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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유연성

<대추리전쟁>을 보고

 

 강 지 혜

 

 

동네의 여자분이 요즘 같은 시대에 (대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폭력진압 그런 거가 있겠느냐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교 앞에서 첨예한 대립이 나오고 뭉개진 농토가 나온다. 점차 거세어 지는 시위와 수로를 시멘트로 매립해 버리는 발상 자체는 정말 이 시대를 의심케 한다.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나왔을까.

 

평택 미군기지, 한반도 평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2006년 1월, 한미 양국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전략적 유연성은 주한미군이 전략상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유연’성을 발휘해서 한반도뿐 아니라 대만이나 이라크도 갈 수 있다는 개념이다.
더 이상 ‘주한’미군은 한반도 안보를 위한 존재가 아니며, 주한미군이 출격하는 분쟁에 한국도 간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정부는 주한미군이 들고나는 것을 제어할 수단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현재로서는 주한미군의 동북아 분쟁 개입을 제어할 장치가 없다.
(녹색연합 홈페이지에서 발췌)

 

 간접적 개입이라는 말이 무섭다. 대추리문제는 접근 지점이 많은 것 같다. 환경적인 면에서 보호될 생물에 대한 접근도 있다.
 우리가 사는 땅,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 그 여파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된다. 다만 그들의 전략적 유연성의 일환으로 우리의 공간을 이렇게 내어준다는 것은 끔직한 일이다. 질나쁜 비유이지만, 누군가를 뒷담화 하는 자리에 동조하진 않아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이 유연한 괴물은 너무나 유연하게 상대를 옭아매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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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대상인 민주 시민 <대추리 전쟁> -김현지-

김현지

 

1. 정일건 감독은 인터뷰에서 “2006년 5월 4일의 강제철거 이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류 언론에서 폭력적인 싸움이란 관점으로만 보도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실제로 한 번만 가서 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며 기획의도를 설명한다.

그의 설명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대추리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투쟁이란 측면에 집중하기 보다는 대추리의 풍광과 그 속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따라가고 있다. 제목이 <대추리 전쟁>인 것은 그런 점에서 다른 의미가 있는데, 감독은 그에 대해 “현재 대추리에서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고 말한다.

 

감독의 의도 처럼 이 다큐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진 것 같습니다. 하물며 일본에까지 가게 되었다니 축하할 일이죠. 이렇게 까지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영화로 인해 지금 대추리의 실제 상황은 어떻게 변화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2. 경찰이 <대추리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들고 나온 논리는 “심의를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 논리는 지난 80년대부터 독립영화를 탄압하기 위해 영화를 통한 사회 변혁 운동을 막기 위해 정부가 동원한 논리였습니다.
1984년 서울영상집단의 영화 <파랑새>를 탄압한 논리도, 1990년대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그리고 영화제작소 청년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 등 독립영화의 상영을 저지하기 위해 동원한 논리도, 90년대 서울인권영화제와 서울퀴어영화제, 인디포럼 등 독립영화제의 영화 상영을 저지하고 탄압한 논리도 바로 ‘심의를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영화법 위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거의 망령이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 정부’가 열렸다는 21세기에도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오랜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영상물)의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억압되고 있으며, 심의 제도는 여전히 표현을 억압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검열을 철폐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성과로 헌법재판소는 1996년 행정기관에 의한 모든 사전 심의제도를 사실상 검열로 간주하고 영화법의 사전심의 규정이 위헌이라고 선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상물의 공개를 강제적으로 차단하는 검열적 요소는 잔존해 있었습니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고 등급분류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향적’으로 정책을 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화 상영은 원칙적으로 심의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예외조항이 존재하긴 하나 그 폭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등급분류 면제에 대한 판단은 문화관광부 장관이나 영화진흥위원회 등 행정권을 가진 주체들만이 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고,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영화의 공개는 엄격하게 금지하도록 강제하고 있어 여전히 심의제도의 검열적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2007년 가을, 경찰은 이 조항을 악용하여 특정 영화의 상영 여부를 검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006년 10월 27일 (금) 19:51:13 원승환/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redian@redian.org

위의 글은 대추리 전쟁에 대해 조사하다가 발췌한 글입니다. 심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데, 위의 글을 읽고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의에 대한 모호한 기준이 실제 어떻게 적용 되고 있는지 좀 더 다른 예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심의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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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전쟁>을 보고 - 김현선

<대추리 전쟁>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ㅡㅡ;;(간절하게 요구되는 이모티콘)'였다.

