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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사이기

가끔 자전적, 혹은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보면 다른 곳에도 이런 사람들 있었구나, 그랬구나 하며 고개 주억거리며 우리동네로 달려가게 된다.
우리동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이기'이다.
본명은 알 수 없고,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아주 어렸을 때에도 그는 그저 사이기였고, 내가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30대가 넘은 지금도 그는 사이기이다.
키가 좀 작았고 우리집에서 두부공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감나무가 입구에 있었던 그 집에 할머니(그의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아마 다른 가족이 있었을 텐데..잘 기억은 안난다.)

그는 온동네 어른들 잔심부름을 했는데, 내가 중학교 가기 전까지 그를 보려면 장터 어드메쯤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으면 되었다.
그는 아이들을 비행기를 태워주거나 말이 되어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유치원, 초딩때에도 그는 이미 나이가 20대가 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늘 그는 사이기였다.
약간 지능이 부족했는지 어떤지 우리가 "사이가 놀아도."라고 하면 두말 없이 움직이는 놀이기구가 되었다. 엄마가 말리기 전까지 나도 꽤 그의 놀이기구를 이용했던 것 같은데...

우리 동네 바다가 알려지면서 휴양객이 늘자 그는 그때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같은 것을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팔러 다니기도 했고, 어디서 오토바이를 구해서 핫도그를 담아서 팔러 다니기도 했다.
때마다 그는 하는 일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사춘기가 되고 여고로 진학하면서 사이기란 이름은 내가 궁금해 할 것에서 점점 멀어졌다.

대학 입학 자취를 하다가 집에 돌아온 날, 일부러 솔밭에서 미리 내려 바다를 보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이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그가 여전히 우리 동네에 있었는지, 아니면 외지에 나갔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이기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는 늙어있었다. 머리는 히끗히끗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 몇가닥이 이마와 눈가에 고랑을 파고 있었다. 표정은 어릴 때나 그때나 별로 변함없는 무표정했지만...
난 갑자기 미안했다. 그는 나보다 적어도 스무살은 많았을 텐데 사이기라고 마구 불러댔다는 것이..
그얼굴의 주름에서 그가 힘들게 하루하루 견디고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주친 그를 외면하면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집중했다. 여전히 그를 아저씨라고 부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를 사이기아저씨가 아니라 사이기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 이후 서울에 올라와서 살다가 한번씩 내려가면 2년에 한번 꼴로 그를 만나게 되지만, 똑같이 그를 외면한다. 그는 사이기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가 태워주는 비행기에 실려 우리동네 위로 빙빙 날아가던 그때..그 희열을...
사이기가 이제 좀 편히 살고 있기를..멀리 타향에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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