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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차이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2/05/02 09:46
  • 수정일
    2014/08/19 00:56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여성주의를 접하다 보면 성적 차이라는 표현을 접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성적 차이를 모두 부정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이런 입장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해하기에는 상당한 수월함을 지닌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은 허상이며, 각 개인의 섹슈얼리티만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적 차이를 존중하고 그에 기반을 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당혹스러움을 불러온다. 그 주장은 여성을 비하하거나 특정 성역할에 고정시키지 말 것과 여성(성)만의 특성을 이해할 것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역할을 고정시키지 않으면서도 여성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리가레는 고유한 것(le propre)과 독특함(la singularité)을 구별한다. 고유한 것은 소유물(la propriété), 소유하기(approprier), 고유한 이름[고유 명사](le nom propre) 등과 연결되고, 이 모두는 단일한 하나(un)라는 남근중심적 경제를 이루고 있다. 남근중심적 경제에서 여성의 성기와 섹슈얼리티는 형태의 결핍으로만 사유될 뿐, 그 다중성과 복잡함, 섬세함은 무시된다.

 

고유한 것과 달리, 여성의 자기 향유가 지니는 독특함은 여성이 "자기 쾌락들 중 그 어떤 것도 다른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가능성을, 자신을 다른 특정한 누군가와 동일시하지 않는 가능성을, 절대 단순히 단일한 하나가 되지 않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여성의 향유는 동시에 "타자 안으로의/타자를 통한 자신의 횡단으로 무한정 성장"하게 된다.

 

성적 차이도 고유한 것과 독특함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성적 차이,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섹슈얼리티는 서로 움직일 수 없는 고유함을 지닌 두 개의 견고한 이름이 아니다. 더구나 벽을 쌓아 올려서 어떤 외부의 침입이나 교류를 거부하는 형태도 아니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각자 독특함을 지니는 섹슈얼리티로서 이 독특함은 상대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판단되거나 사유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섹슈얼리티로 모두 동일시되거나, 그 단일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독특함은 다른 독특함과 상호 교류하며 끊임없이 다가설 수 있다. 성적 차이란 여성이 남성적 시각에서 재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며, 남성이 여성을 타자로서 승인하며, 여성이 스스로를 주체로서 확립해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여성과 남성 사이 관계맺음의 양상이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는 남성적 시각에서 욕망하는 것에만 익숙해 있으며 그 한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성역할이란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한 성역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요구에 반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여성으로서 말하기, 여성의 향유에서 나오는 욕망을 파편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생리, 출산이라는 신체적 특성을 권리로서 보장해야 하며, 여성의 말하기/일하기 방식이 기존과 다르다고 그것을 남성적 시각에서 가치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매우 구체적인 사례가 무거운 짐 들기 등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짐을 들어야 할 때 많은 경우 남성들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남성들은 때론 역차별을 호소하며 여성들이 편하게만 지내려고 한다고 불평을 토로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일생상활의 관계맺음에서 남성의 발언권이나 권력이 나오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가 확인된다. 그런 한탄은 실제로 여성도 무거운 짐을 들려고 할 때, 남성들이 직간접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종료된다. 여성이 신체적인 동등함을 주장할 때, 남성들은 막상 불편해한다.

 

훨씬 어려운 문제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같은 무게를 들어야 한다면 여성이 지치게 되고 결국 남성만이 도맡아서 무거운 짐을 드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아까의 도식에 넣어 보자면, 여성에게 가벼운 짐을 들라는 것은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이 되고, 여성에게도 무거운 짐을 들라는 것은 여성성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어떤 모순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는 여성이 무거운 짐을 드느냐 마느냐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 가벼운 짐은 단지 '무거운 짐이 아닌 것'으로서만 사고된다. 여성이 '남성이 아닌 것'으로 사고되는 것처럼. 무거운 짐과 무거운 짐이 아닌 것 사이에서 성적 차이가 들어설 공간은 없다. 무거운 짐과 무거운 짐이 아닌 것은 사실 단 하나의 판단 기준과 단 하나의 판단 주체만을 상정하고 있다. 그 판단 주체는 바로 남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더 섬세한 사고가 요청된다. 예컨대 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두 개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 하나는 여성에게 적합한 짐, 다른 하나는 남성에게 적합한 짐이다. 배분자와 배분방식은 여성과 남성 각자 정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바로 상호 의사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기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게 되고, 이로써 고정된 성역할에 가둬지지 않으면서도 여성성을 얼마간이라도 (되)찾게 된다.

