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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2_존 듀이의 논리학 1부 1장.hwp (159.03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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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 논리학 - 탐구의 이론, 헨리홀트 출판사(Henry Holt and Company), 1939, 1부 1장.
Part One
INTRODUCTION: THE MATRIX OF INQUIRY
1부
도입 : 탐구의 매트릭스
CHAPTER 1
THE PROBLEM OF LOGICAL
SUBJECT-MATTER
1장
논리학 주체 문제(SUBJECT-MATTER)의 문제
CONTEMPORARY LOGICAL theory is marked by an apparent paradox. There is general agreement as to its proximate subject-matter. With respect to this proximate subjectmatter no period shows a more confident advance. Its ultimate subject-matter, on the other hand, is involved in controversies which show little sign of abating. Proximate subject-matter is the domain of the relations of propositions to one another, such as affirmation-negation, inclusion-exclusion, particular-general, etc. No one doubts that the relations expressed by such words as is, isnot, if-then, only (none but), and, or, some-all, belong to the subject-matter of logic in a way so distinctive as to mark off a special field.
동시대의 논리학 이론은 명백한 역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그것의 가장 가까운 주체 문제(SUBJECT-MATTER)에 관한 일반적 합의가 있다. 이 가장 가까운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시대도 확실한 전진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것의 궁국적 주체 문제는 감소의 작은 신호를 보여주는 논쟁과 관련된다. 가장 가까운 주체 문제는 긍정-부정(affirmation-negation), 포함-부정(inclusion-negation), 특수-일반(particular-general) 등과 같은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명제 관계 분야이다. 누구도 이다(is), 이지 않다(is not), 만약-그러면(if-then), 오직(only) {제외한 어떤 것도 아니다(none but)}, 그리고(and), 또는(or), 약간-모두(some-all)와 같은 말로 표현된 관계가 특별한 분야를 특징지어 버리는 너무 구별적인 방식으로 논리학의 주체 문제에 속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When, however, it is asked how and why the matters designated' by these terms form the subject-matter of logic, dissension takes the place of consensus. Do they stand for pure forms, forms that have independent subsistence, or are the forms in question forms of subject-matter? If the latter, what is that of which they are forms, and what happens when subject-matter takes on logical form? How and why?
하지만, 문제가 논리학의 주체 문제로부터의 이 용어들에 의해 가리켜지는 방법과 이유가 물어질 때, 일치에서 불일치가 발생한다. 그들은 순수한 형식, 독립적인 생존을 가지는 또는 주체 문제의 질문 형식에서의 형식인 형식을 대표하는가? 만약 후자라면, 그들이 형식인 것은, 그리고 주체 문제가 논리학 형식을 떠맡을 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리고 왜?
These are questions! of what I called the ultimate subject-matter of logic; and about this subject-matter controversy is rife. Uncertainty about this question does not prevent valuable work in the field of proximate subject-matter. But the more developed this field becomes, the more pressing is the question as to what it is all about. Moreover, it is not true that there is complete agreement;, in the more limited field. On the contrary, in some important matters, there is conflict even here; and there is a possibility (which will be shown in the sequel to be actualized) that the uncertainty and diversity that exists in the limited field is a reflection of the unsettled state of opinion about ultimate subject-matter.
이것이 내가 논리학의 궁극적(ultimate) 주체 문제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 문제에 관하여 논쟁이 유행이다. 이 질문에 관한 반신반의는 적당한 주체 문제의 장에서 가치 있는 일을 방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장이 더 많이 발전될수록, 더 많은 억압이 그것이 관하여인 모든 것에 관한 문제이다. 게다가, 더 많은 제한된 장에서 완벽한 합의가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정반대로, 일부 중요한 문제에서, 여기에조차 충돌이 있다; 그리고 (현실화된 귀추에서 보여질) 가능성이 제한된 장에서 존재하는 반신반의와 상이함이 궁극적인 주체 문제에 관한 의견의 동요 상태의 반영일 수 있다.
To illustrate the existing uncertainty as to ultimate subjectmatter, it is only necessary to enumerate some of the diverse conceptions about the nature of logic that now stand over against one another. It is said, for example, that logic is the science of necessary laws of thought, and that it is the theory of ordered relations relations which are wholly independent of thought. There are at least three views held as to the nature of these latter relations: They are held (1) to constitute a realm of pure possibilities as such, where pure means independent of actuality; (2) to be ultimate invariant relations forming the order of nature; and (3) to constitute the rational structure of the universe. In the latter status, while independent of human thought, they are said to embody the rational structure of the universe which is reproduced in part by human reason. There is also the view that logic is concerned with processes of inference by which knowledge, especially scientific knowledge, is attained.
궁극적 주체 문제에 관한 존재하는 불확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것에 맞서 현재 입회하는 논리학의 본성에 관하여 몇몇 다양한 개념들을 일일이 드는 것은 다만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논리학은 사고의 필수적 법칙 과학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통제된 관계의 이론이라고 말해진다. 관계는 사고에 전체적으로 독립적이다. 이 후자 관계의 본성에 관하여 유지되는 적어도 세 가지 시각이 있다 : 그들은 유지된다 (1) 그 자체로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을 구성한다고, 그것은 현실성에 독립적인 순수한(pure) 방식이다; (2) 본성의 질서(order)를 형성하는 궁극적인 불변적 관계로; 그리고 (3) 우주의 관계적 구조의 구성으로. 후자의 입장에서, 인간 사고에 독립적인 반면에, 그들은 인간 이성에 의해 부분적으로 생산된 우주의 관계적 구조를 체화한다고 말해진다. 논리학이 지식이, 특히 과학적 지식이, 달성된 개입의 과정과 관련된다는 시각이 또한 있다.
Of late, another conception of its subject-matter has appeared upon the scene. Logic is said to be concerned with the formal structure of language as a system of symbols. And even here there is division. Upon one view, logic is the theory of transformation of linguistic expressions, the criterion of transformation being identity of syntactical forms. According to another view, the symbolic system, which is the subject-matter of logic, is a universal algebra of existence.
최근에, 그것의 주체 문제의 또 다른 개념이 감각에 나타났다. 논리학은 상징의 체계로서 언어의 형식적 구조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조차 분할이 있다. 한 시각에 따라, 논리학은 언어적 표현의 변형 이론, 통사적 형식의 확인인 변형의 표준이다. 또 다른 시각에 따르면, 상징적 체계는, 논리학의 주체 문제인데, 존재의 보편적 대수학(代數學)이다.
In any case, as regards ultimate subject-matter, logic is a branch of philosophic theory; so that different views of its subject-matter are expressions of different ultimate philosophies, while logical conclusions are used in turn to support the underlying philosophies. In view of the fact that philosophizing must satisfy logical requirements there is something in this fact that should at least provoke curiosity; conceivably it affects unfavorably the autonomy of logical theory. On the face of the matter, it does not seem fitting that logical theory should be determined by philosophical realism or idealism, rationalism or empiricism, dualism or monism, atomistic or organic metaphysics. Yet even when writers on logic do not express their philosophic prepossessions, analysis discloses a connection. In some cases conceptions borrowed from one or another philosophic system are openly laid down as foundations of logic and even of mathematics.
어떤 경우에, 궁극적 주체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논리학은 철학 이론의 지류이다; 그래서 그것의 주체 문제의 다른 시각은 다른 궁극적 철학의 표현이다, 반면에 논리학적 결론은 차례로 기초가 되는 철학을 지지하는 데 쓰인다. 철학하기가 논리적 요규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의 시각에서 이 사실에서 호기심을 적어도 일으켜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논리학 이론의 자율에 불리하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 문제에 대면해서, 논리학 이론이 철학적 실재론 또는 관념론, 합리주의 또는 경험주의, 이원론 또는 일원론, 원자적 또는 유기적 형이상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맞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논리학에 대한 필자가 그들의 철학적 선입관을 표현하지 않을 때조차, 분석가들은 연결을 드러낸다. 몇몇 경우에서 하나의 또는 또 다른 철학적 체계로부터 빌린 개념들은 공공연히 논리학의 그리고 심지어 수학의 기초로서 아래 놓였다.
This list of diverse views given above is put down by way of illustration. It is not exhaustive, but it suffices to justify one more endeavor to deal with proximate subject-matter in terms of a theory concerning the ultimate subject-matter of logic. In the present state of affairs, it is foolish to say that logic must be about this or that. Such assertions are verbal realisms, assuming that a word has such magical power that it can point to and select the subject to which it is applicable. Furthermore, any statement that logic is so-and-so, can, in the existing state of logical theory, be offered only as a hypothesis and an indication of a position to be developed.
위에 주어진 다양한 시각의 이 목록은 설명의 방식에 의해 억눌린다. 그것은 총망라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주체 문제에 관한 이론의 관점에서 적절한 주체 문제를 다루는 또 한 번의 노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면 족한 것이다. 일의 현재 상태에서, 논리학이 이것 또는 저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은 미련하다. 그러한 단정은 말의 실재론이다, 그것이 적용가능한 주체를 가리키고 선택할 수 있는 그러한 마법적 권력을 말이 가진다고 가정하면서 말이다. 더욱이, 논리학이 이러저러하다는, 어떤 언급이, 논리학 이론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발달된 입장의 지시와 가설로서만 제공될 수 있다.
Whatever is offered as a hypothesis must, however, satisfy certain conditions. It must be of the nature of a vera causa. Being a vera causa, does not mean, of course, that it is a true hypothesis, for if it were that, it would be more than a hypothesis. It means that whatever is offered as the ground of a theory must possess the property of verifiable existence in some domain, no matter how hypothetical it is in reference to the field in which it is proposed to apply it. It has no standing if it is drawn from the void and proffered simply ad hoc. The second condition that a hypothesis about ultimate logical subject-matter must satisfy is that it be able to order and account for what has been called the proximate subject-matter. If it cannot meet the test thus imposed, no amount of theoretical plausibility is of avail. In the third place, the hypothesis must be such as to account for the arguments that are advanced in support of other theories. This condition corresponds to the capacity of a theory in any field to explain apparent negative cases and exceptions. Unless this condition is fulfilled, conclusions reached in satisfaction of the second condition are subject to the fallacy of affirming an antecedent clause because the consequent is affirmed.
하지만, 가설로서 제공된 것이 무엇이든지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것은 확실한 원인(vera causa)의 본성에 있어야 한다. 물론, 확실한 원인인 것은 그것이 진짜 가설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저것이라면, 그것은 가설 그 이상의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이 그것에 적용되기로 되어 있는 영역에 대한 언급에서 그것이 얼마나 가설적인 것일지라도, 이론의 근거로서 제공된 것이 무엇이든지 일부 범위에서 입증할 수 있는 존재의 속성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이 단순하게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ad hoc)제공되고 공허로부터 끌어내어진다면 그것은 어떠한 입장도 가지지 않는다. 궁극적 논리학 주체 문제에 관한 가설이 만족시켜야 하는 두 번째 조건은 그것이 적절한 주체 문제라고 불리는 것을 통제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렇게 주어진 시험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어떠한 양의 이론적 그럴듯함도 쓸모가 없다. 세 번째 장소에서, 가설은 다른 이론들을 지지하며 전진된 논쟁에 대한 그 자체로의 설명임에 틀림없다. 이 조건은 명백한 부정적 원인과 예외를 설명할 어떤 영역에서 이론의 수용력에 대응한다. 만약 이 조건이 이행된다면, 두 번째 조건의 만족에 도달한 결론은 선행 절 확언의 오류에 종속된다 왜냐하면 후건이 확언되기 때문이다.
