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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제대로 말 못하지? 진보 3부작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진보 3부작을 인터넷으로 열심히 봤다.
분노하지 않는 내가 이상할 정도였다. 그만큼 언론에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에 대한 뼈에 사무친 배신감과 그에 따른 포기이겠지.
민주노동당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동영상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참고 봤다.
86년 구로동맹파업 이제 2006년이면 20년을 맞이한다. 관련 다큐도 준비중인 것 같던데..

내가 그자리에 없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로 인식하고 여러 평가를 본다고 할 지라도, 내가 있었던 시기에 대해서 빼먹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닌 것에 좀 생각이 많다.
(그러니 80년대부터 달려온 선배들로서는 그 엄청난 시기에 있었던 엄청난 조직들과 사건들이 거의 생략된 그 영상물이 얼마나 기가 찼겠나.)
90년대 중반, 그러니까 민주노동당이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기 전의 당운동에는 진정추가 다가 아니었다. 내 기억속에서는..또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는..기록된 문서속에서도..
민정연..민중정치연합은 그래도 지부가 지역마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작지 않은 세력이었던 것으로 안다. 진정추와 민정연의 통합과정은 지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패배감을 가졌던 것도 어렴풋이..10년 가까이 된 일이니까..

내가 민정연을 기억하는 것은 그때 대학선배가 지부장이었고 제주도 출신 털보아저씨가 같이 상근하고 있었고 꽤나 들락날락한 덕분이다.
(졸업하면 당연히 노동운동, 정치운동에 몸을 던질 것이라 생각했었던 대학생활이었으니까..)
두분을 통해서 울산화학공단의 노동자들을 만났고, 경주지역의 택시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몇몇 동기들과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외부학습을 민정연에서 받았다. 조그만 사무실에 석유난로를 피워놓고 놀다가 학습하고, 지역의 노동자 아저씨들과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던 얘기들이 어렴풋하다. 그때 꼬맹이어서 동지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그 나이 많은 아저씨들한테 그럴 수도 없었다. 흐흐..결국 대학선배에게는 형, 지역의 노동자들이나 털보아저씨한테는 결국 아저씨로...호칭정리를 했다. (그때 들어버린 습관인지 모르겠는데..지금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가끔 나이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말이 별로 없던 털보아저씨가 90년대 말 중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건너건너 들었고, 푸른색 작업복을 두툼하게 걸치고 웃던 수염이 텁수룩한 그얼굴을 기억하며 괜스리 울적해했다. 지금도 그 아저씨 얼굴이 이렇게 선명한데...

이런 기억이 8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얼마나 숱하게 노동자들과 지역의 활동가들 사이에 이어져 왔는지를..말할 수 있는 방송이 있을까? 왜 그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을까? 반드시 힘있는 조직으로 성장하지 않아도, 혹은 세월이 흘러 그것이 실패한 운동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들(혹은 우리)이 관계를 맺으면서 가져갔던 삶의 희망, 패배속에서 한편 패배하지 않는 그 마음의 귀퉁이를 도대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있나?
그것을 제도권 방송에서 말할 수 있을까? 그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흡족할 만큼..동의할 만큼..아니..이해라도 하면 참말로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지..아마..민주노동당이 정권을 잡아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지..흐흐..승리의 관점에서 정리하지 않을까..
뒤안길로 사라진 털보아저씨 같은 사람은 그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껄..아마도..그렇겠지..
기록된 역사란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지만, 참 헛헛한 구석도 많다.
그래도 달리는 기차에는 중립이 없고, 사람들은 레일사이에 구석구석 놓여있는 돌맹이처럼 이름없이 소리없이 또 살아가겠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비가 많이도 온다. 오늘밤 털보아저씨를 생각하며 유일하게 집에 있는 술인 김빠진 소주한잔 마셔야겠다.

(200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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