 

결과적으로 무거운 짐이 아닌 것/무거운 짐에서 여성이 드는 짐/남성이 드는 짐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언어와 사고체계가 억압과 차별의 관계맺음을 야기시킨다면, 바로 언어와 사고체계의 (재)발명이야말로 여성주의의 한 핵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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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여성주의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2/04/09 09:08
  • 수정일
    2014/11/07 12:58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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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앞두고 MB/반MB, 나아가 자본/반자본 식의 이분법에 대한 우려가 터져나온다. 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체계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뜬금없을지 몰라도 여성주의를 전면화시켜야만 한다.

우리의 투쟁 목표를 상대의 반대항으로 잡을 때, 즉 상대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할 때, 우리는 하나의 반대항을 산출해내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주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MB가 아닌 것으로서의 반MB를 말하는 주장이 공허한 이유는 거기에 어떤 새로움도 차이도 없기 때문이며 오히려 MB와 그 반사된 거울의 상 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초의 반사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발생한다. 여성은 적극성을 결여한 소극성, 능동성을 결여한... 수동성, 강인함을 결여한 나약함 등을 담지한다. 이는 다름 아니라 남성에서 남성을 부재시킨 것에 불과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 역시 남성의 성적 만족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우리의 일상과 발화 방식에 여성을 등장시킬 때, 그녀는 거의 항상 남성을 기준으로 그려진다. '여자는 무거운 물건을 들지 못한다'에는 '남자에 비해' 들지 못한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으며, '여자는 말이 많다', '여자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뒤따른다.

남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남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고 하지 않고 '말을 잘 한다', '발언권이 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는 누구에 대한 비교로서가 아니라 그 주체 자체의 속성으로서 평가되지 않던가? 여성주의는 바로 '남성이 아닌 것'으로서의 여성을 재구성하자고 주장한다. 오로지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 주체와 파편화된 것만 있는 구도, 즉 이분법의 본질인 독점적 주체를 폭로하고 상호주체성의 윤리를 만들자고 한다. 이 여성주의적 사유 없이는 소위 반~로 표상되는 전선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린 이 이분법적 사고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사고의 지형은 바로 인간이 맺는 최초의 관계에 그 물질성을 두고 있지 않은가? 여성주의가 본연의 투쟁 장소로 삼고 있는 가족과 그 가족에서 연유되는 가부장제/젠더 이데올로기 자체를 봐야 한다. 차이를 사유하고 여성을 주체이자 타자로 불러내는 작업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전제이자 그 자체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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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 - 노트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2/04/09 09:07
  • 수정일
    2014/11/07 12:58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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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은 상품의 가치가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추상적 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원리에 따라 구체적 노동자 A가 30분 동안 일한 것이 상품의 가치에 어느 정도로 응고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이런 작업이 매번 요구되지도 않는다. 법학의 특이점은 일반적 원리, 예를 들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는 배상해야 한다는 원리를 매우 구체적인 사건에까지 적용해야만 한다는 데 있다. 즉 하나의 특정된 행위가 불법행위인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 행위로 인해 손해액이 얼마가 발생했는지까지 정해줘야만 한다.

문제는 법학이 정면으로 드러나는 순간들, 즉 사회적 문제의 초점이 법원으로 향하는 사건들은 대체로 각 당사자 간 갈등이 극에 달한 경우라서 그 사건의 구체성과 법원리의 추상성 사이의 거리가 극...대화될 때라는 점이다. 그 갈등의 양상은 특히 대립되는 관계를 맺는 당사자들 혹은 세력간 충돌이기 쉽다. 반면 법원리의 일반성, 혹은 규범성은 동일한 권리의무의 주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야만 모두에게 똑같이 통용될 수 있는 원리를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법원리와 구체적 갈등으로 나타나는 사건의 만남은 서로에게 비극적으로 다가간다. 법원리는 스스로의 일반성을 부정하는 특별법의 형태로 계속 변화하고 마침내 범용성, 즉 원리의 일반성 자체를 상실한다. 마찬가지로 구체적 갈등은 그것이 관계하는 사회적 구조에서 유리된 채 그 사건 자체로서만 다뤄지는 바람에 원인에 대한 고찰은 없는 증상의 완화에만 그치게 되어 더 큰 갈등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매우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법원리는 그만큼 그 사회의 지배적 원리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인 만큼 본질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게 된다. 반면, 두 번째로 이 법원리들은 결코 그것이 예정했던 전형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자명해보이는 살인사건, 예컨대 이번 수원 살인사건만 하더라도 이주자 문제, 경찰 대응 문제, 젠더 문제라는 매우 갈등적 지점을 담고 있다. 자명해보이지 않는 사건들, 노사갈등, 권한쟁의, 할당제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법학은 자신의 한계를 매우 명확히 해야 한다. 어쩌면 법학은 더 이상 추상성이나 일반성과는 맞지 않는 학문이나 분과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하고 계속 법학 고유의 일반성을 주장할 경우 법학은 오로지 그 보수적 성질만을 반복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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