다시 말해,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자본주의'에 맹렬하게 봉사하던 우리의 '국가'는.

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대추리 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사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건 그냥 '코메디'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그리고 그렇게 그냥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라는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의 근거는 바로 그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법치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국민의 사유지를 강제로 매입할 수 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법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 그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 답을 구하는 일이 거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대추리 전쟁의 원인인 미군기지 이전이 이 나라의 무엇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하지 않고 버려둔 것은 무엇인지,

그 답을 구하는 일이 되겠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답은 너무 자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선 탄식에 이어 다시 한 번

''법'이라고 하는 것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ㅡㅡ;;'라고 생각하며,

 

사람이 국가 안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 길은

그저  '안개 속의 풍경'에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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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 전쟁> - 박선영 리뷰

 
약육강식

- <대추리 전쟁>/ 정일건 감독/ 2006

 


박선영

 

 약육강식 법칙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약자는 언제쯤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대추리 전쟁>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2003년부터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대추리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논밭 옆에 미군 기지가 세워졌을 때 국가가 하는 일이니까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살아갈 땅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논밭을 빼앗지 않는 이상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국가는 그들에게 미군기지 확장을 주장하며 대추리를 떠나 땅을 비워 줄 것을 요구했다. 갈 곳도 갈 돈도 없었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가를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한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그들은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들의 투쟁은 4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배고팠을 시절, 그들이 도와줬으니까 땅도 내주고 했지만 이제는 빚 다 갚았어. 그러니까 나가라고 해. 죽든 말든 이제는 우리끼리 알아서 해.

국가에서 다른 좋은 일 하는 것이면 기꺼이 돕겠지만 미국 놈들 돕는 거면 절대 안 돼.

 


세월의 흔적을 얼굴 위 깊은 주름으로 고스란히 간직한 할아버지들은 말한다. 그들은 요즘 세대와는 다르게 전체주의, 애국주의를 운운하며 평생을 국가를 위해 살아왔다. 그들은 국가가 지은 빚을 자신의 빚처럼 생각하며 언제나 빚쟁이 같은 심정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야 그들은 허리 좀 피고 살아 보려고 하지만 나라는 그들을 도와주지도 보호해주지도 않는다. 늙고 힘 없는 그들에게 국가가 보여주는 태도는 고마움은 커녕 배은망덕함이었다. 누가 지켜 온 국가이며, 누구를 위한 국가인데 국가는 그 누구를 간과하고, 돈 있고 힘있는 자에 의해, 강한 자를 향해 굽실거리며 휘둘리고 있으니 여기서 비롯되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내 땅 내가 지킨다는데 왜 지랄들이여.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곡식 밟지마. 곡식 밟으면 너희들 가만 안 둘꺼야. 밟기만 해.

 


그들이 애써 가꿔 온 생명이, 삶의 터전이 전경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전경들은 풀조각을 밟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대추리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모든 삶이 짓밟히는 것과 같다. 그들의 투쟁은 살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늘 그렇듯이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잡아 먹히더라도 당당히 싸우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강자와 타협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추리의 160가구 가운데 16가구가 그러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대통령 빽이라도 안 돼.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고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거야.

국가가 있은 다음에 내가 있지. 국가가 없어봐. 내가 존재할 수 있나.

 


하지만 한 입 가지고 두 말하는 정부는 그들 마저 잡아 먹고 만다. 타협하면 잡아먹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은 국가의 뒤통수 때리기 작전에 휘말리고 말았고, 그들은 정말로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국가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땅을 빼앗겨야 하는 현실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할머니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단 농성에 들어간다. 할머니들은 6살짜리 꼬마 아이가 부르는 투쟁 노래 앞에서 마냥 즐겁다. 그들은 힘든 삶을 웃음으로 견뎌온 것처럼 힘든 투쟁 또한 웃음으로 견딘다. 하지만 웃음은 이내 억장이 무너지는 눈물로 변하고 만다.

 


다리가 떨려서 못 서있겠어(I can't stay here).

 


서울까지 먼 걸음을 한 대추리 마을의 한 할머니는 촛불시위 현장에서 꺼질 듯 흔들리는 촛불처럼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린다.