From these preliminary remarks I turn to statement of the position regarding logical subject-matter that is developed in this work. The theory, in summary form, is that all logical forms (with their characteristic properties) arise within the operation of inquiry and are concerned with control of inquiry so that it may yield warranted assertions. This conception implies much more than that logical forms are disclosed or come to light when we reflect upon processes of inquiry that are in use. Of course it means that; but it also means that the forms originate in operations of inquiry. To employ a convenient expression, it means that while inquiry into inquiry is the causa cognoscendi of logical forms, primary inquiry is itself causa essendi of the forms which inquiry into inquiry discloses.
이 서문의 언급으로부터 나는 이 일에서 발달된 논리적 주체 문제에 관하여 입장의 진술로 전환한다. 요약적 형식으로, 이론은 모든 논리적 형식이 (그들의 특징적 성질과 함께) 탐구의 작용 내부에서 일어나고 그리고 탐구의 통제와 관련되어서 그것이 보장된 단언을 산출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논리적 형식이 우리가 사용 중인 탐구의 과정을 반성할 때 나타내지거나 또는 비추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함축한다. 물론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형식이 탐구의 작용에서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리한 표현을 쓰기 위해, 그것은 탐구에의 탐구가 논리학 형식의 앎의 근거(causa cognoscendi)인 반면에, 제일의 탐구는 그 자체로 탐구에의 탐구가 나타내는 형식의 있음의 근거(causa essendi)이다.
It is not the task of this chapter to try to justify this hypothesis, or to show that it satisfies the three conditions laid down. That is the business of the work as a whole. But I wish to emphasize two points preparatory to expounding the meaning (not the justification) of the conception, an exposition that is the main task of the present chapter. One of them is that any revulsion against the position just indicated should be tempered by appreciation of the fact that all other conceptions of logical subject-matter that are now entertained are equally hypothetical. If they do not seem to be so, it is because of their familiarity. If sheer dogmatism is to be avoided, any hypothesis, no matter how unfamiliar, should have a fair chance and be judged by its results. The other point is that inquiries, numerous in variety and comprehensive in scope, do exist and are open to public examination. Inquiry is the lifeblood of every science and is constantly engaged in every art, craft and profession. In short, the hypothesis represents a vera causa, no matter what doubt may attend its applicability in the field of logic.
이 가설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또는 그것이 아래에 놓인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이 장의 임무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로 일의 업무이다. 그러나 현재 장의 주요한 임무인 박람회, 개념의 (정당화가 아니라) 의미를 상술하는 데 예비적인 두 가지 지점을 강조하기를 바란다. 그것들 중의 하나는 다린 가리켜진 입장에 맞선 어떤 격변도 지금 마음에 품어진 논리학적 주체 문제의 모든 다른 개념들이 평등하게 가설적이라는 사실의 평가에 의해 부드러워져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친숙함 때문이다. 만약 얇은 교조주의가 피해진다면, 어떤 가설도, 아무리 친숙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공정한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리고 그것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 다른 지점은, 다양성에서 수많고 범위에서 포괄적인, 탐구가 정말 존재하고 공적인 검토에 정말 열려있다는 것이다. 탐구는 모든 과학의 활력의 근원이고 모든 예술, 기술, 그리고 직업에 변함없이 관계한다. 요약하자면, 가설은 확실한 원인(vera causa)을 제시한다, 어떤 의심이 논리학의 장에서 그것의 적용가능성에 참석할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말이다.
Further elucidation of the meaning of the position taken will proceed largely in terms of objections that are most likely to arise. The most basic of these objections is that the field indicated, that of inquiries, is already pre-empted. There is, it will be said, a recognized subject which deals with it. That subject is method ology; and there is a well recognized distinction between method ology and logic, the former being an application of the latter.
가져가진 입장의 의미에 대한 그 위의 해명은 일어날 가능성이 주로 있는 반대의 관점에서 크게 나아갈 것이다. 이 반대의 대부분의 기초는 가리켜진 장이, 탐구의 그것이, 이미 선매권(先買權)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해진다, 그것을 다루는 인정된 주체가 있다고. 그 주체는 방법론이다; 그리고 방법론과 논리학 사이에 잘 인정된 구별이 있다, 전자가 후자의 적용이면서 말이다.
It certainly cannot be shown, short of the total development of the position taken, that this objection is not just. But it may be noted that assertion in advance of a fixed difference between logic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and practical inquiry begs the fundamental question at issue. The fact that most of the extant treatises upon methodology have been written upon the assumption of a fixed difference between the two does not prove that the difference exists. Moreover, the relative failure of works on logic that have identified logic and methodology (I may cite the logic of Mill as an example) does not prove that the identification is doomed to failure. For the failure may not be inherent. In any case, a priori assumption of a dualism between logic and method ology can only be prejudicial to unbiased examination both of methods of inquiry and logical subject-matter.
가져가진 입장의 총체적 발달을 짧게, 이 반대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논리학과 과학적이고 실제적 탐구의 방법론 사이에 고정된 차이의 진전에서 단언이 논쟁에서 기초적 질문을 빈다는 것이 기록될지도 모른다. 방법론에 대한 현존하는 논문의 대부분이 그 두 가지 사이에 고정된 차이의 가정에 대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은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게다가, 논리학과 방법론을 (나는 예시로서 밀의 논리학을 인용할지도 모른다) 확인했던 논리학에 대한 일의 비교적 실패는 확인이 실패할 운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실패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논리학과 방법 학문 사이에 이중성의 선험적 가정은 탐구의 방법론과 논리학적 주체 문제 둘 다의 공평한 조사에 단지 편견을 갖게 할 수 있다.
The plausibility of the view that sets up a dualism between logic and the methodology of inquiry, between logic and scientific method, is due to a fact that is not denied. Inquiry in order to reach valid conclusions must itself satisfy logical requirements. It is an easy inference from this fact to the idea that the logical requirements are imposed upon methods of inquiry from without. Since inquiries and methods are better and worse, logic involves a standard for criticizing and evaluating them. How, it will be asked, can inquiry which has to be evaluated by reference to a standard be itself the source of the standard? How can inquiry originate logical forms (as it has been stated that it does) and yet be subject to the requirements of these forms? The question is one that must be met. It can be adequately answered only in the course of the entire discussion that follows. But the meaning of the position taken may be clarified by indicating the direction in which the answer will be sought.
논리학과 탐구의 방법론 사이에, 논리학과 과학적 방법론 사이에 이원성을 설정하는 시각의 그럴듯함은 부인되지 않는 사실에 기인한다. 탐구는 유효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그 자체가 논리학적 요구를 만족해야 한다. 그것은 이 사실로부터 논리학적 요구가 바깥에서 탐구에 부과된다는 생각으로의 쉬운 간섭이다. 탐구와 방법이 좋고 나쁘기 때문에, 논리학은 그것들을 비평하고 평가하는 데에 대한 기준을 포함한다. 그것이 물어질 것이다, 어떻게 기준에 대한 언급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는 탐구가 그 자체 기준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탐구가 (그것이 한다고 그것이 진술했던 것대로) 논리학적 형식을 시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아직 이 형식의 요구에 대한 주체일 수 있는가? 그 질문은 만족되어야 하는 물음이다. 그것은 따라오는 전체의 토론의 과정에서만 적절하게 대답될 수 있다. 그러나 가져가진 입장의 의미는 대답이 추구될 방향을 가리킴으로써 분명해질지도 모른다.
The problem reduced to its lowest terms is whether inquiry can develop in its own ongoing course the logical standards and forms to which further inquiry shall submit. One might reply by saying that it can because it has. One might even challenge the objector to produce a single instance of improvement in scientific methods not produced in and by the self-corrective process of inquiry; a single instance that is due to application of stand ab extra. But such a retort needs to be justified. Some kind of inquiry began presumably as soon as man appeared on earth. Of prehistoric methods of inquiry our knowledge is vague and speculative. But we know a good deal about different methods, that have been used in historic times. We know that the methods which now control science are of comparatively recent origin in both physical and mathematical science.
그것의 가장 낮은 용어로 환원된 문제는 탐구가 그것 자신의 전진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탐구가 복종하는 논리학적 표준과 형태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가지기 때문에 그것이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답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탐구의 자기-수정적 과정에서 그리고 과정에 의해 생산되지 않은 과학적 방법에서의 개선의 하나의 순간을 생산하는 반대자들에 심지어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외부로부터(ab extra) 세움의 적용에 기인한 하나의 순간. 그러나 그러한 반박은 정당화될 필요가 있다. 일부의 탐구는 인류가 나타나자마자 추측상 시작됐다. 탐구의 유사 이전의 방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어렴풋하고 순이론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방법들에 관하여 좋은 분량을 안다, 그것은 역사 시대에 쓰였다. 우리는 과학을 현재 통제하고 있는 방법이 물리학적이고 수학적인 과학 둘 다에서 비교적 최근의 기원임을 안다.
Moreover, different methods have been not only tried, but they have been tried out; that is, tested. The developing course of science thus presents us with an immanent criticism of methods previously tried. Earlier methods failed in some important respect. In consequence of this failure, they were modified so that more dependable results were secured. Earlier methods yielded conclusions that could not stand the strain put upon them by further investigation. It is not merely that conclusions were found to be inadequate or false but that they were found to be so because of methods employed. Other methods of inquiry were found to be such that persistence in them not only produced conclusions that stood the strain of further inquiry but that tended to be self-rectifying. They were methods that improved with and by use.
게다가, 다른 방법들이 시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철저히 시도되었다; 즉, 시험되었다. 과학이 발달하는 과정은 따라서 우리에게 이전에 시도되었던 방법의 내재적 비평을 제시한다. 더 이른 방법들이 일부 중요한 측면에서 실패했다. 이 실패의 결과로, 그것들은 수정되었고 그래서 더 많은 의존적 결과가 안전해졌다. 더 이른 방법들은 더 깊은 조사에 의해 속여진 긴장을 억지로 지킬 수 없는 결론을 산출했다. 그것은 단지 결론들이 부적절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런 것이 사용된 방법 때문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라는 것이다. 탐구의 다른 방법들은 더 깊은 탐구의 긴장을 억지로 지키는 결론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기-개정하는 경향이 있는 그것들 안에서의 그러한 그 영속임이 발견되었다.
It may be instructive to compare the improvement of scientific methods within inquiry with the improvement that has taken place in the progress of the arts. Is there any reason to suppose that advance in the art of metallurgy has been due to application of an external standard? The "norms" used at present have developed out of the processes by which metallic ores were formerly treated. There were needs to be satisfied; consequences to be reached. As they were reached, new needs and new possibilities opened to view and old processes were re-made to satisfy them. In short, some procedures worked; some succeeded in reaching the end intended; others failed. The latter were dropped; the former were retained and extended. It is quite true that modern improvements in technologies have been determined by advance in mathematics and physical science. But these advances in scientific knowledge are not external canons to which the arts have had automatically to submit themselves. They provided new instrumentalities, but the instrumentalities were not self-applying. They were used; and it was the result of their use, their failure and success in accomplishing ends and effecting consequences, that provided the final criterion of the value of scientific principles for carrying on determinate technological operations. What is said is not intended as proof that the logical principles involved in scientific method have themselves arisen in the progressive course of inquiry. But it is meant to show that the hypothesis that they have so arisen has a prima facie claim to be entertained, final decision being reserved.
