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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2/27
    새벽잠
    으라차찻
  2. 2007/02/01
    애인이 있다면 서울이라도 괜찮아(3)
    으라차찻
  3. 2007/01/17
    생활인으로 진보에 다가선다는 것
    으라차찻
  4. 2007/01/16
    공간. 우리가 관계를 맺는 곳
    으라차찻
  5. 2007/01/05
    드디어 덧글!(5)
    으라차찻
  6. 2007/01/03
    노동부 장관 신년사임따 --+(2)
    으라차찻
  7. 2006/12/29
    우리들의 '슈퍼스타'
    으라차찻
  8. 2006/12/29
    사이보그를 만나다
    으라차찻

새벽잠

난 군 생활을 최전방에서 했다. 뭐 최전방이라고 해봤자, 서울서 가깝다. 파주와 휴전선 등이 내 군 근무지니까. 휴전선에서는 6개월을 보냈다. 우리 소대는 판문점 바로 옆 지역 경비를 맡았다. 휴전선 생활하면 생각나는 것이 네 가지 있다. 두가지는 자연현상이고, 또 다른 두가지는 노래다.

 

비무장지대는 모두가 아시다 시피 자연의 보고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곳. 그래서 한국 땅에서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자연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거의 원형대로 보존된 자연,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저녁별과 아침 안개다. 휴전선에서의 생활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철책선 앞에서 근무를 선다. 해질 무렵 근무를 나갈 때 노을이 지면서 북쪽에 밝은 별들 하나 둘이 자리 잡긴 시작한다. 한 폭의 그림이다. 군생활이 너무나 지겹지만 이 때만은 저녁 노을과 별 빛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별이 예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저녁에 먼저 뜨는 별이 더 아름다웠다. 그 때 나에겐 저녁에 먼저 뜨는 별이 사실상 새벽별였기에 그랬을까?

 

또 하나는 아침안개다. 새벽녁이 되면 비무장비대 늪지에서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해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 기운이 약해 안개를 물리치지 못하고 서로가 어울려 있을 때, 그 몽환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수줍은 햇빛과 깨끗한 물기 머금고 있는 공기가 좋았다.

 

휴전선의 밤은 조용하지 않다. 특히 밤 12시에는 북한 방송과 남한 방송이 뒤 섞여 시끄러울 정도다. 북한방송은 주로 정치적인 내용과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북한 방송은 하루 종일 방송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남한 방송은 하루 종일은 아니고 일정 시간에만 튼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그대로 보낸다. 북한방송과 남한방송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남쪽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정치선동을, 남한은 방해방송인 셈이다.

 

북한방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깊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 가는 사이에 들은 노래다. 트럼펫으로 인터내셔널가가 잔잔하면서도 애잔하게 깔렸다. 이제 노래를 들었을 그 당시 감동은 생각안나지만, 그 노래를 듣고 너무도 감동스러웠단 기억만은 남아있다.

남한방송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양희은의 '백구'다. 밤 12시, 교대시간이다. 이날은 높은 고지, 2층 초소로 교대를 나갔다. 이 초소는 비무장지대다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교대 시간 30분 동안은 이전 근무조와 교대조가 같이 근무를 선다. 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서 잠시 땀을 식히는 동안 우리 쪽 방송에서 양희은의 '백구'가 흘러나왔다. 자연스럽게 집 생각이 났고, 강아지 때 보고 온 우리집 개 생각이 났다.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 밑 바닥에서 올라 왔다.

 

제대하고 나서 난 그 강아지한테 물렸다. 술 먹고 집에 와서 반갑다고 장난치다 물렸다. 그 놈 입장에서 왠 놈이 갑자기 나타나 주인인냥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왜 잠도 못자게 구냐였을 것이다. '백구'는 주인만 따르는 진도개지만, 믹스견은 노래의 소재가 아니다.  이렇게 현실은 냉정하다. 어쨌든 술 먹은 내가 개였을까, 그 놈이 '개쌔이'였을까? 

