오르듯이, 인혁당 사건이 사법부에서 무죄란 판결을 내렸다는 기사를 봤을 땐, 인혁당 유가족들이 생각났다. 하물면 9년 있었던 너에게 더 많은 기억이 있을 것이고, 그 것이 어느 날 어떤 매개를 통해 불현듯 튀어 나올 것이라고 짐작한다.


 서울에 와서 책을 많이 본다. 출퇴근 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어버리니 그 시간 동안 소일거리로 책을 뒤적인다. 최근에 신용복 선생의 ‘강의’를 읽고 있다. 참 좋은 구절이 많지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 소개하마.


 流水地爲物也(유수지위물야) 不盈科不行(불영과불행). 우리 말로 해석하면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이다. 흐르는 물처럼 건너뛰는 법 없이 우직하게 바른 길을 고집하란 뜻이다. 참 좋은 말 같지 않니? 서울에서의 삶도 건너뛰는 법 없이 물처럼 앞으로 나가길 바란다. 물론 물은 바위를 만나면 자신을 나눠 할류하기도 하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기도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결혼 축하한다. 서울 어서 오너라. 오면 내가 저녁을 대접하마. 서울? 다들 살기 어렵다고 하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울도 괞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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