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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품성

[정신의 모험] 혁명가의 품성

이성과 정신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전체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자기의식 개념부터 시작하죠. 자기의식이야 데카르트의 발견이죠. 의식이 곧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 데카르트는 이런 의식의 자기의식성을 의식의 본질적 규정으로 고양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비난도 많이 받았죠. 의식되지 않는 의식은 전혀 없는 건가? 무의식적 지각이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런 비난을 받아도, 데카르트의 자기의식 개념은 꿋꿋하게 대륙의 합리론 철학에서 계승되어 그 근간이 되었습니다. 칸트, 그리고 헤겔 모두 자기의식 개념을 출발점으로 해서 자기 철학을 시작했었죠. 나중에 브렌타노, 후설로 가면서 의식의 본질적 규정이 지향성으로 바뀌는데, 그때까지 자기의식 개념은 철학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식을 철학의 왕좌에 올린 사람은 바로 헤겔입니다. 헤겔은 자기의식 개념을 통해 다양한 의식의 형태들을 포괄했습니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의 각 단계는 자기의식의 종류에 의해 즉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죠. 즉 그래서 정신현상학은 감각, 자기의식, 이성, 정신, 절대정신이라는 5개의 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 정신이라는 항목과 감각, 이성이라는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을 살펴보면 어떤 차이가 보입니다. 감각, 이성의 경우 인식론적 개념이 다루어집니다. 여기서는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주관과 대상이 일치하고, 이때 대상의식은 자기의식이 되죠. 진리의 상태가 곧 자기의식이죠. 

반면 자기의식, 정신의 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잘 보면 실천적 의지의 개념들입니다. 자기의식 장에서는 욕망이, 정신의 장에서는 자유의지가 다루어지죠. 이런 실천적 의지의 경우는 의도가 실제로 실현되는 경우 자기의식이 됩니다. 이 경우는 자유로운 상태가 자기의식이 됩니다. 

그러니까 헤겔은 진리와 자유, 인식론적 규정과 의지의 규정을 모두 자기의식의 단계로 포함했습니다. 본래 데카르트가 진리의 상태에만 적용했던 자기의식 개념이 이렇게 확대된 거죠. 어떻게 보면 자기의식 개념의 이런 확대에 의해 정신현상학은 무척 혼란스럽게 여겨집니다. 앞 장에서 이미 자기의식에 도달했는데, 또 뒷장에서 자기의식을 향해 또 나아가니까 뭐 이런 게 다있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헤겔이 자기의식 개념을 이렇게 확대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자기의식의 개념이 각 장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정신현상학의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감각-자기의식-이성-정신-절대정신 , 이렇게 나가니까, 앞의 자기의식의 두 종류를 고려해 보면, 이론-실천-이론-실천, 이렇게 나아가죠. 지그재그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감각과 이성은 어떻게 다를까요? 감각이 대상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이성이 대상의 보편성 즉 법칙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이니까 더 설명할 필요 없겠죠. 

그런데 감각 다음의 자기의식 장이 다루는 실제 내용은 욕망이죠. 정신 장의 내용은 자유의지입니다. 실천적 의지의 종류이지만 두 가지는 단계적으로 구분되죠. 헤겔은 욕망이 사회와 대립되는 개별적 자아라고 본다면, 자유의지는 이미 사회와 자아의 통일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지니죠. 즉 개별적 실천의지와 보편적 실천의지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다시 정신현상학의 구성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되죠. 개별적 인식-개별적 의지-보편적 인식-보편적 의지... 이런 식으로 정신현상학의 구성을 정리해보면, 이제 정신현상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다룰 정신의 장이 어떤 운동을 다루는지 이해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이런 얘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성의 단계에 올랐습니다. 세계의 보편적 법칙을 인식한 거죠. 그런데 이제 실천적 의지가 이 보편적 법칙을 실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의지는 개별적 욕망 단계에 있어서, 보편적 법칙을 알면서도 스스로 실현하지 못하죠. 

여기서 실현한다는 의미를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실 보편적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은 그가 의지로서 이 법칙을 수행하든 말든 실제로 객관적으로는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렇게 실제로 실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자기의 주관적 욕망을 고집해서 그것을 실현하려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자기도 모른 채 수행하고 만다는 겁니다. 