 

한참 군생활 이야기를 했다. 최근 언제부터인가 새벽잠이 없어졌다. 오늘은 6시에 일어나서 혼자  아침 챙겨먹고, 도시락 싸고, 자전거 타고 출근했다. 늙으면 부지런해지는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는데, 아마 그 새는 나이가 들어 새벽 잠이 없는 새가 아닐까? 새벽에 군 생활이 생각났다. 갑자기. 그래서 생각난 것을 적어봤다. 쓸데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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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있다면 서울이라도 괜찮아

-  이 글은 부산울산경남 열사추모사업회에서 일하던 후배에게 쓴 편지글입니다. 이글은 열사회 소식지 '솥발산'에 실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옛날 열사회에서 일했고, 이 후배는 내 후임으로 열사회에서 9년 동안 일해왔습니다. 

 

 너가 1월 말에 열사회를 그만두고 곧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월에 서울에서 결혼한다면서. 윤경씨가 전화를 했다. 너한테 편지를 써 달라고 하더라. 열사회 기관지 솥발산에 싣겠다며. 그래서 내가 “요즘에 애인한테도 편지를 안 쓰는데 내가 보경이한테 왜 편지를 쓰냐?”고 튕겼다. 그러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장면이 무엇인지 아니? 아마 99년이였을거야. 너가 부산대 구 정문 쪽 2층 집에서 방 하나를 얻어 하숙을 하고 있을 때였지. 그해 어느 날 너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고 한 참이나 종적인 묘연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난 너 하숙집을 무작정 찾아가서 막차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날 허탕 쳤지.


 왜 이 생각이 났을까? 그 때 너는 뿌리 없는 아이 같았지. 너가 결혼한단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도 가족이 생기는구나란 생각을 했다. 참 다행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떤 영화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이보그라도 괜찮아”란 영화에선 ‘미친 놈’이 ‘미친 년’도 좋아하는데, 멀쩡하고 게다가 번듯하기까지 하다면 ‘미친 짓’인들 못할랴? 내 봐라. 서울까지 여자 쫓아오지 않았느냐?


 요즘 어머니가 아프니 부산 가도 잘 곳이 마땅치 않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부산 광안리 집은 사람이 안산지 2달 가까이 돼 너무 춥다. 작년 연말에 부산 가서 집에서 잤다가 감기에 된 통 걸렸다. 새해 시작부터 고생 무지 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적응이 빠르다. 부산으로 첫 출장 갔다가 서울 올 때는 군대 첫 휴가 나온 신병이 복귀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서울로 오는 길이 집에 오는 기분이다. 빨리도 달라졌지. 물론 부산에 가도 잘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큰 이유겠지.


  불과 얼마 전까지 부산은 뿌리 내리고 산 곳이지만, 이제는 가더라도 잠시 마음 편히 쉴 곳이 없으니 씁쓸하다. 지금 부산은 나에게 어떤 곳일까?


 잊고 있었거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일이 불현듯 구체적으로 다가 올 때가 있더라.   지난 20일 여자친구랑 남영역 근처를 거닐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된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대공분실 앞에 딱 서게 됐다. 한 번도 그 앞에 간 적도 없었다. 우연이었지. 하지만 여기가 바로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진 곳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얼마 전 이곳에서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87년에는 난 중3이었으니 거리에서의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난 박종철 열사 부친이 생각났다. 97년 1월 어느 일요일, 합추사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첫 만남이었다.


 지금의 열사회, 그 때는 합추사였지. 겨우 1년 있었고,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한 기억으로 될 살아 날 때가 있다. 우연찮게 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서면 박종철 열사 부친이 떠오르듯이, 인혁당 사건이 사법부에서 무죄란 판결을 내렸다는 기사를 봤을 땐, 인혁당 유가족들이 생각났다. 하물면 9년 있었던 너에게 더 많은 기억이 있을 것이고, 그 것이 어느 날 어떤 매개를 통해 불현듯 튀어 나올 것이라고 짐작한다.


 서울에 와서 책을 많이 본다. 출퇴근 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어버리니 그 시간 동안 소일거리로 책을 뒤적인다. 최근에 신용복 선생의 ‘강의’를 읽고 있다. 참 좋은 구절이 많지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 소개하마.