탐구 내에서의 과학적 방법의 개선과 예술의 진보에서 일어났던 개선을 비교하는 것은 교훈적일지도 모른다. 진보가 야금술의 예술에서 외부적 표준의 적용에 기인했다고 가정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현재 사용된 “기준”은 금속 광석이 이전에 대해졌던 과정으로부터 발전했다. 만족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도달되어야 할 결과들. 그것들이 도달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필요들과 새로운 가능성들이 시각에 열렸고 그리고 오래된 과정들이 그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만들어졌다. 요약하자면, 일부 절차가 작동했다; 일부는 의도된 끝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것들은 실패했다. 후자는 떨어졌다; 전자는 보유되었고 확대되었다. 현대적 개선이 기술에서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전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정말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진들은 과학적 지식에서 예술이 자동적으로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복종하게 해야 했던 외부적 정전(正典)이 아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도구들을 제공했으나, 그러나 도구들은 자기-적용적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쓰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들 사용의, 그것들 실패의, 끝을 성취하고 그리고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데에서 성공의 결과였다. 그것은 결정적인 기술적 작용을 수행하는 데 대한 과학적 원리의 가치에 대한 최적적 비평을 제공했다. 말해진 것은 과학적 방법에 포함된 논리학적 원리들이 탐구의 진보적 과정에서 일어난 그들 자신을 가지는 증거로서 의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일어난 그것들이 대접될 주장을, 보존될 최종적 결심을 첫인상(prima facie)으로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I now return to exposition of the meaning of the position taken. That inquiry is related to doubt will, I suppose, be admitted. The admission carries with it an implication regarding the end of inquiry: end in both senses of the word, as end-in-view and as close or termination. If inquiry begins in doubt, it terminates in the institution f conditions which remove need for doubt. The latter state of affairs may be designated by the words belief and knowledge. For reasons that I shall state later I prefer the words "warranted assertibility."
나는 가져가진 입장의 의미에 대한 해설로 지금 돌아간다. 그 탐구는, 내가 가정하기로, 인정된 의지를 의심하는 것과 관련된다. 인정은 그것과 함께 탐구의 끝과 관련된 함축을 수반한다: 단어의 두 의미, 시각에서의 끝 그리고 폐쇄 또는 종료로의 끝. 만약 탐구가 의심스럽게 시작한다면, 그것은 의심에 대한 필요를 제거하는 조건의 설립에서 종료될 것이다. 업무의 후자적 상태는 믿음과 지식이라는 단어에 의해 명명될지도 모른다. 내가 나중에 상태를 말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보장된 단언가능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Belief may be so understood as to be a fitting designation for the outcome of inquiry. Doubt is uneasy; it is tension that finds expression and outlet in the processes of inquiry. Inquiry terminates in reaching that which is settled. This settled condition is a demarcating characteristic of genuine belief. In so far, belief is an appropriate name for the end of inquiry. But belief is a "double-barreled" word. It is used objectively to name 'what is believed. In this sense, the outcome of inquiry is a settled objective state of affairs, so settled that we are ready to act upon it, overtly or in imagination. Belief here names the settled condition of objective subject-matter, together with readiness to act in a given way when, if, and as, that subject-matter is present in existence. But in popular usage, belief also means a personal matter; something that some human being entertains or holds; a position, which under the influence of psychology, is converted into the notion that belief is merely a mental or psychical state. Associations from this signification of the word belief are likely to creep in when it is said that the end of inquiry is settled belief. The objective meaning of subject-matter as that is settled through inquiry is then dimmed or even shut out. The ambiguity of the word thus renders its use inadvisable for the purpose in hand.
믿음은 탐구의 결과에 적당한 명명에 관하여 그렇게 이해될지도 모른다. 의심은 쉽지 않다; 그것은 탐구의 과정에서 표현과 배출구를 발견하는 긴장이다. 탐구는 정해진 그것에 도달하는 데에서 종결된다. 이 정해진 조건은 진정한 믿음의 경계를 정하는 특징이다. 하는 한에 있어서는, 믿음은 탐구의 끝에 대한 적합한 이름이다. 그러나 믿음은 “이중 몸통의” 단어이다. 그것은 ‘믿어지는 것을’ 이름짓기 위해 객관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탐구의 결과는 업무의 정해진 객관적 상태이고, 그렇게 정해져서 우리는 그것에 따라, 명백하게 또는 상상 안에서 행동할 준비가 된다. 믿음은 여기서 객관적 주체 문제의 정해진 조건을 이름짓는다, 주어진 방식에서 행동할 채비와 함께, 주체 문제가 존재해 있다면, 그리고 있을 때. 그러나 대중적 사용에서, 믿음은 개인적 문제를 또한 의미한다; 일부 사람들이 만족시키고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심리학의 영향 아래의, 입장은 믿음이 단지 정신적이나 또는 심리적 상태라는 관념으로부터 전환된다. 연합은 믿음이라는 단어의 이 의미심장함으로부터 탐구의 끝이 정해진 믿음이라는 것이 말해 질 때 기어들어갈 수도 있다. 주체 문제의 객관적 의미는 그것이 탐구를 통해 정히지는 것처럼 그때 희미해지거나 또는 폐쇄되기도 한다. 말의 애매성은 따라서 우선 목적에 대하여 그것의 사용을 권할 수 없게 만든다.
The word knowledge is also a suitable term to designate the objective and close of inquiry. But it, too, suffers from ambiguity. When it is said that attainment of knowledge, or truth, is the end of inquiry the statement, according to the position here taken, is a truism. That which satisfactorily terminates inquiry is, by definition, knowledge; it is knowledge because it is the appropriate close of inquiry. But the statement may be supposed, and has been supposed, to enunciate something significant instead of a tautology. As a truism, it defines knowledge as the outcome of competent and controlled inquiry. When, however, the statement is thought to enunciate something significant, the case is reversed. Knowledge is then supposed to have a meaning of its own apart from connection with and reference to inquiry. The theory of inquiry is then necessarily subordinated to this meaning as a fixed external end. The opposition between the two views is basic. The idea that any knowledge in particular can be instituted apart from its being the consummation of inquiry, and that knowledge in general can be defined apart from this connection is, moreover, one of the sources of confusion in logical theory. For the different varieties of realism, idealism and dualism have their diverse conceptions of what "knowledge" really is. In consequence, logical theory is rendered subservient to metaphysical and epistemological preconceptions, so that interpretation of logical forms varies with under lying metaphysical assumptions.
지식이라는 단어는 또한 탐구의 객관적이고 정밀한 것을 명명하기에 적합한 용어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애매성으로 고통받는다. 지식의 도달, 또는 진실이 탐구의 끝이라고 말해질 때, 그 진술은, 여기서 가져가진 입장에 따라, 자명한 이치이다. 탐구를 만족하게 종결하는 것은, 정의에 의해, 지식이다; 그것은 지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탐구의 적절한 정밀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술은 가정될지도 모르고, 그리고 가정되었을지도 모른다, 동어반복 대신에 의미심장한 어떤 것을 발표하기 위해서. 자명한 이치로서, 그것은 지식을 완벽하고 통제된 탐구의 결과로 정의한다. 진술이, 하지만, 의미심장한 어떤 것을 발표하는 것으로 생각될 때, 경우는 보존된다. 지식은 탐구에 대한 언급과 탐구와의 연결로부터 떨어져 그것 자신의 의미를 가지도록 그 다음에 되어 있다.
탐구의 이론은 고정된 외부적 끝으로서 그 다음에 필수적으로 이 의미에 종속된다. 두 시각 사이에 반대가 기초적이다. 어떤 지식이 그것이 탐구의 완성임으로부터 떨어져 특정하게 설립될 수 있다는, 그리고 지식이 이 연결로부터 떨어져 일반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논리학 이론에서 혼동의 근원의 하나이다. 다른 다양한 실재론에 대하여, 관념론과 이원론은 “지식”이 실재로 인(is) 것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개념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논리학 이론은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선입관에 종속적으로 만들어지고, 그래서 논리학 형식의 해석은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가정과 변화한다.
The position here taken holds that since every special case of knowledge is constituted as the outcome of some special inquiry, the conception of knowledge as such can only be a generalization of the properties discovered to belong to conclusions which are outcomes of inquiry. Knowledge, as an abstract term, is a name for the product of competent inquiries. Apart from this relation, its meaning is so empty that any content or filling may be arbitrarily poured in. The general conception of knowledge, when formulated in terms of the outcome of inquiry, has something important to say regarding the meaning of inquiry itself. For it indicates that inquiry is a continuing process in every field with which it is engaged. The "settlement" of a particular situation by a particular inquiry is no guarantee that that settled conclusion will always remain settled. The attainment of settled beliefs is a progressive matter; there is no belief so settled as not to be exposed to further inquiry. It is the convergent and cumulative effect of continued inquiry that defines knowledge in its general meaning. In scientific inquiry, the criterion of what is taken to be settled, or to be knowledge, is being so settled that it is available as a resource in further inquiry; not being settled in such a way as not to be subject to revision in further inquiry.
여기서 가져가진 입장은 지식의 모든 특별한 경우가 일부 특별한 탐구의 결과로서 구성되기 때문에, 지식의 개념이 그 자체로 탐구의 결과인 결론에 속하는 것으로 발견된 성질의 일반화일 수 있다. 지식은, 추상적 용어로서, 적당한 탐구의 생산을 위한 이름이다. 이 관계로부터 떨어져, 그것의 의미는 너무 비어서 어떤 내용 또는 채움이 임의로 쏟아 부어질지도 모른다. 지식의 일반적 개념은 탐구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형식화되었을 때, 탐구의 의미 그 자체와 관하여 말하는 것에 중요한 어떤 것을 가진다. 그것이 탐구가 그것이 개입된 모든 장에서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특정한 탐구에 의한 특정한 상화의 “정착”(settlement)은 결론을 정착시킨 그것이 언제나 정착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보증하지 않는다. 정착된 믿음의 달성은 진보적인 문제이다; 더 깊은 탐구에 드러나지 않을 만큼 정착된 어떤 믿음도 없다. 그것은 그것의 일반적 의미에서 지식을 정의하는 연속적 탐구의 수렴적이고 누적적인 효과이다. 과학적 탐구에서, 정착되도록이나, 또는 지식이도록 가져가진 것의 비평은, 너무 정착되고 있는 중이어서 그것은 더 깊은 탐구에서 자원으로 이용가능하다; 더 깊은 탐구에서 개정에 종속적이지 않음과 같은 그러한 방식으로 정착되지 않는다.
