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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예술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20041181 연극학과 박선영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말.

세월이 흐를수록 시대는 변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카세트가 사라지고, 초소형 MP3가 등장했다. 롤러 스케이트는 인라인 스케이트가 되고, BOOK이 E-BOOK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게 예술도 당연히 진보하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예술은 진보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기술적인 측면은 발전했을지 모르나,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사상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 옛 것이니까 촌스러울 거라는, 후질 거라는, 유치할 거라는 식상한 편견을 가지고 우리나라 70-80년대, 90년대 단편 영화들을 감상했다. 하지만 영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아니 저 시절에도 저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저러한 실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저러한 은 말 그대로 저러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고, 그들의 친구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틀에 박히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일거라 생각되는 내 주변의 어른들이라는 말인데, 그들에게도 자유로운 영혼이 존재한, 자유롭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오늘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실험적이면서 자유롭고 독특한 표현과 이야기에 감탄의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영화들이 재밌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옛 영화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나에게 영화들은 신선함과 기발함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색동>(이 영화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의 스토리 구성이 매우 흥미로웠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진행되는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컷들의 빠른 변화와 오버랩되어 진행되는 장면들이 사이드 조명처럼 흥미롭고 재밌어 눈을 떼지 못했다. 또한 어색하지만 과감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시절을 방문하고 싶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개인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측면이 많았다는 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고발하고 있었다는 점이 나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들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리고 내가 감상하게 된 90년대 영화들이 특히나 그 시대의 암울하고 우울한 측면을 부각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내 마음 또한 우울해졌다. 그 시절은 꼭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 같았고, 모두가 힘들고 우울했을 것 같았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일말의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나에게 주는 느낌은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힘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그러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무거운 돌들을 집어 든 느낌이다. 너무 가벼워서도 안 되겠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돌들을 드는 것은 힘에 벅찬 법이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해 무겁고 튼튼한 벽돌이 필요하지만 그들 사이에 가벼운 벽돌들도 가끔씩은 들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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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변방에서 중심으로’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우선 이번 영화의 리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던 것인지 말씀드립니다. 독립영화의 정체성, 그들이 그토록 토론하고 쌍욕을 해가며 쟁취하고자하는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단순하게 영상의 동기부여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자기검열에 입각한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상원의 중견 교수님들과 유명 감독, 평론가들의 출연으로 독립영화에 대한 그들의 언급과 정의에 동조하면서도, 정작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저는, 앞선 세대의 진보적 행동에 대한 억압과 구속을 일종의 '문화적 저항'의 원천으로 규정하며, 그것이 문화적 순수성을 추구한다는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의 정의 앞에 ‘반드시 현실과 투쟁할 것’이라는 전제를 달아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독립(단편)영화는 분명, 현실과의 투쟁에서 오는 정신-물리적 고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고, 그러한 영화의 제작과 상영과정을 지켜보며,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파고들어 그 평범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변모시키고, 그것을 영상으로 옮겨 담는 사람조차 영웅화가 된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마저도 영웅이 될 거라는 착각은,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를 ‘참여’의 의미로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중심이 된다면 저는 그들의 투쟁을 축하하며 샴페인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기대를 해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이 차가운 사무실바닥에서 새우잠을 잘 때, 주점에서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며 ‘저항이나 자유’따위를 외칠 뿐이며, 같이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꾸미지도, 어디엔가 제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들이 현실과 계속해서 투쟁해주기를 바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 영화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변방으로 내모는 행위는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어제의 저는 지친 그들에게 ‘변절’이나 ‘배신’ 혹은 ‘타락’등의 단어를 너무나 쉽게 붙였던 것 같습니다.

 변영주 감독의 말처럼 독립영화가 변방에서 변방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아무도 그들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내몰리고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당하게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물론 독립영화가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질러 고행의 길로 인도하더라도 그는 또 다른 누군가의 나르시즘을 위해 희생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도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영웅화되었던 출연자와 제작자와 감독과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관객들입니다. 세상이 독립영화를 쫓는 것처럼 보이지만 독립영화는 변방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변방으로 돌진합니다. 그들이 중심이 되는 순간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독립영화의 혁명이 성공한 날이며, 모든 나르시즘이 허물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한발 앞서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방을 만들어 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이유는 그곳에 결승선이 있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뒤쫓아 오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달리는 도중 결승선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을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들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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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20011165 연극학과