자본주의의, 산업사회의 무시무시하고도 잔인한 손, 포크레인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는 나무 앞에서, 폐교 앞에서 대추리 사람들 역시 처참히 무너진다. 포크레인이 끊어버린 것은 나무가 아닌 대추리 사람들의 생명이었다.


더 이상 살 수 없는,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한 땅, 대추리를 떠나는 사람들. 이제 대추리에는 60여개 가구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들 역시 언제 떠날지는 모를 일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평화 운동가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빈자리를 메꾸고 있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타협할 수 없어 보이는 대추리는 버려져 가고 있었다.

2007년 3월, 대추리는 미군기지 확장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합의하에 공동 이주를 했다. 이렇게 강자는 손쉽게 약자들을 물리치고 땅따먹기에서 승리했다.

강자들의 땅따먹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 약자가 사라져 버린 곳에서 강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봄,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다.

여름,

새싹이 자라다. 그러나 힘들게 자란 그것들은 이내 짓밟히고 만다.

그러나 가을,

살아남은 벼들은 잘도 자라 수확된다.

겨울,

언제 또다시 짓밟힐지 모르는 그 땅에 또다시 씨를 뿌려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들은,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대추리 영농학교를 개설하여 다음 해를 준비한다.

또다시 봄,

삭막한 땅에 씨를 뿌린다.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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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의파다> 박선영 리뷰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처럼

- <우리는 정의파다>/ 이혜란 감독

 

박선영


 

 1970년대, 수많은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갔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들은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한 가족들을 위하여 그들은 그나마 다니고 있던 학교도 그만둬야 했고,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순이’ 정도밖에는 없었다.

 영화 <우리는 정의파다>는 이러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똥투척 사건’으로만 알려져 있는 동일방직 여공들의 복직 투쟁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동일방직이 당시 어떤 회사였는지, 그 회사에서 여공들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차별을 없애기 위해 그들은 어떻게 싸웠는지, 그 싸움에서 어떻게 해고되었고 복직을 위해 지금도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보여준다.

 1978년 4월 1일, 동일방직 사장 서민석은 124명의 여성 노동자를 강제 해고 시킨다. 그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였다. 사장 서민석을 비롯한 동일방직의 남성들은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권력에 감히 여자가 도전장을 내밀고, 평등을 주장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성들이 노동조합을 구성하고 그들의 여성 대표를 뽑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며 온갖 수단을 사용해서 그들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 시절 수많은 여성들은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식사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며 엄청난 일들을 소화해내야 했다. 그들은 “16살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키가 자랐고”, 한 달에 7Kg씩 빠져가며 일했다. 그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하며 일해 왔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대우 받아야 할 권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힘들게 획득한 것은 30분 정도의 식사 시간뿐이었다. 그들은 힘들게 획득한 권리를 조금 더 보장받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똥물’ 뿐이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남성이란 동물들은 여성의 입과 귀에 똥물을 쑤셔 넣었고, 그들의 일터를 똥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식해서 잔인한, 치사함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남성들의 이러한 만행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 일을 겪지 않은 나조차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다. 자신들의 아내요, 어머니이자 딸인 여성들을 같은 인간으로서 그렇게 대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권위를 일정 부분 공유하자는 것뿐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사나운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내야만 했을까.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아야만 했을까.

 “모르고 바보처럼 사느니 알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어느 여성 노동자의 말처럼 이대로 물러설 여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신력은 남성들의 그것보다 강했다.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녀들은 투쟁하고 있다.

 무식했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무지했던 그녀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당당히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외치고 있었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강철처럼 그녀들 역시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수많은 세월을 수많은 눈물로 지새웠지만 그만큼 성숙해진 그녀들이다.

 그녀들의 고통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왔다. 그러자 내 마음도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들만큼은 아니겠지.