What has been said helps to explain why the term "warranted assertion" is preferred to the terms belief and knowledge. It is free from the ambiguity of these latter terms, and it involves reference to inquiry as that which warrants assertion. When knowledge is taken as a general abstract term related to inquiry in the abstract, it means "warranted assertibility." The use of a term that designates a potentiality rather than an actuality involves recognition that all special conclusions of special inquiries are parts of an enterprise that is continually renewed, or is a going concern.1)
말해졌던 것이 “보장된 단언”이라는 용어가 믿음과 지식이라는 용어보다 선호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 그것은 이 후자의 용어의 애매성으로부터 자유롭고, 그리고 그것은 단언을 보장하는 그것으로서 탐구하는 언급을 포함한다. 지식이 추상에서 탐구에 관계된 일반적인 추상적 용어로서 가져가질 때, 그것은 “보장된 단언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실성(actuality)보다 차라리 잠재성(potentiality)을 명명하는 용어의 사용은 특별한 탐구의 모든 특별한 결론이 계속적으로 갱신되거나, 또는 가는 관계인 기획의 부분이라는 승인을 포함한다.1)
Up to this point, it may seem as if the criteria that emerge from the processes of continuous inquiry were only descriptive, and in that sense empirical. That they are empirical in one sense of that ambiguous word is undeniable. They have grown out of the experiences of actual inquiry. But they are not empirical in the sense in which "empirical" means devoid of rational standing. Through examination of the relations which exist between means (methods) employed and conclusions attained as their consequence, reasons are discovered why some methods succeed and other methods fail. It is implied in what has been said (as a corollary of the general hypothesis) that rationality is an affair of the relation of means and consequences, not of fixed first principles as ultimate premises or as contents of what the Neo-scholastics call criteriology.
이 관점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마치 연속적인 탐구의 과정으로부터 나온 비평이 단지 기술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경험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그 애매한 단어의 한 의미에서 경험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들은 실제 탐구의 경험으로부터 자랐다. 그러나 그것들은 “경험적”이 이성적 지점을 결여하고 있음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적이지 않다. 채택된 수단들(방법들)과 그것들의 결과로서 달성된 결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시험을 통해서, 이유들은 일부 방법들이 성공하고 그리고 다른 방법들은 실패하는 이유로 발견된다. 그것은 말해진 것에서 (일반적 가정의 추론으로) 합리성이 수단과 결과의 관계의 업무라는 것을, 궁극적 전제로 또는 신-스콜라주의자들이 기준론(criteriology)이라고 부르는 것의 내용으로 고정된 첫째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Reasonableness or rationality is, according to the position here taken, as well as in its ordinary usage, an affair of the relation of means and consequences. In framing ends-in-view, it is unreasonable to set up those which have no connection with available means and without reference to the obstacles standing in the way of attaining the end. It is reasonable to search for and select the means that will, with the maximum probability, yield the consequences which are intended. It is highly unreasonable to employ as means, materials and processes which would be found, if they were examined, to be such that they produce consequences which are different from the intended end; so different that they preclude its attainment. Rationality as an abstract conception is precisely the generalized idea of the means-consequence relation as such. Hence, from this point of view, the descriptive statement of methods that achieve progressively stable beliefs, or warranted assertibility, is also a rational statement in case the relation between them as means and assertibility as consequence is ascertained.
분별 있음 또는 합리성은, 여기서 가져가진 위치에 따라, 원래의 사용에서 뿐만 아니라, 수단과 결과의 관계의 업무이다. 시각에서 끝의 뼈대를 만들며, 끝을 달성하는 방식에 입지하는 장애물에 대한 언급 없이 이용가능한 수단과의 어떤 연결을 가지지 않는 그것들을 설립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최대한의 개연성을 가지고, 의도된 결과를 산출할 수단을 찾고 선택하는 것은 이성적이다. 의도된 결과와 다른 결과를 생산하는 그러한 것으로, 만약 그것들이 시험되지 않았다면, 발견되는 수단, 물질 그리고 과정으로 채택하는 것은 대단히 비합리적이다; 그렇게 다르다 그것들이 그것의 달성을 제외한다. 합리성은 추상적 개념으로서 정밀하게 그 자체로 수단-결과 관계의 일반화된 아이디어이다. 그러므로, 이 시각로부터, 안정된 믿음, 또는 보장된 단언가능성을 진보적으로 성취한 방법의 묘사적 언급는 또한 결과가 확인될 때 수단으로 그것들과 단언가능성 사이의 관계에 대비하여 합리적 언급이다.
Reasonableness or rationality has, however, been hypostatized. One of the oldest and most enduring traditions in logical theory has converted rationality into a faculty which, when it is actualized in perception of first truths, was called reason and later, Intellectus Purns. The idea of reason as the power which intuitively apprehends a priori ultimate first principles persists in logical philosophy. Whether explicitly affirmed or not, it is the ground of every view which holds that scientific method is dependent upon logical forms that are logically prior and external to inquiry. The original ground for this conception of reason has now been destroyed. This ground was the necessity for postulating a faculty that had the power of direct apprehension of "truths" that were axiomatic in the sense of being self-evident, or self-verifying, and self-contained, as the necessary grounds of all demonstrative reasoning. The notion was derived from the subject-matter that had attained the highest scientific formulation at the time the classic logic was formulated; namely, Euclidean geometry.
하지만, 분별 있음 또는 합리성은 실체화되었다. 논리학 이론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지속적인 전통은 합리성을 기능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그것이 첫째 진실의 지각에서 현실화되었을 때, 이유 그리고 나중에 지성 푸루스로(Intellectus Purns) 불렸다. 이유의 아이디어는 힘으로서 직각적으로 선험적인 궁극적 첫째 원리를 염려하는데 논리학적 철학을 고집한다. 명백하게 확언하든 또는 아니든, 그것은 과학적 방식이 논리학적으로 탐구에 앞서고 외부적인 논리학적 형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유지하는 모든 시각의 근거이다. 이유라는 이 개념의 원래 근거는 현재 파괴되었다. 이
근거는 모든 논증적인 추론의 필요한 근거로서, 자기-증거적, 또는 자기-확증적, 그리고 자기포함적이라는 의미에서 공리적인 “진실”의 직접적인이해라는 힘을 가졌던 기능을 가정할 필요성이었다. 그 관념은 고전적 논리학이 형식화된 순간에 가장 높게 과학적 형식화를 달성했던 주체 문제로부터 제거되었다; 즉, 유클리드의 기하학.
This conception of the nature of axioms is no longer held in mathematics nor in the logic of mathematics. Axioms are now held to be postulates, neither true nor false in themselves, and to have their meaning determined by the consequences that follow because of their implicatory relations to one another. The greatest freedom is permitted, or rather encouraged, in laying down postulates - a freedom subject only to the condition that they be rigorously fruitful of implied consequences.
공리의 본성의 이 개념은 수학 또는 수학의 논리학에서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공리는 현재 공준으로, 그것들 자신에서 진실 또는 거짓으로가 아니고, 그리고 또 다른 것에 대한 그것들의 함축적 관계 때문에 따라오는 결과에 의해 결정된 그것들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유지된다. 가장 거대한 자유는 허락되거나, 또는 차라리 고무되었다, 공리 - 그것들의 함축된 결과의 준엄하게 결실이 풍부함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단지 종속적인 자유 – 밑에 놓임으로써.
The same principle holds in physics. Mathematical formulae have now taken the place in physics once occupied by propositions about eternal essences and the fixed species defined by these essences. The formulae are deductively developed by means of rules of implication. But the value of the deduced result for physical science is not determined by the correctness of the deduction.
똑같은 원리가 물리학에서 유지된다. 수학적 공식은 이 본질에 의해 정의된 고정된 종과 영구한 본질에 의해 한때 점령된 물리학에서 자리를 현재 가졌다. 공식은 함축의 규칙의 수단에 의해 연역적으로 발달된다. 그러나 물리 과학에 대한 연역된 결과의 가치는 연역의 수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The deductive conclusion is used to instigate and direct operations of experimental observation. The observable consequences of these operations in their systematic correlation with one another finally determine the scientific worth of the deduced principle. The latter takes its place as a means necessary to obtain the consequence of warranted assertibility. The position here taken, the general hypothesis advanced, is a generalization of the means-consequence relation characteristic of mathematical and physical inquiry. According to it, all logical forms, such as are represented by what has been called proximate logical subject-matter, are instances of a relation between means and consequences in properly controlled inquiry, the word "controlled" in this statement standing for the methods of inquiry that are developed and perfected in the processes of continuous inquiry. In this continuity, the conclusions of any special inquiry are subordinate to use in substantiation and maturation of methods of further in quiry. The general character of knowledge as an abstract term is determined by the nature of the methods used, not vice-versa.
연역적 결론은 실험적 관찰의 작용을 부추기고 지휘하는 데에 쓰인다. 하나의 또 다른 것과 그것들의 체계적 상호 관계에서 이 작용들의 관찰할 수 있는 결과는 마침내 연역된 원리의 과학적 가치를 결정한다. 후자는 보장된 단언가능성의 결과를 획득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그것의 입장을 차지한다. 여기서 가져가진 입장은, 진전된 일반적 가정은,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탐구에 특징적인 수단-결과 관계의 일반화이다. 그것을 따라, 모든 논리학적 형식은, 적절한 논리학 주체 문제라고 불렸던 것에 의해서 그 자체로 재현되고, 적당하게 통제된 탐구에서 수단과 결과 사이 관계의 그리고 계속적인 탐구의 과정에서 발달하고 완벽해지는 탐구의 방법을 나타내는 진술에서 “통제된” 단어의 예이다. 이 계속성에서, 어떤 특정한 탐구의 결론은 탐구에서 더 깊은 방법의 실증과 성숙에서의 사용에 종속된다. 지식의 일반적 특징은 추상적 용어로 사용된 방법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거꾸로가 아니라.
The character of the generalization of the relation of "first principles" and conclusions (in mathematical and physical science) may be illustrated by the meaning of first principles in logic; such as traditionally represented by the principles, say, of identity, contradiction and excluded middle. According to one view, such principles represent ultimate invariant properties of the objects with which methods of inquiry are concerned, and to which inquiry must conform. According to the view here expressed, they represent conditions which have been ascertained during the conduct of continued inquiry to be involved in its own successful pursuit. The two statements may seem to amount to the same thing. Theoretically, there is a radical difference between them. For the second position implies, as has already been stated, that the principles are generated in the very process of control of continued inquiry, while, according to the other view, they are a priori principles fixed antecedently to inquiry and conditioning it ab extra.2)
“첫째 원리”와 결론의 관계의 일반화의 특징은 (수학적이고 물리학적 과학에서) 논리학에서 첫째 원리의 의미에 의해 설명될지도 모른다; 원리에 의해 전통적으로 재현되는 것처럼, 말한다, 정체성의, 모순과 배제된 중간. 한 시각에 따라, 그러한 원리는 탐구의 방법이 관련된, 탐구가 적합한 객체의 궁극적인 침략적 성질을 재현한다. 여기서 표현된 시각에 따라, 그것들은 그 자신의 성공적 수행에 포함된 계속된 탐구의 수행 동안 확인되었던 조건을 재현한다. 두 가지 진술은 똑같은 것에 달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론적으로, 그것들 사이에 급진적 차이가 있다. 둘째 입장이 함축하기 때문에, 이미 언급됐던 대로, 반면에, 다른 시각에 따라, 그것들은 탐구에 앞서 고정되고 그것을 외부로부터 조절하는 선험적 원리이다.2)
Neither the existence nor the indispensability of primary logical principles is, then, denied. The question concerns their origin and use. In what is said upon this matter I follow in the main the account given by Peirce of "guiding" or "leading" principles. According to this view, every inferential conclusion that is drawn involves a habit (either by way of expressing it or initiating it) in the organic sense of habit, since life is impossible without ways of action sufficiently general to be properly named habits. At the outset, the habit that operates in an inference is purely biological, It operates without our being aware of it. We are aware at most of particular acts and particular consequences. Later, we are aware not only of what is done from time to time but of how it is done. Attention to the way of doing is, moreover, indispensable to control of what is done. The craftsman, for example, learns that if he operates in a certain way the result will take care of itself, certain materials being given. In like fashion, we discover that if we draw our inferences in a certain way, we shall, other things being equal, get dependable conclusions. The idea of a method of inquiry arises as an articulate expression of the habit that is involved in a class of inferences.