                                                                                                           김봉재


 ‘단편영화’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어렵다’ 일수도 있고 ‘지루하다’일수도 있고, ‘강렬하다’ 일수도 있지만 단편영화는 분명 지루할 때가 많습니다. 단편영화가 만들어지는 환경(거의 대부분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만들지만)상 많은 돈을 들여 훌륭한 비쥬얼을 만들기 힘듭니다. 그리고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지는 강박관념들, 무엇인가를 성찰해야 하고 관조해야 하며 새로운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인해 영화는 매우 관념적으로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들이 조합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다’ 나 ‘어렵다’라는 반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단편영화에서 만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그 어떤 것이든 영화화 시킬 수 있으며, 그것이 꼭 일반적인 드라마형식의 내러티브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창조된 인물이 겪는 그 순간의 심리상태나 그 밖의 것들을 형상하는데 단편이 가지는 장점이 장편보다는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편으로 끌고 가기 부담스러운 것들, 혹은 그 상황을 다룰 때 단편은 ‘완결성’이라는 무기를 지닙니다. ‘영화화 하고자 하는 것’을 ‘열고’, ‘닫으면’서 그 순간 가장 잘 짜여진 ‘영화’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단편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단편은 장편의 반대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편과 장편은 반대가 아닌 별개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단편이 할 수 있는 것을 장편은 할 수 없고 장편이 할 수 있는 것을 단편은 하지 못합니다. 즉 ‘형태’의 차이이지 ‘영화’라는 점에선 동일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편영화는 ‘마이너’하고 장편영화는 ‘메이저’하다는 인식은 그동안 우리의 영화산업이 기형적인 방법으로 감독을 생산해 내었기 때문 일수도 있습니다. 즉 단편작품을 포트폴리오로 입봉한 감독들은 장편에 뛰어든 후, 단편에 손을 대는 경우도 드물고, 손을 대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서 마치 과거의 순수성을 추억하기 위한 소품정도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창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위해 선택하는 ‘선택지’가 되어야 하지 ‘영화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나 ‘메이저에 올라가기 전 마이너리그’라고 인식되어선 안 됩니다. 짧은 시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우리의 영화산업은 이것을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산업을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단편을 찍는다는 것은 ‘고급예술’을 하는 것도, ‘저항운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순수하게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낼 그릇으로 ‘단편영화’를 골랐을 뿐입니다. 따라서 단편영화가 ‘영화의 정수’이고 영화의 순수성을 지향한다는 주장에 쉽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단편영화를 하는 그 자체가 인디정신을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장편영화를 하는 감독들이 무조건적으로 상업성에 기댄 상품만 찍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장편과 단편은 그저 ‘영화’라는 자장 안에서 논의 되어야 합니다.

 단편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가질 기회가 우리에겐 너무나도 적습니다. 영화가 상영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단편영화들은 (우리의 현실에서)그 영화가 만들어진 학교 안에서, 혹은 단편영화를 (어떠한 이유에서건) 향유하고 공유하는 일부 그룹 안에서만 선을 보이고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수한 영화들이 소비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단편영화는 영화가 아닌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영화는 보아줄 사람들 앞에서 손을 들고 서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것들을 꺼내어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단편영화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적 방법의 접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알아주길 바라는 그 수많은 단편영화들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단편영화에 대하여 취해야할 첫 번째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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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맛보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20041181 연극원 연극학과 박선영

 

 독립영화란, 미국 영화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인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단편영화, 대기업의 자본과 유명 영화사에서 만들지 않은 영화 정도를 일컫는다고 네이버 지식인은 말하고 있다. 즉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같은 부류로 묶어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가끔씩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혼돈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독립영화는 무엇일까?

말 그대로 모든 것에서 독립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독립하여 자유롭게 만든 영화,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관객, 대중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을 너무 의식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떳떳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본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은 만든 이의 뚜렷한 생각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때론 과격하게, 그리고 분명한 색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의 잘못된 점, 어두운 이면들, 약한 자들의 이야기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사회의 감언이설과 타협하지 않고 제대로 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본 많은 독립영화들은 고뇌하고 있었고 고뇌하게 만들었다. 보고 나면 무거운 마음이 드는 그런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때론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고 공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나는 나를 자극시키고 사회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세상을 마냥 밝게만 바라보려 하는 나의 시선을 넓게 만들어주는 독립영화의 이러한 시선들을 훌륭하다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만이 독립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아니라도 독립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독립적이고 무엇이 독립적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서 독립영화가 생겨나게 된 동기의 의미로서 독립영화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영화와 단편영화에서 오는 혼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듯 하다.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번 <단편영화산책> 수업을 통해서 그것의 경계는 어디이며, 무엇일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혼자서 막연히 고민하던 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독립영화에 대한 원래 의미는 이미 변색되어 버렸기 때문에, 독립영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욱 맛있게 ‘독립영화’를 맛보고자 하는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함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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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중심으로-독립영화에 대한 단상들

<단편영화산책> 협동과정 서사창작과 강 지 혜

 

