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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잠

난 군 생활을 최전방에서 했다. 뭐 최전방이라고 해봤자, 서울서 가깝다. 파주와 휴전선 등이 내 군 근무지니까. 휴전선에서는 6개월을 보냈다. 우리 소대는 판문점 바로 옆 지역 경비를 맡았다. 휴전선 생활하면 생각나는 것이 네 가지 있다. 두가지는 자연현상이고, 또 다른 두가지는 노래다.

 

비무장지대는 모두가 아시다 시피 자연의 보고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곳. 그래서 한국 땅에서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자연,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저녁별과 아침 안개다. 휴전선에서의 생활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철책선 앞에서 근무를 선다. 해질 무렵 근무를 나갈 때 노을이 지면서 북쪽에 밝은 별들 하나 둘이 자리 잡긴 시작한다. 한 폭의 그림이다. 군생활이 너무나 지겹지만 이 때만은 저녁 노을과 별 빛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별이 예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저녁에 먼저 뜨는 별이 더 아름다웠다. 그 때 나에겐 저녁에 먼저 뜨는 별이 사실상 새벽별였기에 그랬을까?

 

또 하나는 아침안개다. 새벽녁이 되면 비무장비대 늪지에서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해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 기운이 약해 안개를 물리치지 못하고 서로가 어울려 있을 때, 그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수줍은 햇빛과 깨끗한 물기 머금고 있는 공기가 좋았다.

 

휴전선의 밤은 조용하지 않다. 특히 밤 12시에는 북한 방송과 남한 방송이 뒤 섞여 시끄러울 정도다. 북한방송은 주로 정치적인 내용과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북한 방송은 하루 종일 방송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남한 방송은 하루 종일은 아니고 일정 시간에만 튼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그대로 보낸다. 북한방송과 남한방송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남쪽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정치선동을, 남한은 방해방송인 셈이다.

 

북한방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깊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 가는 사이에 들은 노래다. 트럼펫으로 인터내셔널가가 잔잔하면서도 애잔하게 깔렸다. 이제 노래를 들었을 그 당시 감동은 생각안나지만, 그 노래를 듣고 너무도 감동스러웠단 기억만은 남아있다.

남한방송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양희은의 '백구'다. 밤 12시, 교대시간이다. 이날은 높은 고지, 2층 초소로 교대를 나갔다. 이 초소는 비무장지대다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교대 시간 30분 동안은 이전 근무조와 교대조가 같이 근무를 선다. 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서 잠시 땀을 식히는 동안 우리 쪽 방송에서 양희은의 '백구'가 흘러나왔다. 자연스럽게 집 생각이 났고, 강아지 때 보고 온 우리집 개 생각이 났다.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 밑 바닥에서 올라 왔다.

 

제대하고 나서 난 그 강아지한테 물렸다. 술 먹고 집에 와서 반갑다고 장난치다 물렸다. 그 놈 입장에서 왠 놈이 갑자기 나타나 주인인냥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왜 잠도 못자게 구냐였을 것이다. '백구'는 주인만 따르는 진도개지만, 믹스견은 노래의 소재가 아니다.  이렇게 현실은 냉정하다. 어쨌든 술 먹은 내가 개였을까, 그 놈이 '개쌔이'였을까? 

 

한참 군생활 이야기를 했다. 최근 언제부터인가 새벽잠이 없어졌다. 오늘은 6시에 일어나서 혼자  아침 챙겨먹고, 도시락 싸고, 자전거 타고 출근했다. 늙으면 부지런해지는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는데, 아마 그 새는 나이가 들어 새벽 잠이 없는 새가 아닐까? 새벽에 군 생활이 생각났다. 갑자기. 그래서 생각난 것을 적어봤다. 쓸데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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