첫째의 논리학 원리의 존재도 불가결함도 부인되지, 그때, 않는다. 그 질문은 그것들의 기원과 사용을 걱정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해진 것에서 나는 퍼스에 의해 주어진 “안내”와 “지도” 원리의 주요한 기술(記述)을 따른다. 이 시각에 따라, 끌어내진 모든 추론적 결론은 습관의 유기적 의미에서 (그것을 표현하거나 또는 그것을 시작하는 방식 둘 중의 하나에 의해) 습관을 포함한다, 습관이라고 적당하게 이름 지어지게 충분히 일반적인 행동의 방식 없이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초에, 추론에서 작용하는 습관은 순수하게 생물학적이다, 그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알아차림 없이 작용한다. 우리는 특정한 행동과 특정한 결과를 많아야 알아차린다. 나중에, 우리는 단지 때때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행해진 방식을 알아차린다. 게다가, 행함의 방식에 대한 주의는 행해진 것의 통제에 필수불가결하다. 예를 들어, 장인은 만약 그가 특장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결과가 그것 자신을 돌볼 것이라고 배운다, 특정한 물질이 주어지면서 말이다. 패션처럼에서, 우리는 만약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추론을 끌어낸다면, 우리가, 다른 것들이 평등하다면, 신뢰할 수 있는 결론을 얻을 것임을 발견한다. 탐구의 방법의 아이디어는 추론의 계급에 포함된 습관의 분절된 표현으로 일어난다.
Since, moreover, the habits that operate are narrower and wider in scope, the formulations of methods that result from observing them have either restricted or extensive breadth. Peirce illustrates the narrower type of habit by the following case: A person has seen a rotating disk of copper come to rest when it is placed between magnets. He infers that another piece of copper will be have similarly under like conditions. At first such inferences are made without formulation of a principle.3) The disposition that operates is limited in scope. It does not extend beyond pieces of copper. But when it is found that there are habits involved in every inference, in spite of differences of subject-matter, and when these habits are noted and formulated, then the formulations are guiding or leading principles. The principles state habits operative in every inference that tend to yield conclusions that are stable and productive in further inquiries. Being free from connection with any particular subject-matter, they are formal, not material, though they are forms of material that is subjected to authentic inquiry.
게다가, 작용하는 습관이 범위에서 더 좁아지고 더 넓어지므로,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결과하는 방법의 공식은 또한 한정되거나 또는 광대한 폭을 가진다. 퍼스는 다음의 경우를 통해 습관의 더 좁은 형태를 설명한다: 한 사람이 그것이 자석 사이에 놓일 때 구리의 회전하는 디스크가 휴식하게 되는 것을 봤다. 그는 구리의 또 다른 조각이 같은 조건 하에서 비슷할 것이라고 추론한다. 처음에 그러한 추론은 원리의 공식 없이 만들어진다.3) 작용하는 배치는 구리에서 제한된다. 그것은 구리의 조각을 넘어서 확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추론에 포함된 습관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 비록 주체 문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습관이 노트되고 형식화될 때, 그때 공식은 안내 또는 지도 원리이다. 원리는 더 깊은 탐구에서 안정적이고 생산적인 결론을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추론에서 작용적인 습관을 언급한다. 어떤 특정한 주체-문제와의 연결로부터 자유롭게, 그들은 공식적이고, 물질적이지 않다, 그것들이 믿을 만한 탐구에 종속된 물질의 형식일지라도.
Validity of the principles is determined by the coherency of the consequences produced by the habits they articulate. If the habit in question is such as generally produces conclusions that are sustained and developed in further inquiry, then it is valid even if in an occasional case it yields a conclusion that turns out invalid. In such cases, the trouble lies in the material dealt with rather than with the habit and general principle. This distinction obviously corresponds to the ordinary distinction between form and matter. But it does not involve the complete separation between them that is often set up in logical theories.
원리의 유효성은 그것들이 분절하는 버릇들에 의해 생산된 결과들의 시종일관성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의문시되는 습관이 일반적인 생산과 같이 더 깊은 탐구에서 유지하고 발전하는 결론이라면, 비록 우연적 경우에 그것이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 결론을 산출한다 할지라도, 그때 그것은 유효하다. 그러한 경우에, 문제는 습관과 일반적 원리와 있다기보다 차라리 이것들을 다루는 물질적인 것에 있다. 이 구별은 형식과 재료 사이의 원래의 구별에 명백하게 대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학 이론에 자주 설립된 그것들 사이의 완벽한 분할을 포함하지 않는다.
Any habit is a way or manner of action, not a particular act or deed. When it is formulated it becomes, as far as it is accepted, a rule, or more generally, a principle or "law" of action. It can hardly be denied that there are habits of inference and that they may be formulated as rules or principles. If there are such habits as are necessary to conduct every successful inferential inquiry, then the formulations that express them will be logical principles if all inquiries. In this statement "successful" means operative in a manner that tends in the long run, or in continuity of inquiry, to yield results that are either confirmed in further inquiry or that are corrected by use of the same procedures. These guiding logical principles are not premises of inference or argument. They are conditions to be satisfied such that knowledge of them provides a principle of direction and of testing. They are formulations of ways of treating subject-matter that have been found to be so determinative of sound conclusions in the past that they are taken to regulate further inquiry until definite grounds are found for questioning them. While they are derived from examination of methods previously used in their connection with the kind of conclusion they have produced, they are operationally a priori with respect to further inquiry.4)
어떤 습관은 방식 또는 행동의 방법이다, 특정한 행동 또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형식화되었을 때 그것은,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한, 규칙이,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원리 또는 행동의 “법칙”이 된다. 추론의 습관들이 있고 그리고 그것들이 규칙 또는 원리로 형식화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거의 부인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습관이 모든 성공적인 추론적 탐구를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과 같은 습관이 있다면, 그때 그것들을 표현하는 형식화는 모든 탐구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적 원리가 될 것이다. 이 진술에서 “성공적”은 오랜 운영에서, 또는 탐구의 지속성에서, 더 깊은 탐구에서 확인된거나 또는 똑같은 절차의 사용에 의해 수정된 결과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방법에서 운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안내적 논리학 원리는 추론 또는 논의의 전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지식이 방향과 시험의 원리를 제공한다고 납득되어야만 하는 조건이다. 그것들은 과거에 논리적으로 옳은 결론에 너무 결정적인 것으로 발견된 주체 문제를 대하는 방식의 형식화이다. 그래서 명확한 근거가 의문시되는 그것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발견될 때까지 더 깊은 탐구를 정규화하는 데로 가져가졌다. 그것들이 생산했던 결론의 종류와 그것들의 연결에서 이전에 사용된 방법의 시험으로부터 그것들이 제거된 반면에, 그것들은 더 깊은 탐구의 측면에서 작용적으로 선험적이다.
In the previous discussion I have made statements whose full force can become clear only in the more detailed development of logical themes in subsequent chapters. The discussion, as was said at the outset, is not intended to justify the position but to clarify its general meaning. In the remaining pages of this Introduction I shall set forth certain implications of the position for the theory of logic.
이전의 토론에서 나는 그것의 충분한 힘이 이어지는 장에서 논리학 테마의 보다 세부적인 발달에서 오직 분명해질 수 있는 진술을 만들었다. 토론은, 최초에 말해졌던 대로,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일반적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다. 이 도입의 남아있는 페이지에서 나는 논리학 이론에 대한 입장의 특정한 함축을 분명히 할 것이다.
1. Logic is a progressive discipline. The reason for this is that logic rests upon analysis of the best methods of inquiry (being judged "best" by their results with respect to continued inquiry) that exist at a given time. As the methods of the sciences improve, corresponding changes take place in logic. An enormous change has taken place in logical theory since the classic logic formulated the methods of the science that existed in its period. It has occurred in consequence of the development of mathematical and physical science. If, however, present theory provided a coherent formulation of existing scientific methods, freed from a doctrine of logical forms inherited from a science that is no longer held, this treatise would have no reason for existence. When in the future methods of inquiry are further changed, logical theory will also change. There is no ground for supposing that logic has been or ever will be so perfected that, save, perhaps, for minor details, it will require no further modification. The idea that logic is capable of final formulation is an eidolon of the theater.
1. 논리학은 진보적인 훈육이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논리학이 주어진 시간에 존재하는 (계속된 탐구에 관해서 그것들의 결과에 의해 최선이라고 판단된) 탐구의 최선의 방법의 분석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방법이 향상될 때, 대응하는 변화가 논리학에서 일어난다. 고전적 논리학이 그것의 시대에 존재했던 과학의 방법을 형식화한 이래로 거대한 변화가 논리학 이론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과학의 발달의 결과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만약 현재의 이론이 존재하는 과학적 방법의 시종일관한 공식을 제공했고,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은 과학으로부터 물려받은 논리학 형식의 교의로부터 자유로웠다면, 이 논문은 존재에 대한 어떤 이유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논리학이 완벽했거나 또는 심지어 완벽할 것이라고, 아마도, 소수적 세부를 제외하고, 그것이 어떤 더 깊은 수정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데 어떤 근거도 있지 않다. 논리학이 최종적 공식의 수용력이 있다는 아니디어는 극장의 우상(eidolon)이다.
2. The subject-matter of logic is determined operationally.5) This thesis is a verbal restatement of what was earlier said. The methods of inquiry are operations performed or to be performed. Logical forms are the conditions that inquiry, qua inquiry, has to meet. Operations, to anticipate, fall into two general types. There are operations that are performed upon and with existential material - as in experimental observation. There are operations performed with and upon symbols. But even in the latter case, "operation" is to be taken in as literal a sense as possible. There are operations like hunting for a lost coin or measuring land, and there are operations like drawing up a balance-sheet. The former is performed upon existential conditions; the latter upon symbols. But the symbols in the latter case stand for possible final existential conditions while the conclusion, when it is stated in symbols, is a pre-condition of further operations that deal with existences. Moreover, the operations involved in making a balance-sheet for
a bank or any other business involve physical activities. The so-called "mental" element in operations of both these kinds has to be defined in terms of existential conditions and consequences, not vice-versa.
2. 논리학의 주체 문제는 작용적으로 결정된다.5) 이 이론은 전에 말해졌던 것의 구두적 재진술이다. 탐구의 방법은 수행되고 수행될 작용이다. 논리학적 형식은 탐구가, 탐구의 자격으로(qua), 만나야 하는 조건이다. 작용은, 예상하기 위해, 두 가지 일반적 형태에로 떨어진다. 존재상의 재료와 함께 그리고 따라서 수행되는 작용이 있다 – 실험적 관찰에서처럼. 상징에 따라 그리고 함께 수행된 작용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조차, “작용”은 가능한 문자적 감각이게 가져가진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헤매는 것 또는 땅을 측정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 있다, 그리고 대차 대조표를 작성하는 것과 같은 작용이 있다. 전자는 존재상의 조건에 따라 수행된다; 후자는 상징에 따라.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 상징은 가능한 최종적 존재상의 조건을 나타내고 반면에 결론은, 그것이 상징에서 언급될 때, 존재를 다루는 더 깊은 작용의 전제-조건이다. 게다가, 은행 또는 어떤 다른 사업에 대한 대차 대조표를 만드는 데에 포함된 작용은 물리적 활동을 포함한다. 두 이 종류의 작용에서 이른바 “정신적” 요소는 존재상의 조건과 결과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거꾸로가 아니라.
