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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펌]어김없이 욱신대는 마음의 흉터

어김없이 욱신대는 마음의 흉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하여
 
[여성주의 저널 일다] 최현정
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살아가는 방식이 가지각색이고, 각기 다른 생각과 다양한 감정을 품고 만나고 헤어집니다.
 
한번도 타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 나와 달리 느끼고 달리 행동했다면 이해심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도 나만의 감정에 부대낍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화가 나고, 단절감과 거리감에 막막하고 서먹하며, 때로는 상처를 받아 돌아서기도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깊이 있는 관계를 허용하지 않게 되지요.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 나만 다른 감정을 느낍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그럭저럭 사는 듯 한데, 어둠과 추위가 내게만 드리워진 듯 지독히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들은 마치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집요하고, 새로운 만남은 불가능한 것만 같습니다. 가끔씩 똑같은 감정의 수렁에 빠져 매번 같은 분량의 괴로움이 남고, 어김없이 또 빠지곤 해서 변화에 대한 의지가 무참히 꺾이기도 합니다.
 
낯설지 않은 괴로움이 또 찾아왔구나 싶을 때
 
우리가 서로 다 다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경험과 기억은 우리 각자를 고유하게 만듭니다.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를 통하여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또 그만의 자기가 있겠지요. 우리에게 어떤 고통이 반복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경험과 기억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우리 삶을 결정하는 완고한 지표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기억은 언어적이고 의식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로 더 잘 풀어낼수록, 그 기억은 더 잘 정리된 기억으로 삶 그 자체에 머무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억은 곱게 치대어진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처럼 손에 익어서, 창조적인 삶을 구워낼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기억은 종잡을 수 없는 강한 감정이나 감각이라든지, 습관, 흔한 행동으로 전해지며, 끈적하고 거친 반죽처럼 삶에 달라붙어 불쑥불쑥 우릴 건드립니다. 낯설지 않은 괴로움이 또 찾아왔구나 싶을 때 그 감정을 조심스레 따라가보면, 우린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 잠시 덮어두었던 어떤 기억과 마주하게 됩니다.
 
혼자서 대면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아무렇게나 밀쳐내었던 ‘그 경험’은 왜 사라지지 않는지 원망스럽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묵은 감정은, 예측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나는 충분히 자라 이미 ‘어른’이 되었고 과거는 사라졌을지라도, 묵은 감정은 과거와는 전혀 다를법한 새로운 상황에서조차 똑같은 강도로 느껴집니다.
 
고독. 외로움. 긴장되고 불안정한 마음. 안달함. 창피함. 간섭 받는 느낌. 해꼬지 당하는 느낌. 무시당하는 느낌. 무가치함. 버려진 느낌. 어떤 강한 충동, 또 무엇이 있을까요. 무척 익숙하지만 괴로우며, 주로 또 자주 느껴지는 감정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감정은 아주 오래 전 일이 마음에 새겨진 흔적으로, 훗날 어김없이 욱신대지요. 어쩌면 희미한 흉터로 자연스럽게 남겨질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날 좀 보소’ 하는 것이겠지요.
 
사라지지 않는 기억,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기억(memory)     © 정은 그림
특히나 욱신대는 일련의 상황을 엮어 심리학자들은 ‘갈등영역’이라고 부릅니다. 상황은 모두 달라 보일 수 있지만 신중히 연결해 보면 참으로 비슷한 사건들이어서 “아하” 하게 될 겁니다. 나의 갈등영역을 찾아봅시다. 물론 보기 싫습니다. 덮어두고 외면하고 없던 일로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고 싶지요. 당연하지요. 그렇지만 해볼만한 일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해볼만하다 싶을 때 해보면 됩니다. 혼자 하기 힘들다면 믿을만한 누군가와 함께 해보면 좋겠지요.

 
고통이 느껴지는 상황은 대체로 어떤 경우였는지,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특히나 강하게 욱신대는지요. 어떤 느낌이 퍼지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요.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는지요. 조용히 살펴보면 어슴푸레 어떤 가닥이 잡힙니다. 그 가닥이 바로 갈등영역입니다. 이를 따라 천천히 과거로 거슬러가다 보면, 우리는 과거 아주 작고 어리고 무기력했던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작은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다만 홀로 버텨온 세월 안에서 스스로에게 수많은 꼬리표와 제재를 가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난 무가치해, 난 버림 받을 거야, 나는 그래 마땅해, 나는 속고 있어, 난 이겨야 해, 난 무능해, 난 이기적이야, 난 벌받아야 해, 난 꼭 잘해야 해.’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했습니까.
 
그 말로 인해서 지금 내 앞의 새로운 상황과 관계들을 그저 그대로 볼 수 없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자랐는데도, 어쩐지 자꾸만 작고 어린 나로 변하게 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과거의 고통이 반복될 것만 같은 강한 불안에 겁부터 들어, 담을 쌓고 스스로를 무장하지요. 버려질 것 같아 되려 상처를 주고 떠나버리고, 미움 받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시키고, 무가치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완벽함을 추구해야 했듯 말입니다.
 
어린 나를 감싸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더 자랐으니까…
 
하지만 딱딱한 갑옷으로 나를 무장하거나 담을 쌓고 외면한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해야만 했을지라도,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도망가려 할수록 괴로움은 늘어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감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받아들이며 버텨내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버텨내야 할까요. 만약 갈등영역을 찾아가는 길에 어린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아무도 곁에 없었지, 이제 내가 있다’ 해주십시오. 어린 나에게 ‘그랬냐, 그랬던 거로구나’ 하고 말해주십시오.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담아내 준다’고 얘기합니다. 감정을 감싸 안아주는 거지요. 그를 통해 지금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고통을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예전보다는 더 지혜롭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 나를 보듬고 위로해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더 자랐습니다. 과거는 우리 삶을 바꾸어 놓았지만, 지금 우리 힘은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버티면서 어느덧 훌쩍 자라난 나는 과거에 얼마나 괴로웠는가를 스스로 감싸주고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게 지나면 으레 찾아왔던 괴로움은 서서히 잦아듭니다. 설령 잦아들지 않더라도, 분명 그를 감당할 힘이 커졌을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나는 예전보다 더 능숙하고 기특하며, 고통은 흘러갑니다. 고통은 반드시 흘러갈 것이니, 부여잡거나 없애려 하거나 끊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통제하면 할수록 더 시리게 죄어오는 게 고통이라 합니다. 창피하면 창피한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고통을 살피고 그대로 느끼고, 그럴 만 했다고 나의 마음을 허용해주세요. 그러면 세상이 조금씩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된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 안에 작고 어린 그의 모습이 떠올라 다독여주고 싶을 때도 생기고,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먼저 다독임 받게 된다면 힘이 더 나게 될 테지요.
2008/07/24 [15:12]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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