 그녀들이 아파했기에, 힘들게 투쟁했기에 얻어진 지금의 자유와 권리, 행복이 새삼 고맙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많은 것들을 누리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와 닿는 다큐멘터리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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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에 대한 리뷰 - 김현선

'패밀리쇼킹함’, 그래서 ?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2006), 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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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는 수다스럽다. 수다(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는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고 가볍다. 또한 수다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만나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쇼킹 패밀리>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쓸 데 있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쓸데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첨언하자면 <쇼킹 패밀리>는 ‘가족’이라는 사회의 문제를 ‘재미있고, 유쾌하고, 발랄하게’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가벼움은 ‘무거운 주제는 무겁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에 무게(‘가족’의 문제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쇼킹 패밀리>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건드리기는 하였으나 고민하지 않으며 ‘그래서?’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소리는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즉,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는 ‘입’들은 너무 많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쇼킹 패밀리>를 보는 일은 2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수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외부와 내부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사운드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수다스러움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아줌마들의 노래방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혹은 감독 경순)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며, 이렇게 시작된 감독의 말소리는 영화의 내부에서 외부(내레이션)로 이어진다. 처음 장면에 등장하는 아줌마들은 가족 안에서 ‘패밀리’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금의 사회 현실을 보여주며, 이를 시작으로 영화는 다양한 방식(문자와 소리의 몽타주, 가훈의 의의, ‘패밀리’의 ‘쇼킹’함을 더하는 경순의 친구-엄마 때문에 버린 인간이며, 자기가 잘못하고도 여자가 모든 것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동시에 싫은 소리하는 것은 싫어하는, 공공캠페인 패러디)으로 사회의 현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이 그녀는 이러한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에 있어도 여전히 혹은 여지없이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드리워진다. 즉, 친구처럼 길러온 그녀의 딸 수림이 가족이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려 하고 그녀 자신이 ‘쇼킹 패밀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음에도 그녀의 前史에 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2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이혼하여 싱글맘이 된 그녀는 영화 안에서 솔직한 그녀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그녀가 만들어내고 그 속에 들어갔던 ‘패밀리’의 ‘쇼킹함’에 대해서만은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은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만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쇼킹 패밀리>는 여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현재에 다시금 출몰하며 놀라운 자생력을 보이는 ‘가족’과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는 현재에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녀의 과거들을 불러낸다. 즉 싱글맘이 되기 전에 바로 거쳤을 30대의 경은과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인 20대의 세영을 불러낸다. 물론 그녀들(경은과 세영)의 이야기는 그녀들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즉 경순의 과거라고도 볼 수 있는 경은과 세영의 삶은 각자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패밀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세영의 이야기를 통해 <쇼킹 패밀리>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시작한다.


<쇼킹 패밀리>는 이미지 또한 수다스럽다. 영화는 그 자신의 안과 밖(밖: 영화에 참여하는 스텝들의 회의, 안: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스텝들의 대화 혹은 인터뷰)을 오가며 ‘패밀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이와 동시에 그래픽 몽타주, 외부(그녀들이 아닌-가훈, 입양, 대학입시, 호주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에서의 장면들, 그녀가 찍은 사진 혹은 그녀들을 찍은 사진, 그녀와 그녀들의 춤, 세영의 집을 담는 왜곡된 화면 등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의 편집과 조합 또한 가벼움이라는 무게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쇼킹 패밀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하고, 이로 인해 영화는 경제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도 쉽게 만들어지고 한편에서는 고민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과잉을 만들어냈다. 즉, 디지털 영화들은 보다 더 일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상의 인상(印象) 혹은 단편적인 시간의 조각들을 펼쳐놓거나 모아놓는 데 그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쇼킹 패밀리>는 디지털 영화가 지니고 있는 한계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쇼킹 패밀리>를 통해 ‘패밀리’의 ‘쇼킹함’을 이야기하는 수다에 참여했던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웃는 사이 ‘패밀리’의 심각함과 시사성을 망각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 대면하게 되는 것은 ‘패밀리’의 ‘쇼킹함’, 그래서?라는 질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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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쑈킹 패밀리>

가족은 가정이어야 한다.

김현지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공감할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경순 감독. 감독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을 따라가는 이 다큐 형식의 영화에는, 돈 잘 버는 아버지도 헌신적인 어머니도 없다. 말 잘 듣는 똑똑한 아이도 없는 것도 물론이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가족의 이미지를 조롱하면서, 우리가 어떤 환상에 젖어있는지 한번쯤 되돌아보게 한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으로 풀어내는 감독의 위트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그래서 너무나 흥미롭다.

 

쇼킹패밀리라는 제목 속에 탄생하게 될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구성원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가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가족이라는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가장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문화의 총화이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국가의 가장 튼튼한 하부조직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해 볼까 한다. 따라서 그 기록은 대한민국의 가족이 좀 더 붕괴되고 해체되고 망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밑바탕에 깐 새로운 기록이 될 것이다.