Operations involve both material and instrumentalities, including in the latter tools and techniques. The more material and instrumentalities are shaped in advance with a view to their operating in conjunction with each other as means to consequences, the better the operations performed are controlled. Refined steel, which is the matter of the operations by which a watch-spring is formed, is itself the product of a number of preparatory operations executed with reference to getting the material into the state that fits it to be the material of the final operation. The material is thus as instrumental, from an operational point of view, as are the tools and techniques by which it is brought into a required condition. On the other hand, old tools and techniques are modified in order that they may apply more effectively to new materials. The introduction, for example, of the lighter metals demanded different methods of treatment from those to which the heavier metals previously used were subjected. Or, stated from the other side, the development of electrolytic operations made possible the use of new materials as means to new consequences.
작용은 재료와 방편 둘 다를 포함한다, 후자의 도구와 기술을 넘어서. 더 많은 재료와 방편은 결과에 대한 수단으로 서로서로와 함께 그들의 작용에 대한 시각과 함께 미리 형성된다. 수행된 더 좋은 작용은 통제된다. 정련한 철은, 시계-스프링이 그것에 의해 형성되는 작용의 물질인데, 그것을 최종적 작용의 재료이게 조정하는 상태로의 재료를 얻는 데에 대한 언급과 함께 실행된 다수의 예비 작용의 그 자체로 생산물이다. 재료는 따라서 그것이 그것에 의해 요구된 조건으로 가져와지는 도구와 기술인 것만큼, 시각의 작용적 지점으로부터, 기구적이다. 다른 한편, 오래된 도구와 기술은 그것들이 더 많이 효율적으로 새로운 재료에 적용될지도 모르게 수정된다. 예를 들어, 더 가벼운 금속의 도입은 이전에 쓰였던 더 무거운 금속이 맡겨졌던 그것들과 다른 처리의 방법을 요구했다. 또는,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기분해 작용의 발달은 새로운 재료의 사용을 새로운 결과에 대한 수단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The illustration is drawn from the operations of industrial arts. But the principle holds of operations of inquiry. The latter also proceed by shaping on one hand subject-matter so that it lends itself to the application of conceptions as mode s of operation; and, on the other hand, by development of such conceptual structures as are applicable to existential conditions. Since, as in the arts, both movements take place in strict correspondence with each other, the conceptions employed are to be understood as directly operational, while the existential material, in the degree in which the conditions of inquiry are satisfied, is determined both by operations and with an eye to operations still to be executed.
실례는 산업 기술의 작용으로부터 끌어내진다. 그러나 원칙은 탐구의 작용을 유지한다. 후자는 한편의 주체 문제에 따라 형성됨으로써 또한 나아가고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를 작용의 양식으로 개념의 적용에 빌려 준다; 그리고, 다른 한편, 그러한 개념적 구조가 발달로써 존재상의 조건에 적용가능한 만큼. 기술에서 그런 것처럼, 두 가지 운동이 서로서로의 엄격한 대응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사용된 개념은 직접적으로 작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반면에 존재상의 재료는, 탐구의 조건이 만족되는 정도에서, 작용에 의해 그리고 여전히 실행된 작용에 대한 눈과 함께 결정된다.
3. Logical forms are postulational. Inquiry in order to be inquiry in the complete sense has to satisfy certain demands that are capable of formal statement. According to the view that makes a basic difference between logic and methodology, the requirements in question subsist prior to and independent of inquiry. Upon that view, they are final in themselves, not intrinsically postulational. This conception of them is the ultimate ground of the idea that they are completely and inherently a priori and are disclosed to a faculty called pure reason. The position here taken holds that they are intrinsically postulates of and for inquiry, being formulations of conditions, discovered in the course of inquiry itself, which further inquiries must satisfy if they are to yield warranted assertibility as a consequence.
3. 논리학 형식은 공리적(postulational)이다. 탐구는 완벽한 의미에서 탐구이기 위해 형식적 진술의 능력이 있는 확실한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논리학과 방법론 사이의 기초적 차이를 만드는 시각에 따라, 의문시되는 요구는 탐구에 앞서 그리고 탐구와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그 시각에 따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최종적이다, 본질적으로 공리적이지는 않다. 그것들의 이 개념은 그것들이 완벽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선험적이고 순수한 이성이라고 불리는 기능에 드러내져 있다는 아이디어의 궁극적 근거이다. 여기서 가져가진 그 입장은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조건의 형식화이면서, 그 자체로 탐구의 과정에서 발견된, 만약 그것들이 보장된 단언가능성을 결과로서 산출한다면 더 깊은 탐구가 만족시켜야 하는 탐구의 그리고 탐구에 대한 공리임을 유지한다.
Stated in terms of the means-consequence relation, they are a generalization of the nature of the means that must be employed if assertibility is to be attained as an end. Certain demands have to be met by the operations that occur in the arts. A bridge is to be built to span a river under given conditions, so that the bridge, as the consequence of the operations, will sustain certain loads. There are local conditions set by the state of the banks, etc. But there are general conditions of distance, weights, stresses and strains, changes of temperature, etc. These are formal conditions. As such they are demands, requirements, postulates, to be fulfilled.
수단-결과 관계의 관점에서 언급된다면, 그것들은 만약 단언가능성이 끝으로 달성된다면 사용되어야 하는 수단의 본성의 일반화이다. 확실한 요구는 기술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의해 만족되어야 한다. 다리는 주어진 조건 하에서 강에 다리가 놓이도록 건설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리는, 작용의 결과로, 확실한 짐을 유지한다. 둑의 상태에 의해 놓인 지역적 조건이 있다, 등. 이것들은 형식적 조건이다. 그 자체로 그것들은 요구, 요구물, 공리이고, 이행되어야 한다.
A postulate is also a stipulation. To engage in an inquiry is like entering into a contract. It commits the inquirer to observance of certain conditions. A stipulation is a statement of conditions that are agreed to in the conduct of some affair. The stipulations involved are at first implicit in the undertaking of inquiry. As they are formally acknowledged (formulated), they become logical forms of various degrees of generality. They make definite what is involved in a demand. Every demand is a request, but not every request is a postulate. For a postulate involves the assumption of responsibilities. The responsibilities that are assumed are stated in stipulations. They involve readiness to act in certain specified ways. On this account, postulates are not arbitrarily chosen. They present claims to be met in the sense in which a claim presents a title or has authority to receive due consideration.
공리는 또한 약속이다. 탐구에의 관련은 계약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탐구자에게 확실한 조건의 관찰에 대해 탐구자에게 위임한다. 약속은 어떤 일의 수행에서 동의된 조건의 진술이다. 약속은 탐구의 의무에 처음으로 명백하게 관련된다. 그것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기 (형식화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일반성의 다양한 정도의 논리학 형식이 된다. 그것들은 요구에 포함된 것을 명확하게 만든다. 모든 요구는 요청이다, 그러나 모든 요청이 공리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리는 책임의 가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정된 책임은 약속에서 진술된다. 그것들은 확실한 자세히 말해진 방식으로 행동하는 준비를 포함한다. 이런 기술에 따라, 공리는 임의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요구가 제목을 재현하거나 마땅한 고려를 받을 권위를 가지는 의미에서 만족되는 요구를 재현한다.
In engaging in transactions, human beings are not at first aware of the responsibilities that are implicit; for laws, in the legal sense, are explicit statements of what was previously only implicit in customs: namely, formal recognition of duties and rights that were practically involved in acceptance of the customs. One of the highly generalized demands to be met in inquiry is the following: "If anything has a certain property, and whatever has this property has a certain other property, then the thing in question has this certain other property." This logical "law" is a stipulation. If you are going to inquire in a way which meets the requirements of inquiry, you must proceed in a way which observes this rule, just as when you make a business contract there are certain conditions to be fulfilled.
처리와 관련하여, 인간 존재는 명백한 책임을 처음으로 깨닫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칙은, 법률적 의미에서, 이전에 관습에서 오직 명백했던 것의 명백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즉, 실제적으로 포함된 의미와 권리의 공식적 인식은 관습의 수용에 관련된다. 탐구에서 만족되는 매우 일반화된 요구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것이 특정한 성질을 가진다면, 그리고 이 성질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든지 특정한 다른 성징을 가진다면, 그때 의문시되는 것은 이 특정한 다른 성질을 가진다.” 이 논리학 “법칙은” 약속이다. 만약 당신이 탐구의 요구물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탐구를 할 거라면, 당신은 이 규칙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나야가야 한다, 꼭 당신이 사업 계약을 할 때 이행되는 특정한 조건이 있는 것처럼.
A postulate is thus neither arbitrary nor externally a priori. It is not the former because it issue s from the relation of means to the end to be reached. It is not the latter, because it is not imposed upon inquiry from without, but is an acknowledgement of that to which the undertaking of inquiry commits us. It is empirically and temporally a priori in the same sense in which the law of contracts is a rule regulating in advance the making of certain kinds of business engagements. While it is derived from what is involved in inquiries that have been successful in the past, it imposes a condition to be satisfied in future inquiries, until the results of such inquiries show reason for modifying it.
공리는 따라서 임의적이지도 외부적으로 선험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전자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도달된 끝에 대한 수단의 관계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후자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탐구에 편승되지 않고, 그러나 탐구의 수행이 우리에게 위임하는 그것의 인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약의 법칙이 특정한 종류의 사업 계약을 미리 규제하는 법칙인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경험적이고 일시적으로 선험적이다. 그것이 과거에 성공적이었던 탐구에 포함된 것으로부터 제거되는 동안, 그러한 탐구의 결과가 그것을 수정하는 데 대한 이유를 보여줄 때까지, 그것은 미래의 탐구에서 만족될 조건을 부과한다.
Terming logical forms postulates is, thus, on the negative side, a way of calling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y are not given and imposed from without. Just as the postulates of, say, geometry are not self-evident first truths that are externally imposed premises but are formulations of the conditions that have to be satisfied in procedures that deal with a certain subject-matter, so with logical forms which hold for every inquiry. In a contract, the agreement involved is that between the consequences of the activities of two or more parties with respect to some specified affair. In inquiry, the agreement is between the consequences of a series of inquiries. But inquiry as such is not carried on by one person rather than another. When any one person engages in it, he is committed, in as far as his inquiry is genuinely such and not an insincere bluff, to stand by the results of similar inquiries by whomever conducted. "Similar" in this phrase means inquiries that submit to the same conditions or postulates.
따라서, 논리학 형식을 공리하고 이름 짓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것들이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부과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주의를 부른다. 꼭 기하학의 공리가 전제에 외부적으로 부과된 자기-증거적 첫 번째 진실이 아니고 어떤 주체 문제를 다루는 절차에서 만족되어야 하는 조건의 형식화인 것처럼 말하듯이, 모든 탐구에 포함되는 논리학 형식을 가지고 그런다. 계약에서 포함된 동의는 어떤 세부적인 일에 대한 존경을 가지고 둘 또는 그 이상의 부분의 활동의 결과들 사이의 그것이다. 탐구에서, 동의는 일연의 탐구의 결과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탐구는 또 다른 하나보다 한 사람에 의해 그 자체로 수행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종사할 때, 그는 위임되고, 그의 탐구가 진짜로 그러하고 그리고 불성실한 허세가 아닌 한에서, 누구에 의해 수행된 비슷한 탐구의 결과에 의해 지원된다. 이 구절에서 “비슷한”은 같은 조건 또는 공리에 등록된 탐구를 의미한다.
