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하나의 마무리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1/06/02 04:31
  • 수정일
    2014/11/07 12:5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할 말을 잃게 만든 한 편의 글을 봤다. 괜히 봤다. 볼 수록 화가 나서, 그냥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글에 대해서 이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어떤 논쟁에 개입을 하게 되면, 그리고 논쟁 참가자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을 하면, 그 논쟁 자체에 내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나 또한 그 논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번 논쟁에 개입하는 데 있어서, 어느 누구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내지는 무제한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항상 망설임이 있었으며,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나를 부패하지 않게 만들고, 자만하지 않게 만들고, 되도록 오판하지 않게 만들었다.


한편 그 간극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어떤 힘을 지닌다. 무엇보다 그 간극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지만, 그 불안감은 내가 글을 제출하는 행위를 머뭇거리게 만듦과 동시에, 내가 글을 제출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내가 그 불안감을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내기 위해서, 나는 글을 제출해야만 했으며, 바로 거기에서만 나는 자신을 규정할 수 있었다.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논쟁이었고,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잘 모르겠다. 약간의 지적 허영심을 얻었던 것 같은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거의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그것이 어젯밤 11시경에 일어났고, 그것이 최종적인 하나의 마무리였던 것 같다. 확실히 내가 심정적으로 어떤 진영을 옹호하는 것과 이론적으로 어떤 진영을 지지하는 것은 다른 일인데, 어쨌든 그 두 가지를 잠시나마 혼동했고, 하나의 충격 덕분에 거기서 벗어났다.


물론, 어쩌면 나를 버티게 했던 것은 그 혼동이 초래하는 일종의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나로서는 그 환상을 붙잡는 것이 그렇게 과도한 행위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벗어 던져야 할 환상이었다. 다만 그것이 앞당겨진 셈이다.


문제는 여전히 버텨야 한다는 점이다. 나를 붙잡아 주는 그 한 가지가 끊어졌고, 내 정신이 온전히 남아있진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문제는 언제나,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 버티기 위해,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나를 구성하기 위해, 단지 그 뿐, 혹은 그 이상의 이유로 이 글을 제출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법(률)을 그냥 몰라도 괜찮은가?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30 09:11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이성숙의 <한국 성매매 특별방지법에 투영된 페미니스트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논문을 읽고 경악했다. 과연 자칭 여성주의자들은 특정한 법률에 대해 모르면서 그 법률에 대해 서술해도 괜찮은 것인가?


법률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한다는 것은 분명 따분한 일이다. 애초 법률이 쓰인 언어 자체가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법률을 열심히 알아도 별 쓸모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좌파’들이 쉽게 말하듯이, 법률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지배수단이고, 대중을 제재하고 억압하는 장치이니 말이다. 그런데 특정 법률이 어떻게 대중을 억압하며, 어떤 방식으로 국가의 지배수단으로서 작동하는지를 논증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내가 언급할 ‘여성주의자’는 차라리 그 법률을 읽지 않는 것을 택한 듯하다.


소위 ‘성매매 특별법’이라고 부르는 법률은 사실 두 개의 법전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성매매에 대한 처벌법규를 담고 있는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고 다른 하나는 성매매에 대한 행정법규를 담고 있는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다. ‘성매매 특별법’이라고 할 때는 원칙적으로 이 둘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다만 보통 논쟁의 대상이 되는 법률은 처벌법규를 담고 있는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기에 오로지 이 법률만을 가리켜 ‘성매매 특별법’이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은 ‘성매매 특별법’으로 축약되기도 하고 ‘성매매 방지법’으로 축약되기도 한다. 물론 ‘성매매 방지법’이라고 하면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연상하기 쉽지만 실제 담론 지형을 볼 때는 그 축약 역시 처벌법을 지칭하고 있다. ‘성매매 방지법’은 그렇다 치고, ‘성매매 특별법’이라는 축약은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게 되었을까?


법학에서는 어떤 법률이 적용되는 대상이나 행위유형이 얼마나 한정되어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법률을 일반법/특별법으로 분류한다. 이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분류방식이다. 예컨대 모든 거래행위 일반에 적용되는 민법에 대해, 상거래행위 일반에만 적용되는 상법은 특별법이고, 반대로 상법에 대해 민법은 일반법이다. 반면 상거래행위 일반에 적용되는 상법에 대해 상거래행위 중 어음행위에만 적용되는 어음법은 특별법이며, 어음법에 대해 상법은 일반법이다.


한편 민법, 형법 등은 그것에 대비되는 일반법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일반법이라고 한다. 즉 현행 법체계에서 민법, 형법 등은 언제나 일반법인 것이다. 통상적으로 ‘특별법’이라고 할 때는 이 법률들(민법, 형법)에 대해 특별법의 지위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매매 특별법’이란 일반형법에 대해 특별법의 지위에 있는 법률이다. 즉 일반형법이 모든 종류의 범죄 일반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성매매 특별법’은 그 중에서도 특히 성매매와 관련된 행위유형에 대해서 다루는 특별(형)법이 된다. 간혹 ‘성매매 방지특별법’이라는 표현도 쓴다. 이는 ‘성매매 방지법’이라는 축약과 ‘성매매 특별법’이라는 축약 모두를 담아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두 가지 축약을 모두 담아낸다고 할 때도 ‘방지특별법’이라고 해야 그 두 축약의 의미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방지’와 ‘특별’이라는 표지의 표기 순서가 꽤 중요하다.