 流水地爲物也(유수지위물야) 不盈科不行(불영과불행). 우리 말로 해석하면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이다. 흐르는 물처럼 건너뛰는 법 없이 우직하게 바른 길을 고집하란 뜻이다. 참 좋은 말 같지 않니? 서울에서의 삶도 건너뛰는 법 없이 물처럼 앞으로 나가길 바란다. 물론 물은 바위를 만나면 자신을 나눠 할류하기도 하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기도 한다는 것도 잊지 말고.


  결혼 축하한다. 서울 어서 오너라. 오면 내가 저녁을 대접하마. 서울? 다들 살기 어렵다고 하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울도 괞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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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으로 진보에 다가선다는 것

- 11월 중순, 부산에서 서울 올라오는 기차안에서 적어본 글입니다.


서울에서 생활한 지 40여일째,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 울산으로 출장갔다가, 어머니 홀로 계시는 부산집에서 토요일 하룻밤 자고, 일요일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3시간 걸리는 기차 시간을 지겹지 않게 보내기 위해 ‘한겨레21’을 샀다. 특히, 이번 호에는 “아파트 가격이 거품”이며 “변두리 작은 아파트부터 가격이 붕괴할 것”이라는 내용의 특집 기사가 실렸다. 내년 서울에서 결혼할 것이고, 서울 변두리에서 살 것인 나에게 정말 반가운 내용이었다. 내년 나와 함께 살 여자도 이번 주 ‘한겨레21’을 사서 보았을 것이다. 물론 내가 사서 보라고 권했다. 내 여자 친구도 표지부터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거품의 미래,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인가?”

내 여자 친구도 나처럼 “제발 터져라”고 빌었을까? 당연할 것이다. 아파트 가격이 부산에 비해서, 그리고 서울의 불과 얼마전과 비교해서도 너무 비싼 탓이다. “거품은 터진다”는 한편 경제학이라는 과학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정책 또는 우연적인 계기에 의해 질서있게 거품이 가라 앉지 않으면, 공황 같은 상황이 초래하고, 이는 금융과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위기 진단도 함께 하고 있다. 주택시장의 폭등으로 시작된 일본의  90년대 경제침체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담고 있다. 결국 “제발 터져라”란 내 심뽀 속에는 모두가 어떻게 되든 내 가족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가족 이기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나의 ‘진보’가 기껏 미래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넘지 못하는 속 좁은 것이었다. 터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 분명하다면, 이를 어떻게 사회적 연대를 통해, 진보적 정책을 통해 주택정책의 방향을 ‘시장’아닌 ‘공공성’으로 물꼬를 틀 것인가? 이렇게 고민을 해 보는 것. 어려운 문제지만, 이렇게 접근해야 맞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KTX 기차 안에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 보좌관인 손낙구씨의 글을 우선 읽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주택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지만, 의원 보좌관을 하면서 주택정책 전문가가 됐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활인이 되어보지 않은 활동가를 믿지 않는다”고. 나에 관한한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주택, 부동산과는 나와 무관한 것으로만 알고 살았던 내가 이제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비록 사적인 이유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공공성으로 그 시각을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는 남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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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우리가 관계를 맺는 곳

 

어떤 공간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려면 나와 그 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을 때다.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 혈연적 관계가 그 곳을 구체적인 장소로 느끼게 한다.

 

부산을 떠난지, 3개월.

그 사이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계신다.

부산 광안리 집은 빈집으로 방치된지 한 달 반.

 

부산으로 출장을 가도 이제 집에서 안 잔다.

한 달 반이나 빈집은 너무나 춥기 때문이다.

 

이젠 부산으로 출장 갔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친근해졌다.

집으로 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처음 부산으로 출장 갔다 서울로 오는 길이 마치 군대 첫 휴가 갔다고 복귀하는 기분이었다.

 

30년 동안 부산에서 살아 스스로 부산 토박이라고 생각했다.

일하는 곳이 바뀌고, 30년 동안 살던 집에 어머니가 안 계시자,

부산은 이제 단지 익숙한 곳으로만 변한 느낌이다.

 

그러나, 부산 곳곳은 잊지 못할 사건들과 맺어져 있다.

어떻게 보면 단지 익숙한 곳만이 아니라 내 역사와 함께이리라.