헤겔은 이런 상태를 역사철학에서 *이성의 간지*라는 개념으로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역사적 영웅과 관련해서 설명한 것인데, 엄격하게 말하면 모든 정신의 출발점에 선 인간이면 모두 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게 이성 장이 끝나고 정신 장이 시작될 때 인간이 부딪힌 상황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신 장의 운동이 지향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얼마간 감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거죠. 보편적 이성의 원리를 스스로 자각해서 자기의 의지가 이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걸 자유의지라 하죠. 자의가 아니라 자유의지입니다. 즉 의지가 자유의지에 도달하려는 것이 정신 장의 목표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사실 칸트가 이미 제기했죠. 아마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기억할 것입니다. 칸트가 루소를 좋아해서 그의 소설 에밀을 읽다가, 달걀이 아닌 자기의 시계를 삶았다는 에피소드 말이죠. 

그런데 칸트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이 가지는 위험을 깨닫고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이성 비판을 작성했다고 하죠. 그 실천이성 비판의 핵심은 바로 자유의지입니다. 도덕법칙을 법칙으로서 또는 의무로서 의지하는 것, 그게 바로 자유의지이죠. 헤겔이 도달하려는 것도 사실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은 프랑스 혁명의 원리인 일반의지를 다루기 위해 쓰여 진 장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일반의지의 한계를 극복할 길을 찾는 거죠. 

헤겔은 물론 칸트를 넘어서려 합니다. 그는 칸트의 의무로서 자의의지의 한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한계를 미리 본 낭만주의자들의 양심 개념의 한계도 들여다 보죠 .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절대정신을 제시합니다.

세계의 법칙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문제이다. 실현의 방법은 자연상태에 내버려 둘 수도 있지만, 이 법칙을 자각적으로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비단 칸트 헤겔에게서만 문제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러 다시 이 문제가 제기됩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은 그대로 두어도 실현되죠. 많은 우여곡절을 통과해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전위라는 개념이 나오죠. 이 역사의 전위는 역사법칙을 자각하고 이것을 실현하려는 자입니다. 레닌이 제시한 이 역사적 전위라는 개념, 그것이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혁명가의 의식을 볼 때, 그들이 역사의 전위로서 역사법칙을 자각적으로 수행하려 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과연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의 차원에서 수행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많은 혁명가들은 루소의 일반의지에 머물렀고, 기껏해야 칸트의 의무감이나 낭만적 양심 개념에 기초하지 않았을까요? 그 결과 사회주의 혁명은 많은 혼란과 고통을 동반했던 것이 아닐까요?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지금, 많은 자기비판이 필요하지만 혁명가의 의식 문제 역시 주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품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제가 품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영웅적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발견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혁명가의 품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것이 목적이죠. 그리고 그런 혁명가의 품성을 파악하는 데서,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을 참고사항으로 제시하려는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주석을 쓰는 저의 목표입니다. 


글: 이병창 (한국철학연구회) / 출처: 한국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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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의 간지 [Trick of reason , 理性의 奸智]

헤겔의 저작에 종종 나타나며, 그의 철학을 특징지우는 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역사철학』에 있는 것으로, 세계정신 스스로는 배후에 있어 공격도 당하지 않고, 상처도 입지 않으면서, 개인을 조종하여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것을 희생시키는 것에 의해 자기의 목적을 실현한다. 이 세계사의 과정은 마치 이성이 교활하게도 가지각색의 정열을 서로 손상시킴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이성의 간지(교지)라고 불려진다. 
『논리학』 중의 목적론에는 주관적 목적이 자기와 대상의 사이에 다른 대상을 도구로 끼워 넣고, 이 대상들을 서로 마모시켜, 스스로는 이 과정의 밖에 있는 채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개체의 움직임을 그것이 모르는 사이에 전체의 필요에 따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주관적인 이성을 초월하여 객관적 관념론을 취하는 철학에서는 자연스러운 사상인데, 헤겔이 역사적 정신의 측면에서 사고했던 것을, 괴테도 자연의 측면으로부터 자연의 간지(List der natur)로서 인정했던 것이다.


참조어 : 이성(理性)의 교지(狡智)  
출처: 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2009, 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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