이 모든 맥락을 숙지할 때, 이성숙이 사용하는 ‘성매매 특별방지법’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까의 일반법/특별법의 분류체계를 생각해보면, 이 용어는 ‘성매매 일반방지법’에 대비되는 법률로서의 ‘성매매 특별방지법’으로 보인다. ‘성매매 방지특별법’이 ‘특별법’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둠으로써 그 법률이 통상적인 의미의 일반법(민법, 형법)에 대해 특별법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뒀다면, ‘성매매 특별방지법’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특별법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특별방지’에 대비되는 ‘일반방지’가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거의 아무도 ‘성매매 특별방지법’이라는 축약 내지 용어를 쓰지 않는 데(DBPIA나 KISS에서 검색되는 논문 중에서 저 용어를 제목에 사용한 사람은 이성숙이 유일하다)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런데 제목에서부터 ‘성매매 특별방지법’에 대해 다루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니 이 논문의 성실함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혹은 이성숙이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법률을 다루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든다.


이성숙이 자신의 논문에서 2004년에 제정된 ‘성매매 특별법’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리고 그 법률과 ‘성매매 특별방지법’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법률을 다루기보다는 성실하지 않은 연구자라는 판단이 가능할 듯하다. 문제는, ‘성매매 특별법’에 대한 연구는 차치하고 그녀가 과연 ‘성매매 특별법’을 한번 읽어보기라도 했는지 인데, 내가 보기에 그녀가 이 법률을 읽어본 적조차 없는 상태에서 해당 논문을 썼다고 해도, 그녀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성숙의 논문에 나오는 표현과, 실제 2004년 제정 당시의 ‘성매매 특별법’을 비교하겠다. 참고로 2004년 당시에는 법률명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이를 준수하겠다. 이성숙의 논문의 순서에 따라 작성하겠다. 우선 ‘성매매 특별법’의 목적 부분이다.


“이 법[성매매 특별법]의 목적은 “성매매 행위의 예방과 성매매 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한 것이다(118)”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1조(목적) 이 법은 성매매•성매매알선등행위 및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근절하고, 성매매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매매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1조(목적) 이 법은 성매매를 방지하고 성매매피해자 및 성을 파는 행위를 한 자의 보호와 자립의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

 

다음은 성매매와 인신매매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성매매방지법[그녀가 자신의 논문에서 제발 축약의 통일성을 지켰으면 좋겠다. 언제는 ‘성매매 특별방지법’이고, 언제는 ‘성매매방지법’이다. 압권은 ‘성특법’이라는 축약인데, 보통 처음부터 그 축약(성특법)을 썼으면 썼지, 축약(성매매 특별방지법)을 또 축약(성특법)하지는 않는다] 주요골자는 “윤락”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성매매로 대체되고, 성매매는 인신매매이며, 성매매 여성은 피해자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118)”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조(정의) 제1항 제3호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라 함은 다음 각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가. 성을 파는 행위 또는 형법 제245조의 규정에 의한 음란행위를 하게 하거나, 성교행위 등 음란한 내용을 표현하는 사진•영상물 등의 촬영대상으로 삼을 목적으로 위계•위력 그 밖에 이에 준하는 방법으로 대상자를 지배•관리하면서 제3자에게 인계하는 행위
나. 가목과 같은 목적으로 청소년보호법 제2조제1호의 규정에 의한 청소년(이하 "청소년"이라 한다),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거나 미약한 자 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중대한 장애가 있는 자나 그를 보호•감독하는 자에게 선불금 등 금품 그 밖의 재산상의 이익을 제공•약속하고 대상자를 지배•관리하면서 제3자에게 인계하는 행위
다. 가목 및 나목의 행위가 행하여지는 것을 알면서 가목과 같은 목적이나 전매를 위하여 대상자를 인계받는 행위
라. 가목 내지 다목의 행위를 위하여 대상자를 모집•이동•은닉하는 행위”


“성매매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조(정의) 제3호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라 함은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 제2조제1항제3호에 규정된 행위를 말한다.”

 

다음은 성매매피해자와 성매매를 한 자의 구별 문제, 그리고 처벌 대상의 문제 부분이다.

 

“남성구매자는 처벌의 대상이 되고, 여성은 피해자로 규정되어 구제와 지원의 대상이 된다(119)”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조(정의) 제1항 제4호 "성매매피해자"라 함은 다음 각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
가. 위계•위력 그 밖에 이에 준하는 방법으로 성매매를 강요당한 자
나. 업무•고용 그 밖의 관계로 인하여 보호 또는 감독하는 자에 의하여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제2조의 규정에 의한 마약•향정신성의약품 또는 대마(이하 "마약등"이라 한다)에 중독되어 성매매를 한 자
다. 청소년,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거나 미약한 자 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중대한 장애가 있는 자로서 성매매를 하도록 알선•유인된 자
라.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를 당한 자”


“성매매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조(정의) 제4호 "성매매피해자"라 함은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 제2조제1항제4호에 규정된 자를 말한다.”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1조 제1항 성매매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마지막으로 성매매의 정의와 관련된 부분이다.