 

1. “가화만사성”,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뜻이다. 영화초반 조롱하듯 “뭐 어때 가족인데”, “아들 핵심”, “가부장”, “파더리스”, “인간도 아니다” 등등의 문구와 함께 이 단어가 반복 된다. 감독은 이런 형식으로 지금 시대에 만연한 한국 안에서 가족이란 단어의 오용, 남용 사태를 풍자한다. 영화 초반에 이렇게 단어를 무식할 정도로 크게 강조하며 편집한 것을 보고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짐작했다. 일종의 코미디 같은 현실. 웃기지도 않은 사실 등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당연하게 정신적 학대를 강요받는 사람들의 고충을 유쾌한 풍자로 풀어낸 것이다.

 

2. 가족이란 이름으로 정신적 학대를 강요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이 영화 내용 중 가장 좋은 예는 결혼한 사진 감독인 정은의 고충을 통해 볼 수 있다. 정은은 시 엄마의 구박과 마마보이 같은 남편과 7년을 살며 자신이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이혼한 정은의 집안 얘기를 집에 늦게 들어온 정은을 꾸중하며 아무렇지 않게 “ 네 집에서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런다”라며 인격 모독적인 말을 하는 시어머니, 이 사이에서 정은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고 자신의 엄마편인 마마보이 남편. 이 사이에서 정은은 이 가족 구성원 중 자신이 열외 대상인 것을 알고 손을 긋고 약을 먹으며 자신의 고충을 표현하지만 모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3. “ 넌 옷이 그게 뭐냐?” - “ 네가 내 딸이면 내 체면을 살려줘야지 네 존재가 창피하다”

   “ 넌 언제 돈 벌래?” - “ 네가 내 딸이면 언젠가 부모 호강 시켜줘야 하지 않냐?”

 

영화에 나오는 이 말들은 가족이니까 자신의 욕심에 맞춰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고 존중해주지 못할까? 단순히 가족이여서 일까? 가족은 단순한 구성원이 아니라 서로의 안식처가 되 주며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 되는 가정이어야 한다. 감독은 “ 대한민국의 가족이 좀 더 붕괴되고 해체되고 망가져야한다”고 했는데, 이는 왜곡된 한국 가정을 뜻하는 것이다. 그녀도 영화 속에서 “ 사실 외롭다”고 말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행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악한 것이다. “혁명은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이 변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란 감독의 말처럼 이를 사회적인 문제로 돌리기보다는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다.

 

<등장인물 소개>

 

바보조세 나이 25세 (세은)

맞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식구끼리 주먹질은 당연하다는 정의 속에 살아왔지만 영화를 시작하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아직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증후군이 있긴 하지만 영화를 통해 진정한 타락천사를 꿈꾸는 그녀는 이 영화의 촬영감독.

특기 : 좋으면 약간 갸우뚱 싫으면 어! 갸우뚱 의심나면 으..갸우뚱

 

나쁜 들개 나이 25세 (정은)

군대 간 애인을 차버리고 남들 다 뜯어말리는 결혼을 했으나 결국 시 엄마의 구박과 마마 보이 같은 남편과 7년을 살며 자신이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을 뛰쳐나온 이 시대의 진정한 나쁜 여자. 더욱더 나쁜 쇼킹패밀리를 위해 영화에 몰입하는 그녀는 이 영화의 사진감독

특기 : 한번 물리면 치명적이다. 한번 더 물어 줘

 

미친 자경 나이 25세

한때 춤바람이 격렬하게 일어 온몸에 근육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녀는 진정한 이 시대의 바람꾼. 바람난 여자들의 심금을 울릴 영화 쇼킹패밀리를 간절히 원하며 불철주야 몸을 흔들어대는 그녀는 이 영화의 조감독

특기 : 그녀의 변신은 무죄....무한변신, 무한 칼라

 

멋쟁이지은 나이 25세

섹쉬한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한동안 병마와 싸우다 새까맣고 시꺼먼 인간들이 득실대는 독립영화계에서 동색이 되어 빛을 엄청 발하고 있는 이 시대의 화끈한 음악가.

이 영화의 음악 감독

특기 : 뒤끝이 없는 깨끗한 일갈. 이게 뭐야!