 변방에서 중심으로-독립영화에 대한 단상들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며 독립영화는 투쟁 의지가 서린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투쟁이라는 단어로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를 나눠도 좋을까? 이를테면 대부분의 예술이 어떤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투쟁을 근거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단순 미학적인 관점에서 유희로 시작되는 것도 있겠지?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좀 더 투쟁의 강도가 강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썼다.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도 관건이겠다. 영화 중간 중간 독립영화계의 한 획들을 긋는 작품들을 보면 그 역사가 그대로 드러난다. 철거민들을 위한 혹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나뿐이 아닌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회의 현상에 대해 망설임 없이 바로 의지를 표명하는 것, 그런 것을 바로 독립영화의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을까? 왠지 이번 과제를 하면서 하염없이 물음표만 붙는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재미있으면 좋겠다. 혹은 따뜻하면 좋겠다. 라는 인터뷰 내용이 생각난다. 그리고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는 영화를 하고 있지 않았나 라고 말하는 감독도 기억난다. 이러한 고민과 욕망은 비단 독립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충돌은 희망이다.’ 라는 문장을 보고 뭔가 느낌이 왔다. 영화가 착상되게 된 사회적 사건부터, 사사건건 만들어지는 과정 내내 간섭하는 관료적 잣대, 이후 상영되는 과정에서 빗어지는 해프닝들까지 모두가 충돌의 충돌을 거듭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투쟁과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될 것이다.

 

왠지 앞으로 수업시간에 단편영화와 독립영화 둘 중 어느 것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논제에 대해, 독립영화에 더 비중을 싣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뭔가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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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기억-단편영화에 대한 단상들

<단편영화산책>협동과정 서사창작과 강 지 혜

 

매혹의 기억-단편영화에 대한 단상들

 

  문득 쏟아지는 수많은 영상물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컴퓨터 그래픽 등 영상 기술의 발전으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을 바로 마주보게 된다. 아마도 세월이 갈수록 영화는 무섭게 발전해 갈 것이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홀리 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70년대 만들어졌으나 현재의 내로라하는 여느 컬트영화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미지의 힘은 그걸 가능케 하는 기술에도 있지만 이미지를 존재케 하는 정신과 그 플롯에 더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지난 시간, 한국의 70, 80년대 영화를 보았다. 첫 영화 <아침과 저녁사이>의 실험적인 이미지들이나, <백일몽> 같은 재미있는 플롯부터 <칸트 씨의 발표회>처럼 강한 메시지까지, 사실 조금 놀랐다. 한국영화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변방에서 아무도 잘 보아주지 않는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제는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사회에서 시를 쓰는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격렬하고 실험적인 70, 80년대와 달리 90년대 영화들은 잔잔하고 문학적이었다. <우중산책>에서 읽히는 여인의 비에 젖은 마냥 질척대고 비참한 안생이나 <가변차선>의 마치 황석영 소설을 읽는 듯한 문학적인 느낌, <지하생활자>처럼 불 꺼진 지하까지 관객을 끌고 내려갔다가 한바탕 불을 질러버리는 광기의 모습까지. 러닝타임 내내 강렬한 몸짓은 없지만 어떤 순간 감정이 폭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미군이 이라크 여자아이를 강간한 사건에 대한 글을 써간 적이 있다. 써간 나를 비롯 또래들은 강한 목소리를 띤 글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교수님은 요즘 나이든 노인네들이 읽기엔 이 글의 목소리는 너무 약하다고 느꼈을 거라 하셨다. 그들의 시대엔 더 치열하고 처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요즘시대는 어떤 투쟁들이 지하세계로 내려가 버리고 그 위에선 반쯤 벗은 연예인과 빠르게 바뀌는 가전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 같다.

문득 70년대에서 90년대로 내려오며 영화 내의 거친 면들은 사라지고 내성적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기저에 깔린 지뢰를 감지하며 영화를 보았던 시간이었다. 억압은 어느 시대든 존재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더 영악하고 조용하게 이 사회를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시 영화도 진화한다. 진화일까? 수업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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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단편영화산책

2007/03/27

방송영상과 정지원

2005138016


70, 80년대의 한국 단편영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나의 무지함이 지나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시대에는 한국에서 단편영화가 제작 되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처음으로 본 그 흑백의 단편영화는 상당히 특이했는데, 상당히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접적인 장면은 묘사되지 않았지만, 처음만난 여자와 섹스를 하고, 그 여자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집에 있던 애인에게 다시 선물하는, 70년대의 청년들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그러한 영화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볼 수 없는 예전의 서울 풍경들이 생경했다. 그 시대의 풍경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단편들이 기록적인 역할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단편들은 픽션이지만 이 영화들은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대를 주름잡고 있던 사상과 소수자들의 인권이 잘 녹아난 작품들이었다. 더 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 시대를 대변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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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_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_ 방송영상과 2005138016 정지원