The postulational character of logical theory requires, accordingly, the most complete and explicit formulation that is attainable of not only the subject-matter that is taken as evidential in a given inference, but also of general conditions, stated in the rules and principles of inference and discourse. A distinction of matter and form is thus instituted. But it is one in which subject-matter and form correspond strictly to each other. Hence, once more, postulates are not arbitrary or mere linguistic conventions. They must be such as control the determination and arrangement of subject-matter with respect to achieving enduringly stable beliefs. Only after inquiry has proceeded for a considerable time and has hit upon warrant methods that work successfully, is it possible to extract the postulates that are involved. They are not presuppositions at large. They are abstract in the sense that they are derived from analytic survey of the relations between methods as means and conclusions as consequences - a principle that exemplifies the meaning of rationality.
따라서, 논리학 이론의 공리적 특징은 주어진 추리에서 증거적으로 가져가진 주체 문제뿐만 아니라, 추리와 담화의 규칙과 원리에서 진술된, 일반적 조건 또한의 달성가능한 가장 완벽하고 명백한 형식화를 요구한다. 재료와 형식의 구별은 따라서 설립된다. 그러나 그것은 주체 문제와 형식이 서로서로에게 엄격하게 대응하는 무언가이다. 한번 더, 그러므로 공리는 임의적거나 단지 언어적 풍습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안정적 믿음을 지속적으로 성취하는 것과 관련하여 주체 무제의 배열과 결정을 통제하는 것처럼 그래야 한다. 오직 탐구가 심사숙고의 시간 동안 나아갔던 그리고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보장된 방법을 때렸던 후에, 포함된 공리를 뽑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주로 가정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수단으로서 방법과 결과로서 결론 사이의 관계의 분석적 조사로부터 제거된다는 의미에서 추상이다 - 합리성의 의미를 예시하는 원리.
The postulational nature of logical theory thus agrees with what has been said about logic as progressive and operational. Postulates alter as methods of inquiry are perfected; the logical forms that express modern scientific inquiry are in many respects quite unlike those that formulated the procedures of Greek science. An experimenter in the laboratory who publishes his results states the materials used, the setup of apparatus and the procedures employed. These specifications are limited postulates, demands and stipulations, for any inquirer who wishes to test the conclusion reached. Generalize this performance for procedures of inquiry as such, that is, with respect to the form of every inquiry, and logical forms as postulates are the outcome.
논리학 이론의 공리적 본성은 따라서 진보적이고 작용적으로 논리학에 대하여 말해지는 것에 동의한다. 공리는 탐구의 방법이 완벽할 때 변한다; 근대 과학의 탐구를 표현하는 논리학 형식은 많은 점에서 정말로 그리스의 과학의 절차를 형식화했던 것과 다르다. 그의 결과를 춣판하는 실험실에서의 실험자는 사용된 재료, 장치의 설정 그리고 쓰인 절자를 진술한다. 이 상술(詳述)은 공리, 요구 그리고 가정에 제한된다, 도달된 결론을 시험가리를 바라는 어떤 탐구자에게. 그 자체로 탐구의 절차에 대한 이 수행을 일반화하라, 즉, 공리가 결과일 때 논리적 형식과, 그리고 모든 탐구의 형식과 관련하여.
4. Logic is a naturalistic theory. The term "naturalistic" has many meanings. As it is here employed it means, on one side, that there is no breach of continuity between operations of inquiry and biological operations and physical operations. "Continuity," on the other side, means that rational operations grow out of organic activities, without being identical with that from which they emerge. There is an adjustment of means to consequences in the activities of living creatures, even though not directed by deliberate purpose. Human beings in the ordinary or "natural" processes of living come to make these adjustments purposely, the purpose being limited at first to local situations as they arise. In the course of time (to repeat a principle already set forth) the intent is so generalized that inquiry is freed from limitation to special circumstances. The logic in question is also naturalistic in the sense of the observability, in the ordinary sense of the word, of activities of inquiry. Conceptions derived from a mystical faculty of intuition
or anything that is so occult as not to be open to public inspection and verification (such as the purely psychical for example) are excluded.
4. 논리학은 자연의 이론이다. “자연의”라는 용어는 많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여기서 적용될 때 그것은 의미한다, 한편으로, 탐구의 수행 그리고 생물적 작용 그리고 물리적 작용 사이에 연속성의 파괴가 없다는 것을. “연속성”은, 다른 한편, 합리적 작용이 유기적 활동으로부터 자라난다, 그것들이 나오는 것과 일치함이 없이. 살아있는 창조물의 활동에서 결과에 대한 수단의 조정이 있다, 비록 계획적인 목적에 의해 가리켜지지 않았을지라도. 생명의 원래의 또는 “자연적” 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이 조정을 목적을 갖고 하게 된다, 목적이 그들이 일어날 때 지역적 상황에 처음으로 제한되면서. (이미 말했던 원리를 반복하는) 시간의 과정에서 의도는 너무 일반화되어서 탐구는 제한으로부터 특별한 처지로 자유롭게 된다. 의문시되는 논리학은 관찰가능성의 의미에서, 단어의, 탐구의 활동의 원래 의미에서 또한 자연의이다. 직관의 신비적인 기능으로부터 또는 (순수하게 물리적인 것과 같은 예를 들어) 공적인 검사와 확인에 열리지 않은 만큼 너무 신비로운 어떤 것으로부터 끌어내진 개념은 배제된다.
5. Logic is a social discipline. One ambiguity attending the word "naturalistic" is that it may be understood to involve reduction of human behavior to the behavior of apes, amebae, or electrons and protons. But man is naturally a being that lives in association with others in communities possessing language, and therefore enjoying a transmitted culture. Inquiry is a mode of activity that is socially conditioned and that has cultural consequences. This fact has a narrower and a wider import. Its more limited import is expressed in the connection of logic with symbols. Those who are concerned with "symbolic logic" do not always recognize the need for giving an account of the reference and function of symbols. While the relations of symbols to one another is important, symbols as such must be finally understood in terms of the function which symbolization serves. The fact that all languages (which include much more than speech) consist of symbols, does not of itself settle the nature of symbolism as that is used in inquiry. But, upon any naturalistic basis, it assuredly forms the point of departure for the logical theory of symbols. Any theory of logic has to take some stand on the question whether symbols are ready-made clothing for meanings that subsist independently, or whether they are necessary conditions for the existence of meanings in terms often used, whether language is the dress of "thought" or is something without which "thought" cannot be.
5. 논리학은 사회적 훈육이다. “자연의”라는 단어에 수반한 애매함은 그것이 인간 행위의 원숭이의, 아메바의, 또는 전자와 양성자의 행위로의 축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히 언어를 소유하는, 그리고 그러므로 전해진 문화를 즐기는 공동체에서 다른 이들과의 연합에서 사는 존재이다. 탐구는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지고 그리고 문화적 결과를 가지는 활동의 양식이다. 이 사실은 더 좁고 그리고 더 넓은 취지를 갖는다. 그것의 가장 제한된 취지는 상징과 논리학의 연결에서 표현된다. “상징적 논리학”과 관련된 그것은 상징의 기능과 언급을 설명하는 데 대한 필요를 항상 인정하지는 않는다. 다른 또 하나에 대한 상징의 관계가 중요한 반면에, 상징은 상징화가 역할을 하는 기능의 관점에서 그 자체로 최종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모든 언어는 상징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탐구에서 사용되는 대로 상징주의의 본성을 저절로 자리 잡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자연의 기초에 따라, 그것은 상징의 논리학 이론을 향한 출발의 점을 확실히 형성한다. 논리학의 어떤 이론이 상징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의복인지, 또는 그것들이 자주 쓰이는 조건에서 의미의 존재에 대한 필요한 조건인지, 언어가 “사고”의 옷 또는 “사고”가 그것 없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인지 질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
The wider import is found in the fact that every inquiry grows out of a background of culture and takes effect in greater or less modification of the conditions out of which it arises. Merely physical contacts with physical surroundings occur. But in every interaction that involves intelligent direction, the physical environment is part of a more inclusive social or cultural environment. Just as logical texts usually remark incidentally that reflection grows out of the presence of a problem and then proceed as if this fact had no further interest for the theory of reflection, so they observe that science itself is culturally conditioned and then dismiss the fact from further consideration.6) This wider aspect of the matter is connected with what was termed the narrower. Language in its widest sense that is, including all means of communication such as, for example, monuments, rituals, and formalized arts is the medium in which culture exists and through which it is transmitted. Phenomena that are not recorded cannot be even discussed. Language is the record that perpetuates occurrences and renders them amenable to public consideration. On the other hand, ideas or meanings that exist only in symbols that are not communicable are fantastic beyond imagination. The naturalistic conception of logic, which underlies the position here taken, is thus cultural naturalism. Neither inquiry nor the most abstractly formal set of symbols can escape from the cultural matrix in which they live, move and have their being.
더 넓은 취지는 모든 탐구가 문화의 배경으로부터 자라나고 그것이 일어난 조건의 더 거대한 또는 더 적은 수정에서 주효하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단지 물리적 주위환경과의 물리적 접촉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적인 방향을 포함한 모든 상호작용에서, 물리적 환경은 더 많이 포괄적인 사회적 또는 문화적 환경의 부분이다. 꼭 논리학적 텍스트가 반성이 문제의 존재로부터 자라나고 그리고 그때 마치 이 사실이 반성의 이론에 대해 더 깊은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나아간다고 하는 김에 보통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들은 과학 그 자체가 문화적으로 조건이 되고 그리고 그때 더 깊은 심사숙고로부터 떠나게 한다.6) 문제의 이 더 넓은 양상은 더 좁은 것으로 이름 지어진 것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기념비, 의식, 그리고 형식화된 예술와 같은 소통의 모든 수단을 포함하고 있는 그것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언어는, 문화가 존재하고 그것이 전해지는 매개이다. 기록되지 않은 현상은 토론조차 될 수 없다. 언어는 발생을 영속시키고 그리고 그것들을 공적인 심사숙고에 순종하게 만드는 기록이다. 다른 한편, 소통할 수 없는 상징에만 존재하는 아이디어 또는 의미는 상상을 넘어 환상적이다. 논리학의 자연의 개념은, 여기서 가져가진 입장의 밑에 놓이는데, 따라서 문화적 자연주의이다. 탐구도 가장 추상적으로 형식적인 상징 세트도 그것들이 살고, 움직이도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갖는 문화적 매트릭스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6. Logic is autonomous. The position taken implies the ultimacy of inquiry in determination of the formal conditions of inquiry. Logic as inquiry into inquiry is, if you please, a circular process; it does not depend upon anything extraneous to inquiry. The force of this proposition may perhaps be most readily understood by noting what it precludes. It precludes the determination and selection of logical first principles by an a priori intuitional act, even when the intuition in question is said to be that of Intellectus Purus. It precludes resting logic upon metaphysical and epistemological assumptions and pre suppositions. The latter are to be determined, if at all, by means of what is disclosed as the outcome of inquiry; they are not to be shoved under inquiry as its "foundation." On the epistemological side, it precludes, as was noted earlier in another connection, the assumption of a prior ready-made definition of knowledge which determines the character of inquiry. Knowledge is to be defined in terms of inquiry, not vice-versa, both in particular and universally.