 

이쁜이은희 나이 25세

날 때부터 트로트 가락으로 울어댔다는 그녀는 성악가의 꿈을 꿈으로만 간직하다 쉬지 않고 읊어대는 수다가 노래로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진정한 O.S.T를 꿈꾸는 그녀는 이 영화의노래 감독

특기 : 먹는 건 다 쏜다. 그러나 몸은 절대 안돼!

 

빨간경순 나이 25세

12살 먹은 딸을 18세에 내쫓을 궁리를 하고 있으나 더 버텨 보려는 음모를 꾸미는 딸과 어쩔 수 없는 동거를 하고 있지만 절대 동침만은 봐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아동학대라는 말을 젤로 무서워한다. '건강가정기본법'에 수없이 저촉되는 그녀는 이 영화의 감독

특기 : 아! 나도 특기가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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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 패밀리> 발제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2006)

 

 20041181 연극학과 박선영

 

 

쇼킹 패밀리 (Shocking Family, 2006)
감독 이경순/ 다큐멘터리/ 111분

- 인디다큐페스티발 2006 국내신작전 상영
-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
-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관객비평가상’
- 제1회 서울여성인권영화제 상영
- 제8회 정동진독립영화제 상영

 

1. 줄거리
 가족은 늘 개인의 존재를 망각한다. 국가는 자주 그 ‘가족’을 이용한다. 그리고 개인은 종종 국가와 가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다. 이런 가족 안에서 오늘도 힘겨루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20대 세영, 30대 경은, 40대 경순과 혈연 중심의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미국입양아 빈센트의 성장 이야기.
 “20대, 가족이 대체 뭐길래....”, “30대, 나, 자유를 찾다”, “40대, 관습에 찌든 세상을 거부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쇼킹패밀리>는 가족 안에서 훼손되어가는 나를 고민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세 여성의 시선을 기록한 성장영화다.
 <민들레>(1999), <애국자게임>(2001) 등 신랄하고 통찰력 깊은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들며 화제를 모았던 이경순 감독의 2006년 신작. 싱글맘(Single Mom)으로 살아가고 있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그녀의 지인들, 그리고 해외입양아 빈센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허울 좋은 가족과 가족주의의 속내를 다양한 층위에서 파헤치고 있다. 감독의 말을 빌자면 이 영화는 “가족 안에서 훼손되어가는 나를 고민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20대, 30대, 40대 세 여성의 시선을 기록한 성장영화”이다.

 

2. 영화 이야기

① 쇼킹 패밀리에 대하여
쇼킹 패밀리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존재를 망각하고 침해하며 전통과 역사를 운운하며 국가와 사회가 해야할 일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떠맡게 한다는 걸 모르고 멍청하게 자본주의의 착한 포로가 되어 결혼과 교육 등의 이유를 붙어 무자기 소비에 열을 올려주는 소위 ‘정상가족’의 동의하며 살아가는 모든 가족과 그 무리들을 일컬어 하는 말‘ 이라고 한다.
 처음 영화 제목을 접하고 쇼킹한 가족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며 매우 흥미진진해했다. 그러나 절대 쇼킹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보면서 실망했다. 물론 엉뚱하면서도 재기발랄한 내용과 형식들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제목이 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실망을 한 것이다, 영화 자체에는 전혀 실망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위에서 말한 ‘쇼킹 패밀리’의 정의를 찾아보고 난 뒤에야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의 정의대로라면 이 영화는 제목과 잘 맞아 떨어지는 영화였다.
 그렇다. ‘가족’은 그 이름만으로 희생을 요구한다. ‘가족이니까’, ‘가족이잖아’ 라 말하며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로써 요구된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 대한민국의 현실을 쇼킹하다 말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엔 오히려 그 모습이 쇼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대한민국 가족의 정상적인 모습을 ‘쇼킹 패밀리’라 명명하며 새로운 ‘가족상’을 제시한다.