“기존 상업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제작한 영화”

백과사전에서 정의하는 독립영화의 의미이다. 백과사전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독립영화를 하는 이들을 “배고픈 직업”을 가진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 역시 “독립영화”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이러한 정의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간단하게는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최근 들어서 조금은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뚜렷한 자신의 신념과 열정을 담아낸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창작자의 의도’가 신념과 열정이란 단어를 대신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깊게 좁게 생각해 본다면 신념이라는 단어가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면서, 그리고 다른 독립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만드는 이에겐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무엇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독립영화를 하는 이들은 자본을 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믿고 있는 그 무언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물론 상업영화를 제작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확고한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신념에 동의를, 또 어떤 관객은 그것에 반기를 들것이다. 하지만  돈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앞세운 그들이 상당히 부러울 뿐이다. 아직 나에겐 그러한 확고한 신념이나, 세상을 좀 더 깊이 보는 눈이 없다. 세상을 좀 더 깊고 다르게, 그리고 세심하게 보는 법, 그리고 내가 믿고 따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이들이 만들어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독립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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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산책>                                             방송영상 20041235 도유리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



  독립영화란 무엇일까, 에 대한 대답은 비록 그것이 내 개인적인 정의라 할지라도, 정말이지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번 기회에 또렷이 깨달았다. 독립영화에 대한 정리를 하자면 먼저 ‘독립’ 이라는 말부터 정의 내려야 할진대, 우리가 흔히 쓰는 독립이라는 단어는 독립영화의 그것과는 꽤나 먼 거리에 있다는 확신을 지울 수 없는 탓이다. 이 지경쯤 되고 보니, 도대체 누가 독립영화에 최초로 독립영화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그 사람은 어쩌다가 그 말을 떠올렸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피어난다.


  아주 진부한 추측을 해보자면, 최초의 그 작명가는 독립영화가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있는’ 영화라는 의미를 담아 그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독립영화가 가진 특징들은 많지만, 그 모든 특징들을 한 번에 표현해낼 수 있는 단어를 찾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이름이 태어나던 시기에는 아마 그것이 명확하고도 현실적인 근거를 가진 이름이었을 테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고 멀고 까마득하긴 하지만, 독립영화라는 이름이 탄생하던 그 때보다는 그래도 독립영화에 대한 위상이 많이 높아진 지금, 독립영화에 상업성 짙은 자본이 전혀 침투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작가의 태도 문제일까.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독립영화란, (상업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상대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대신,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삶과 그 배경이 되는 이 사회에 천착해있는 영화라고. (이쯤에서 ‘천착(穿鑿)’의 사전적 정의를 알아보니, ‘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 이라고 한다. 정확히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것이 다큐멘터리이건 극영화건 간에 상업영화보다는 좀 더 진지한 태도를 품고 있으며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니까. 상업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진지하거나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이고 또 심각한 왜곡이지만, 독립영화에 대한 ‘단상’을 표현해보라는 과제를 받고서 이상하게도 독립영화의 ‘정의’를 강박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나로서는 이 단순하고도 진부한 답이 새삼 신선하게 느껴진다. 막연하던 그 무엇을, 이렇게 글로 풀어내본 것은 아주 오랜만인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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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에 대한 단상

 

<단편영화산책>                                                       방송영상 20041235 도유리



내가 바라보는 단편



  지난 학기, 나는 25분여 길이의 ‘Short'를 만들었다. 내가 속한 과의 특성상 포맷은 드라마였지만 어쨌거나 단편영화와 별다를 바 없는 작품이었고, 그 지난한 산고를 겪으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흔히들 단편의 매력이란, 짧은 길이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 역시 영상의 길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을 토해내고 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물론 나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 라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애송이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노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단편이라는 작은 그릇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던 것이 애초에 무모한 짓이었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누군가가 이런 나에게, 포기하는 게 아니냐고 혹은 지레 겁을 먹은 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외국과 한국의 단편들을 보면서도 역시나, 그런 나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더 많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가 그것이 버거워 휘청대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적잖이 있었고, 그들 역시 짧은 길이 안에 그들이 원했던 모든 것들을 녹여내는 데 실패했으리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 역시 그들처럼 관객들과의 소통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의 실패가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단편에 도전하려 한다. 단편에 어울릴만한 이야기를 찾아내어, 지난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단편만의 매력을 맛보기 위해. 더 나아가, 많은 이야기들을 능숙히 녹여내어 단편이라는 그릇 안에 알맞게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을 쌓기 위해. 앞으로의 수업시간에도, 그런 농익은 솜씨를 느낄 수 있는 단편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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