6. 논리학은 자율적이다. 가져가진 입장은 탐구의 형식적 조건의 결정에서 탐구의 최후의 상태를 함축한다. 탐구에의 탐구로서 논리학은, 만약 당신이 좋다면, 순환적 과정이다; 그것은 탐구에 외부적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명제의 힘은 그것이 제외하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아마 가장 즉시 이해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선험적인 직관적 행동에 의해 논리학의 첫 번째 원리의 선택과 결정을 제외한다, 의문시되는 직관이 지성 푸루스(Intellectus Purus)의 그것이라고 말해진다. 그것은 남는 논리학을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 가정과 전제조건에 따라 제외한다. 후자는 결정되어야 한다, 만약 어쨌든, 그것이 탐구의 결과로서 드러내진 것의 수단에 의해; 그것들은 그것의 “토대”로서 탐구 하에 밀어지지 않는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제외한다, 또 다른 연결에서 초기에 주목되었던 대로, 탐구의 특징을 결정하는 지식의 이전의 이미 만들어진 규정의 가정을. 지식은 탐구의 관점에서 규정지어져야 한다, 거꾸로가 아니라, 특정하고 보편적으로 둘 다.
The autonomy of logic also precludes the idea that its "foundations" are psychological. It is not necessary to reach conclusions about sensations, sense-data, ideas and thought, or mental faculties generally, as material that preconditions logic. On the contrary, just as the specific meaning of these matters is determined in specific inquiries, so generally their relation to the logic of inquiry is determined by discovering the relation that the subject-matters to which these names are given bear to the effective conduct of inquiry as such. The point may be illustrated by reference to "thought." It would have been possible in the preceding pages to use the term "reflective thought" where the word "inquiry" has been used. But if that word had been used, it is certain that some readers would have supposed that "reflective thought" designated something already sufficiently known so that "inquiry" was equated to a preexisting definition of thought. The opposite view is implied in the position taken. We do not know what meaning is to be assigned to "reflective thought" except in terms of what is discovered by inquiry into inquiry; at least we do not know what it means for the purposes of logic. Personally, I doubt whether there exists anything that may be called thought as a strictly psychical existence. But it is not necessary to go into that question here. For even if there be such a thing, it does not determine the meaning of "thought" for logic.
논리학의 자율은 그것의 “토대가” 심리적이라는 아이디어를 또한 제외한다. 논리학을 전제하는 재료처럼, 감각, 감각-자료, 아이디어 그리고 사고, 또는 정신적 기능에 일반적으로 관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정반대로, 꼭 이 문제들의 세부적인 의미들이 세부적인 탐구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그래서 탐구의 논리학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가 일반적으로 이 이름들이 주어진 주체 문제가 그 자체로 탐구의 효율적인 수행으로 방향을 잡는 관계를 발견함에 의해 결정된다. 그 점은 “사고”에 대한 언급으로 설명될지도 모른다. “탐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던 “반성적 사고”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선행하는 페이지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일부 독자들이 “반성적 사고”가 이미 충분하게 알려져서 “탐구”가 사고의 선재하는 정의와 동등해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확실하다. 정반대의 시각이 가져가진 입장에서 함축된다. 우리는 탐구에의 탐구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는 관점을 제외하고 “반성적 사고”에 할당된 의미인 것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논리학의 목적을 위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엄격하게 물리적 존재로서 사고(思考)로 불릴지도 모르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를 의심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 질문으로 가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러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논리학에 대한 “사고”의 의미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Either the word "thought" has no business at all in logic or else it is a synonym of "inquiry" and its meaning is determined by what we find out about inquiry. The latter would seem to be the reasonable alternative. These statements do not mean that a sound psychology may not be of decided advantage to logical theory. For history demonstrates that unsound psychology has done great damage. But its general relation to logic is found in the light that it, as a branch of inquiry, may throw upon what is involved in inquiry. Its generic relation to logic is similar to that of physics or biology. Specifically, for reasons that will appear in subsequent chapters, its findings stand closer to logical theory than do those of the other sciences. Occasional reference to psychological subject-matter is inevitable in any case; for, as will be shown later, some logical positions that pride themselves upon their complete indifference to psychological considerations in fact rest upon psychological notions that have become so current, so embedded in intellectual tradition, that they are accepted uncritically as if they were self-evident.
“사고”라는 단어도 또한 논리학 또는 그것이 “탐구”의 동의어인 다른 곳에서 어쨌든 관련이 없고 그것의 의미는 우리가 탐구에 관하여 찾아낸 것에 의해 결정된다. 후자는 이성적인 대안으로 보일 것이다. 이 진술은 진정한 심리학이 논리학 이론에 대한 결정된 유리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는 진정하지 않은 심리학이 거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학에 대한 그것의 일반적 관계는 그것이, 탐구의 지류로서, 탐구에 포함된 것에 따라 던질지도 모른다는 계몽에서 발견된다. 논리학에 대한 그것의 속(屬)적 관계는 물리학 또는 생물학의 그것과 비슷하다. 특히, 차후의 장에서 보일 이유들 때문에, 그것의 발견은 다른 과학의 그것에 그런 것보다 논리학 이론에 더 가깝게 선다. 심리학적 주체 문제에 대한 이따금씩의 언급은 어떤 경우에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나중에 보여 질 것처럼, 심리학적 심사숙고에 대해 그들의 완벽한 무관심을 자랑하는 일부 논리학 입장은 사실상 그렇게 통용되었던, 지성적 전통에 그렇게 끼워졌던 심리학적 관념에 안주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무비판적으로 마치 그것들이 자기-증거적인 것처럼 수용된다.
The remaining chapters of Part One are preparatory to the later and more detailed outline of what is implied in the propositions (1) that logical theory is the systematic formulation of controlled inquiry, and (2) that logical forms accrue in and because of control that yields conclusions which are warrantably assemble. Were the general point of view even moderately represented in current theory these chapters would not be needed. In the present state of logical discussion they seem to me to be necessary. Chapters II and III consider the naturalistic background of the theory, one upon its biological side, the other upon the cultural. Chapters IV and V endeavor to state the need and importance of a revision of logical theory in the direction that has been set forth.
1부의 남아있는 장은 (1) 논리학 이론이 통제된 탐구의 체계적 형식화이다, 그리고 (2) 논리학 형식이 보장할 수 있게 모인 결론을 산출한 통제에서 그리고 통제 때문에 생긴다는 명제에 함축된 것의 나중의 그리고 더 많은 세부적인 윤곽의 준비로서이다. 만약 일반적 관점이 현재의 관점에서 적당하게라도 재현된다면 이 장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논리학 토론의 현재 상태에서 그것들은 나에게 필요해 보인다. 2와 3장은 이론의 자연의 근거를 고려한다, 하나는 그것의 생물적 측면에 따라, 다른 하나는 문화적. 4장과 5장은 말해졌던 방향에서 논리학 이론의 개정의 중요성과 필요를 진술하려고 노력한다.
1) C. S. Peirce, after nothing that our scientific propositions are subject to being brought in doubt by the results of further inquiries, adds, "We ought to construct our theories so as to provide for such [later] discoveries ... by leaving room for the modifications that cannot be foreseen but which are pretty sure to prove needful." (Collected Papers, Vol. V., p. 376 n.) The readers who are acquainted with the logical writings of Peirce will note my great indebtedness to him in the general position taken. As far as I am aware, he was the first writer on logic to make inquiry and its methods the primary and ultimate source of logical subject-matter.
1) 씨. 에스. 퍼스(C. S. Peirce)는, 우리의 과학적 명제가 더 깊은 탐구의 결과에 의해 의심하여 가져와지는 데에 종속적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고, 덧붙인다, “우리는 그러한 [후자의] 발견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의 이론을 건설해야한다 ... 예견될 수 없었던 그러나 필요한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정말로 확실한 수정을 향해 방을 떠남에 의해.” (Collected Papers, Vol. V., p. 376 n.) 퍼스의 논리학 저작에 익숙한 독자들은 가져가진 일반적 입장에서 그에 대한 나의 거대한 빚짐을 눈치 챌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논리학에 대하여 탐구와 그것의 방법을 첫째이고 궁극적인 논리학의 주체 문제의 근원으로 만든 첫 번째 지은이이다.
2) This point is discussed in Ch. XVII.
2) 이 점은 17장에서 논의된다.
3) I do not recall that Peirce alludes to Hume's doctrine of habit, or to Mill's "propensity" to generalize. The fact involved seems to be the same. But Peirce connects the fact, as Hume and Mill did not, with basic organic or biological functions instead of leaving habit as an ultimate "mysterious" tie.
3) 나는 퍼스가 흄(Hume)의 습관의 교의에 대해, 또는 밀(Mill)의 일반화하는 “경향”에 대해 언급한 것을 상기하지 않는다. 포함된 사실은 똑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퍼스는 사실을 연결한다, 흄과 밀이 하지 않았던 대로, 궁극적인 “신비스러운” 매듭으로 습관을 떠나는 대신에 가지고 습관을 기초적인 유기적 또는 생물학적 기능을 가지고.
4) As has been indicated, the above account is a free rendering of Peirce. See particularly his Collected Papers, Vol. Ill, pp. 154-68, and Vol. V. pp. 365-370.
4) 가리켜진 것처럼, 위의 기술(記述)은 퍼스의 퍼스의 자유로운 번역이다. 그의 Collected Papers, Vol. Ill, pp. 154-68, and Vol. V. pp. 365-370을 특정하게 보라.
5) The word “operational” is not a substitute for what is designated by the word “instrumental.” It expresses the way in and by which the subject-matter of inquiry is rendered the means to the end of inquiry, the institution of determinate existential situations. As a general term, “instrumental” stands for the relation of means-consequence, as the basic category for interpretation of while logical forms, “operational” stands for the conditions by which subject-matter is (1) rendered fit to serve as means and (2) actually functions as such means in effecting the objective transformation which is the end of inquiry
5) “작용적”이란 단어는 “기구적”(器具的)이라는 단어에 의해 가리켜진 것의 대용물이 아니다. 그것은 탐구의 주체 문제가 탐구의 끝에 대한 수단으로 그것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방식, 한정된 존재상의 상황의 설립을 표현한다. 일반적 용어로서, “기구적”은 수단-결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에 논리학적 형식의 해석에 대한 기초적 범주로서, “작용적”은 주체 문제가 그것에 의해 (1) 수단으로 역할하도록 (2) 탐구의 끝인 객관적 변형에 영향을 주는 데에서 그 자체로 수단으로 실제로 역할하도록 꼭 맞게 만들어지는 조건을 나타낸다.
6) "Not even the physicist is wholly independent of the context of experience provided for him by the society within which he works." Stebbing, A Modern Introduction to Logic, p. 16. If one includes in "society" the community of scientific workers, it would seem as if "even" should be changed to read, "the physicist almost more than anyone else."
6) “물리학자조차 그가 내부에서 일하는 사회에 의해 그에게 제공된 경험의 문맥에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 Stebbing, A Modern Introduction to Logic, p. 16. 만약 누군가 “사회”에서 과학적 노동자의 공동체를 포함한다면, 그것은 마치 읽기 위해 변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른 누군가보다 거의 더 물리학자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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