그리고 지금은 다시 나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 아침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역, 내리지말자 새마을여승무원들의 농성장이 눈에 띄었다.

서울역을 나오니 ktx 여승무원들이 선전전을 하고 있었다.

서울역 맞은 편, 대우센터 건물 앞에서는 바로 그 곳에서 해고된 미화,경비 노동자들이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역 지하철 역사, 창원시에서 내걸은 시 홍보간판이 눈에 띄었다.

'기업 사랑의 도시, 창원'

홍보간판을 크게 차지하 사진은 창원로타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창원로타리, 지난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의 노제를 지낸 곳이다.

그날의 노제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저 사진은 서글픔으로 다가올 것이다.

 

공간도 어떤 관계를 맺냐에 따라 역사적이고, 계급적이다.

서울역 한편으로 이제는 흉물 마냥 버려진 구 역사가 보인다.

과거로부터 미래를 배우지 않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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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덧글!

사무실에 블로그를 하는 동료가 두 명이 있어(내가 알고 있는 한)

갑자기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해 12월 끄트머리에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전날 새벽 4시까지 술을 먹었으니, 한마디로 술 김에 만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만들고 나서, 예전에 내가 썼던 글 2개, 최근에 썼던 글 1개,

그리고 노동부 장관 신년사와 경향시문 기사 글을 모은 글 1개, 총 4개의 글쓰기가 이뤄졌습니다.

 

며칠 사이에 총 방문자수를 보니 118명이군요.

음... 생각보다 많은 방문자 수 같은데, 다른 블로그를 보니 헉 방문자수가 엄청 납니다.

부럽더군요.

 

내 블로그에도 드디어 덧글이 달렸습니다.

해미님 고맙습니다. 꾸~벅

 

저는 민주노총 공공노조에서 일하고 있는 박진현이라고 합니다.

작년 9월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30년 동안 살았습니다.

대구에서 5살까지 살았으니, 부산 사람인셈입니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이유는 여자 친구가 직장을 인천지역에서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자 따라 서울 올라 온 놈은 너가 처음이다라고 놀립니다.

 

누가 어떻게 놀리든, 제 선택에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첫 인사를 올렸네요. 차차 부족한 인사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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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장관 신년사임따 --+

노동부 장관 신년사입니다. 정말 '아니면 말고'의 모범입니다. 어의 없지만, 읽어 보시고 함께 짜증 내주세요. 노동부 장관 신년사 밑의 기사는 오늘 경향신문 1면 기사입니다. 제목이 "벌써 비정규직 '해고 사태'"입니다.

 

 

신 년 사


친애하는 전국의 근로자와 사업주 여러분


丁亥年 새 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 해도 건강하시고 뜻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작년 한 해 노동부는 노사관계 선진화와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를 목표로 노동행정을 펴왔습니다. 
그 결과 2년간 끌어오던 비정규입법을 통과시켰고,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노사관계 선진화 입법도 원만히 마무리 지었으며, 40년 만에 산재보험 혁신을 위한 법 개정 합의도 얻어 냈습니다.

또한, 고용서비스 선진화와 직업능력개발을 위한 인프라를 대거 확충하여 일자리 창출을 위한 든든한 기반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산업현장에서 대화와 타협, 협력과 상생의 정신으로 함께 일해 온 근로자와 사업주 여러분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친애하는 전국의 근로자와 사업주 여러분


올해 우리를 둘러싼 경제사회 여건은 여러 가지로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양극화 현상도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으며, 정치일정과 함께 사회적 갈등도 커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언제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를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 왔습니다. 금년에도 서로가 단결하고 협력하면 역경의 파고를 능히 넘어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올해 노동부는 “함께 활기 있게 사는 세상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하여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협력적 노사관계를 구축하여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전력을 경주하고자 합니다.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취약계층의 근로조건을 보장하겠습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좋은 기업 환경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에 동참함은 물론,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는 등 더 나은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노력하겠습니다.


고용의 총량을 늘리기 위한 노력과 함께 고용의 수급을 조정하고 양질의 고용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도 진력하겠습니다. 작년에 인적·물적으로 확충된 고용지원센터와 폴리텍대학 등 직업훈련기관의 활동을 더욱 내실화하여 선진국 수준의 고용지원서비스와 직업능력개발체제를 구축하겠습니다. 분권화시대를 맞이하여 각 지방에 맞는 맞춤형 고용지원체제를 구축하는 데도 힘쓰겠습니다.


