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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보기도 못하는 추석

추석은 다가오고 뭔가 관련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굴뚝같은데, 맨날 하는 평등한 명절을 보내자고 주장만 하는 것도 좀 동어반복하는 것 같아서. 하릴없이 인터넷을 뒤적거리면서 사전을 뒤져봐도 정확한 명칭에 대한 설명이 없다. 백과사전에서 ‘한가위’를 클릭해서 한참 읽어나갔다. 호남지방에서는 ‘올벼심리’, 연남지방에서 ‘풋바심’이라 하여 나름의 관습이 있군.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 멋진 말이다. 소먹이 놀이, 소싸움, 닭싸움, 거북놀이, 가마싸움 등 농작의 풍년을 충하하는 다양한 놀이라. 이제 그 놀이를 무슨 큰 공연 보듯이 해야하니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음..다음은 뭐야. 어, 어, 어...이런 이거 뭐야.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든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가윗날에는 농사일로 바빴던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 하루를 즐기는데 특히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기는 것을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라 한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이 버금이다’라고 할 정도로 추석을 전후하여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풍습에 반보기, 온보기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친정나들이에 대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봤다. 물론 숨막히는 가부장 사회에서도 반발작용을 막는 숨구멍이 몇 개 있었는데 아마도 그런 것이겠다.

서두가 길었다. 인용한 글을 읽으면서 눈앞에 그림을 그린다. 첩첩 산길, 누런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발걸음이 춤을 춘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어느 마을 주막집에 앉아 말로다 못할 감정에 어머니는 딸의 손만 쓰다듬었을 것이다. 해마다 조금씩 나이들어가는 딸, 조금씩 모습까지 자신을 더 닮아가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에는 대견함이 반, 슬픔이 반. 하루를 다 못채우고 다시 헤어져서 돌아가는 길은 아쉬움도 많아서 눈물이 쏟지만 어머니 보는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없이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종종 걸어간다. 그 모습을 어머니는 돌장승처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계실 것이다.

추석에 관한 생각에 대해 여러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몇가지 차이점들을 발견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의구심을 던지는 한 여성활동가는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명절에는 자신의 집으로 가고 싶다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명절 전후로 친정에 다니러 가긴 하지만, 결국 명절 당일에는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날은 한 개인에게는 더욱더 날 낳아주신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면 안되냐. 뭐 이런 내용이다.

가족을 꾸리고 있는 한 남성활동가의 얘기를 들어보면, 명절이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강조했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 친족, 이웃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는 공동체적인 의미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 평등한 명절 치르기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설날과 추석 번갈아가며 이번에는 친정에서 명절을 보내고, 다음번에는 시댁에서 보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맞지 않겠냐는 것이다.

양쪽이 대립하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 것이 평등한 관계를 기반해야만이 성립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시대에 여성의 친정나들이가 허락이 되었다면, 21세기를 관통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좀더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명절을 맞는 우리(활동가들 전체를 포함해서)의 모습은 그 시대에서 반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남, 여 모두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은 한발짝 나가 있지만 행동은 반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라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술자리에서 한 남성활동가는 이렇게 말하더군..
“남성들이 명절 얘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나역시도. 그 이유는 명절을 평등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알면서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용히 침묵한다. 왜냐하면 활동가라고 하면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서 실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자신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 설날은 어떻게들 보낼 것인가.
여성들이여 당당하게 주장해보자. ‘나, 친정갈래. 당신 같이 갈래? 말래?“
남성들이여 이번에는 꼭 실천해보자. 평등한 명절 보내기, 아내의 가족들과 온전히 명절보내기.


<2002년 추석 즈음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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