 

②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에서 객관적인 이야기 이끌어 내기
 <쇼킹 패밀리>는 감독과 스텝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개인사와 가족사는 영화를 통해 온 천하에 알려지고 그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물론 제작 과정에서 많이 망설이고 많은 고민을 통해 걸러진 이야기만을 모은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솔직했다.
 특히 경순 감독은 자신의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집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모습, 자신의 가정을 보여준다. 그는 딸과 사이가 좋은 모습도, 나쁜 모습도 모두 드러내고, 숨겨도 되는 자신의 가족사를 당당히 보여준다. 그 모습에서 대한민국 가족의 현실을 보여준다. 세영의 개인사를 통해서도 우리나라의 현실, 직업을 잃어도 가장은 여저히 큰 소리치는 가장이고, 어머니는 밖에서 돈을 벌어도 집안일을 해야만 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주로 떠받들어지면서 집안일은 일체 하지 않는 그녀의 언니이자 한 가정의 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비단 세영의 가족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일찌감치 별거에 들어가 결국은 이혼을 한 경은의 모습은 수많은 대한민국의 이혼녀를 떠오르게 한다. 이렇게 <쇼킹 패밀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주관적인 이야기에서 공공의 이야기, 객관적인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③ 여성의 눈으로 본 가족 이야기
 <쇼킹 패밀리>의 스텝들은 모두 여성이다. 그래서 이들이 주인공인 이 영화는 자연스레 여성의 시점으로 만들어졌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 딸로서 바라보는 가족은 잘 보여지고, 아버지의 모습, 아들의 모습, 이혼남의 모습은 보여지지 않는다. 간간히 그들의 친구인 남자가 한 명 등장하거나, 그들의 아버지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여성으로서 홀로 가족 만들어 살아가기’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은 듯 싶다. 하지만 이 점이 감독이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남성 우월주의가 대표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가족’ 이라는 구조 안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그러하기에 ‘가족’이라는 족쇄와도 같은 제도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감독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사회라 불리우는, 유일하게 선택이 아닌 숙명에 의해 속해질 수밖에 없는 집단인 ‘가족’. 이 제도를 해체하지 못한다면 구조를 새롭게 재정비하고, 재정의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감독은 이 제도 안에서 절대적으로 약자 취급을 받아 온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④ 20대/ 30대/ 40대의 시선
 이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감독 경순, 촬영 세영, 사진 경은이다. 이들은 40대, 20대, 30대로 고른 나이 분포를 띠고 있다. 감독은 이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각기 다른 세대가 겪는 고민들, ‘가족’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20대, 결혼을 하지 않은, 한 가정의 딸로서 독립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안정적인 수입과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사회의 압박을 받아야만 하는 그녀, 세영.
 30대, 일찍 결혼을 했지만 일찍 이혼을 한, 자신이 낳은 자녀를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을 나눌 수 없었던 가족에 대한 아픔을 지닌,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그녀, 경은.
 40대, 싱글맘으로서 딸과 친구처럼 살아가고 있는,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엄마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 당당하게 ‘가족’의 해체를 외치는 그녀, 경순.
 이들은 각 세대를 대표함과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공감을 이끌어 낸다.

 

⑤ 딸과 엄마
 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감독 경순과 그녀의 딸, 수림의 이야기다. 수림이 두 살때부터 싱글맘으로 살아 온 경순은 가부장이 사라진 ‘가족’에서 자신이 가부장이 되는 삶 대신 딸과 대등한 관계가 되고자 한다. 경순은 수림을 친구로 생각하고 친구로 대하며 친구로 부른다. 그런 수림은 자유분방하게 자란다. 그러나 수림은 어렸을 적부터 큰 자유를 획득했기에 그 자유를 남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모습은 좋은 모습이었지만, 건방져 보이는 태도와, 어른을 무시하기도 하는 태도 그리고 도벽은 결코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경순이 수림에게 아무리 많은 사랑을 준다 해도 한 사람의 사랑은 두 사람의 사랑 보다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주변을 보아도 도벽을 가진 친구들은 애정결핍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밝게 자란 수림의 모습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이렇게 영화는 이들 모녀의 모습에서 ‘가족’을 이야기 한다. 또한 세영도 아버지와의 관계보다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다투기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정을 쌓아간다.
 나 또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더 친하다. 나도 엄마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한다. 매일 그녀와 통화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와 데이트를 한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그렇지만 부딪치는 부분들도 많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어쩔 수 없는 관계 때문에 수직 관계가 형성되고, 충고하고 반항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끈끈할 수밖에 없다.
 물의 흐름도 평평한 땅에서 흐르는 것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더 빠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어머니의 사랑은 친구들의 사랑보다, 내가 엄마에게 주는 사랑보다 클 수밖에 없다.