장애인, 여성, 고령자, 건설일용근로자 등 취약계층을 위해 특화된 취업지원 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속적인 고용안정을 도모하겠습니다. 

작년에 통과된 비정규직 보호법이 제대로 뿌리내리도록 하여 비정규직의 차별과 남용을 막는 데에도 주력하겠습니다. 특히 공공부문 비정규직대책을 계획대로 추진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비정규직에 대한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대책을 근본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근로자와 자영인의 중간 영역을 새롭게 인정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겠습니다.


정부는 협력적 노사관계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우선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을 높여 노사관계의 경쟁력을 키워 나가겠습니다.  또한 노사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과 상생의 관계를 유지해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특히 공공부문 노사관계와 산별노조의 합리적인 정착을 위해서도 각별한 신경을 쓰겠습니다.


전하고 건강한 일터를 조성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겠습니다.


소규모 사업장 등 산재취약 분야에 대한 중점관리를 통해 재해를 감소시키고, 직업병 예방 및 근로자 건강증진 활동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산재보험과 재활의 합리적 운용을 위해서도 진력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전국의 근로자와 사업주 여러분


노동부는 이제 명칭도 고용노동부로 바꾸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협력적 노사관계의 확립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격려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올해는 대립적·갈등적 노사관계를 극복하고, 협력적·상생적 노사관계를 이루어 함께 활기 있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같이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2007년 1월 1일

노동부장관  이 상 수

벌써 비정규직 ‘해고 사태’…반발 거세질듯
입력: 2007년 01월 03일 07:52:45
 

법원 경비원 ㄱ씨는 지난해 12월27일 갑작스레 해고됐다. 종무식을 이틀 앞두고서다. 비정규직 근로자인 ㄱ씨는 재계약될 것을 믿어왔다. 그는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줄 알았는데 한 마디 예고도 없이 해고됐다”고 말했다.


비정규직보호법의 7월 시행을 앞두고 일선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무더기 해고와 ‘신규 재계약’이 판치고 있다. 기관·기업들이 비정규직으로 2년간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법을 악용, 2년이 되기 전에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있다. 이런 점을 우려해 노동계는 애초 비정규직보호법에 반대해왔다.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은 그 중 한 사례다. 법원행정처는 2일 전국 법원에서 일하는 계약직 민간 경비원 40여명에 대해 지난해 말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올해 7월 시행되는 비정규직보호법에 따라 정규직 전환을 기대했지만 법시행을 앞두고 해고된 것이다. 법원은 또 직접 고용했던 민간 운전사들은 용역직으로 전환키로 했다. 이렇게 되면 고용은 유지돼도 급여 삭감 등 처우는 크게 나빠진다.

법원 직원들은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 양산법임을 법원이 만천하에 알린 것’ ‘(법원은) 인권의 최후 보루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비판의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법원행정처 조직혁신담당관실 김진국 사무관은 “법원조직법에 따라 법원경비대가 새로 창설됨에 따라 부득이하게 재계약이 어렵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법원공무원노조 홍수영 총무국장은 “비정규직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은 이뿐만이 아니다. 광명시청은 최근 상시 일용직 광고물 단속원을 2년 단위 계약직으로 재고용했다. 국립 제주대학병원은 지난해 말 ‘무기계약직’이라는 별도 직급을 만들어 비정규직 73명을 편입시켰다. 무기계약직은 정년은 보장되지만 임금 등에서 정규직에 비해 불리하다. 한국기계연구원은 비정규직의 재계약을 유보해 놓은 상태다. 강원과학고는 상시직으로 채용하던 행정보조 비정규직 노동자를 2년 기한의 기간제로 바꿨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은행이 최근 비정규직 31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592개 기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올해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면 ‘일정한 요건을 갖춘 근로자만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나머지는 계약 해지하겠다’는 응답이 63.6%를 차지했다. ‘비정규직 업무 자체를 아예 아웃소싱하겠다’는 응답도 17.4%로 나타나 비정규직보호법이 되레 비정규직을 양산할 우려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노총 우문숙 대변인은 “공공부문에서조차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않는데 어느 민간기업이 이를 지키겠느냐”고 말했다.

〈황인찬기자 hi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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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슈퍼스타'

추석 연휴에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묘한 울림을 갖는다. 이 영화가 울림을 갖는 것은 하루하루 비틀거리고 패배하면서 울음 한번 삼키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당시, 꼴지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만년 패전처리 투수로 활동했던 실존 인물 ‘감사용’의 이야기를 그린 코믹 스포츠 드라마이다. ‘감사용’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꼴지팀 삼미 슈퍼스타에 입단해 5년 동안 1승 15패 1세이브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겼다. 감사용(현 47세)는 직장야구인 출신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된 전무후무한 사람이다. 그는 창원에 있는 삼미특수강에 입사해 취미삼아 직장야구를 했다. 그러던 중 삼미계열사에서 프로야구팀이 창단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디션을 통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가 된다. 하지만 그가 선발된 이유는 순전히 팀에 좌완투수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인터넷에서 ‘삼미’를 검색어로 치자 ‘슈퍼스타 감사용’ 자료도 많았지만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의 투쟁기록이 오히려 더 많았다. 예상 밖이었다.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은 눈물로 얼룩진 복직투쟁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난 97년 2월 포항제철은 삼미특수강을 인수하면서 587명을 해고했다. 이 때 해고된 노동자 중에서 182명은 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난한 고용승계투쟁을 벌인다. 97년 20일간 44명 집단 단식농성, 98년 5달 동안 서울역광장에서 노숙투쟁, 99년 12월 6일부터 국회 앞 동계 철야농성 투쟁, 2000년 3월 7일 고용승계 투쟁 1178일 맞아 전국대장정 돌입 등.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의 투쟁기록은 외환위기가 노동자에게 안긴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눈물로 얼룩직 복직투쟁 기록 또한 수년동안 노정관계의 핵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삼미특수강 문제해결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대법원은 자본의 논리로 182명의 노동자를 사법살인했다. 대법원은 지난 97년 포항제철이 삼미특수강을 인수하면서 정리해고한 것에 대해 ‘부당해고가 아니며 포철은 고용승계가 없다’고 판결해버렸다.

대법원 판결이 있은지 1년 뒤인 2002년 6월, 그들은 포항제철 유상부 회장 집 앞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노숙농성투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미특수강 해고자들의 복직투쟁기록을 인터넷에서는 2002년 6월까지를 끝으로 더 찾아볼 수 없었다.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의 현재가 궁금했다. 창원에 있는 선배한테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의 근황을 물었다. 그들중 55명이 ‘금속노조 포항제철고용특위지회’로 남아 끝까지 고용승계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본다.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하루 하루 비틀거리고 패배하면서 울음 한번 삼키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의 ‘슈퍼스타’들을 농성장에서, 파업현장에서, 집회장에서, 사무실에서 본다.
(지난 2004년 10월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기관지 진보부산에 실린 글입니다. 때 늦었지만, 옮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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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를 만나다

 

10월 9일 아침, 서울에서 첫 출근을 했습니다.

 

양평역에서 5호선을 탔습니다.  허걱 -- ; 한마디로 만원 전차였습니다.

누나집에서 뚝섬 사무실까지 출근하는데 걸린 시간은 70분.

출근만으로도 진이 빠진 하루였습니다.

 

영등포구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영혼이 없는 사이보그들이 그날의 강제노동을 위해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마치 현실이 아닌 영화 속 장면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서울 첫 인상치곤 좀 충격적이였습니다.   

 

얼마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란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 앞부분, 임수정이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붉은 색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명령에 따라 

똑같이 움직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목소리였습니다.

 

며칠 후에 지하철 역사에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엑스칼레이터를 탈 땐 듣던 그 목소리 "안전을 위하여 손잡이를 꼭 잡아주세요"와 

영화 속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 "드라이버를 들어 나사를 조여주세요"가 매우 흡사했습니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란 영화에서 임수정은 자기를 사이보그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목적도 모르며,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지하철에서 매일 아침마다 수 많은 사이보그를 만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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