 

⑥ 부부의 관계보다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드러나는 ‘가족’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가족이 탄생한다. 남남이 만난 그들이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 아이를 낳는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들은 헤어지면 또 다시 남이 되고 만다. 하지만 자식은 남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아이는 그들의 피가 섞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식어도, 자식 보고 정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것처럼 가족은 부부의 관계보다는 부모의 관계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그래서 <쇼킹 패밀리> 또한 부부 관계의 이야기보다는 부모 관계의 이야기에 더 중점을 둔다. 경숙과 경은 모두 남편과 헤어졌지만 자식과의 끈은 놓지 않았다. 또한 경숙은 아버지와는 헤어졌지만 자신의 어머니기에 친어머니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간에는 헤어져도 남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가족이다. 하지만 여기서 발견되는 모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입양이다. 입양이란 혈연 관계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이라 부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찾는다. 그들을 버린 부모. 혈연으로 형성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어쩌다가 자식을 버린 부모와 그 자식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감독은 이 모습 또한 미약하지만 놓치지 않고 보여주었다. 해외입양된 사람들. 이 나라 사람도, 저 나라 사람도 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원망하고, 대한민국의 이러한 모순덩어리인 가족 제도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을 원망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⑦ 마치며

세상에서가장독한혀를가지고
마구마구마구말을내뿜어버리는
나오는대로거침없이토해내버리는
듣는사람의감정따윈아무래도상관없다는
듣는사람의이야기따윈들을생각조차기회조차주지않는
상처받기싫어하면서다른사람에게는아무렇지않게상처를입히는
그럼에도불구하고미안한마음따윈절대갖지않는사과의말따윈건네지않는
나의어머니써니의어머니우리의어머니너의아주머니는세계제일의독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엄마를 용서할 수밖에 없고, 사랑한다.
엄마의 잔소리가 좋은 약이 될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엄연히 어른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외박을 할 수도, 술 먹고 늦은 밤 귀가할 수도 있다. 겨우 나의 방이 생겼지만, 아무 구속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요구당하지 않으며 살고 싶어 나 또한 독립을 꿈꾸기도 한다. 동생과 사소한 것으로 싸우고, 부딪히는 것이 싫어 꼴도 보기 싫을 때가 많다. 그러나 다음 날은 아무렇지 않게 같이 밥을 먹고, 서로의 옷을 공유한다. 아빠의,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 아침에 큰 소리를 내고 집을 나서지만 저녁이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것은,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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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킹패밀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쇼킹 패밀리> (2006, 이경순)에 대한 질문들~~~

- ‘가족’에 대한 솔직 당당함

<쇼킹 패밀리>는 여느 독립영화들과는 달리 산뜻한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그저 유쾌하고 재밌는 내용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 감독과 여성 스텝들의 솔직한 가족이야기와 그들의 인생이야기에서 나의 경험과 고민들이 겹쳐지면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의 나의 삶과 인생 그리고 미래의 나의 가족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려 보았다. 아니 내가 진정 원하는 가족은 어떤 것일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가족’에 대해 올바른 정의나 ‘가족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가족’에 대한 가능성과 사회 인식의 변화와 그 필요성에 대해 전달하고 있다. 제도화된 가족, 특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한 한국의 가족에 대한 모순들 -입양이나 이혼, 편모(부)가족, 호주제에 대한 문제들- 을 나름의 유쾌한 화법으로 과장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일상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곧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문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영화를 보고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방식이든지 가족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더욱이 ‘감독이 말하고 있는 쇼킹 패밀리란 과연 무엇인가?’  결국 ‘가족’의 진정성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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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의 기술>에대한 질문

 

영상이론과 3학년 박소영


 <파산의 기술>은 과연 ‘파산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의아스럽고 흥미로웠던 지점은 파산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파산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상황을 직접 시각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인터뷰와 마치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경제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일상의 소음들만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면은 감상하는 입장에서 심히 너무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라디오와 같은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들과 중첩시켜서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들, 특히 노동자들, 민중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영화 중간 중간에 인용하고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파산의 기술’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이미지와 사운드의 무분별한 충돌을 사용함으로써 과연 얼마나 ‘파산의 기술’에 대한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파산하고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과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도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는 이들의 인터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현실에 대한 희망인가 좌절인가, 신자본주의에 대한 비아냥인가 아니면 절규인가.

<파산의 기술>은 ‘파산’에 대해서 라기 보다는, 이를 묵과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아이러니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다지 별로 매끄럽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는 지점 또한 간과할 수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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