 

“먼저, 성특볍[성매매 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성매매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성적인 착취이다” 따라서 “여성은 희생자 및 피해자”이다(120)”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조(정의) 제1항 제1호 "성매매"라 함은 불특정인을 상대로 금품 그 밖의 재산상의 이익을 수수•약속하고 다음 각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 상대방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가. 성교행위
나. 구강•항문 등 신체의 일부 또는 도구를 이용한 유사성교행위”


“성매매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2004.3.22 기준] 제2조(정의) 제1호 "성매매"라 함은 성매매알선등행위의처벌에관한법률 제2조제1항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말한다.”


도대체 이성숙이 말하는 ‘성매매 특별방지법’과 2004년에 제정된 ‘성매매 특별법’이 같은 법률인가? 다시 의문이다. 적어도 그녀는 5가지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첫째 ‘성매매 특별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둘째 ‘성매매 특별법’에서 성매매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셋째 ‘성매매 특별법’에서 성매매와 인신매매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넷째 ‘성매매 특별법’에서 성매매를 한 자와 성매매피해자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다섯째 ‘성매매 특별법’에서 어떤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그 차이점을 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특별법의 목적 성매매의 정의 인신매매와의 관계 성매매피해자 처벌 대상

이성숙의 이해

성매매 여성 인권 보호 여성에 대한 폭력 성매매=인신매매 성매매 여성=성매매피해자 남성만 처벌
'성매매 특별법' 성매매피해자 인권 보호 성행위에 대한 재산상 이익을 받는 것과 그 상대방이 되는 것 성매매 중에 인신매매가 있을 수 있음 성매매를 한 자 중에서 성매매피해자가 있을 수 있음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처벌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저런 논문을 썼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쉽게 말해서 그녀는 ‘금지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그 논거로 ‘성매매 특별방지법’의 ‘실패’를 들고 있으며, 심지어 ‘성매매 특별방지법’의 ‘실패’가 ““페미니즘과 여성들 사이의 분열을 가져와” 한국여성운동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씩이나 평가하고 있지만, 도대체 그 ‘성매매 특별방지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 논문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침내 여성주의의 위기가?”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23 17:50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제가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인용하거나 언급한다고 그 사람이나 단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여성의 발화


지난 번에 저는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제대로 발화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로서 ‘진보신당 연대회의 강령(2009년 정기당대회 2차 회의에서 채택)’을 들어보겠습니다.

 

강령은 본문 <23.>에서부터 <26.>까지 여성주의와 여성에 대한 당의 입장 및 목표를 설명해줍니다. 여기서 진보신당은 “성적 불평등을 해결하고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연대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공언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성 차별적인 문화를 뿌리 뽑고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데 앞장”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본문의 나머지 영역은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기 용이한 형식으로 작성되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예컨대 본문 <7.>에서 “인권은 모든 사람의 권리”라고 할 때 그 “사람”은 과연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 것일까요? 혹은 본문 <14.>에서 호명되는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를 모두 지칭하는 ‘중립적 언어’일까요? 많은 분들께서 한국어의 저런 명사들이 성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시지만, 과연 우리는 ‘여성 노동자’, ‘여고생’, ‘여선생’, ‘여검사’, ‘여경찰’, ‘여성 소방관’, ‘여배우’, ‘여성 정치인’, ‘여성 CEO’에 대응되는 의미로서의 ‘남성 노동자’, ‘남고생’, ‘남선생’, ‘남검사’, ‘남경찰’, ‘남성 소방관’, ‘남배우’, ‘남성 정치인’, ‘남성 CEO’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던가요? 아니면 그냥 편하게 ‘노동자’, ‘고등학생’, ‘선생’, ‘검사’, ‘경찰’, ‘소방관’, ‘배우’, ‘정치인’, ‘CEO’라는 단어들을 사용하던가요? 예시는 무궁무진합니다. ‘여왕’은 있어도 ‘남왕’은 없고, ‘여군’은 있어도 ‘남군’은 없습니다.

 

이 언어체계에서 여성은 ‘보편적인 남성’에 비해, 혹은 ‘보편적인 남성’과는 달리 항상 특수한 자리, 내지는 자리없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진보신당이 본문 <14.>에서 “노동자”를 호명할 때, 여성은 과연 그 “노동자”가 자신도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령을 ‘여성 강령 하나, 남성 강령 하나’ 해서 두 개라도 만들자는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물론 두 개의 강령을 만든다는 것은 무척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6년에 이탈리아 공산당이 “여성헌장”을 발표한 적이 있으며, 사실은 (근대적 인권의 토대를 쌓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89)”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의 권리와 여성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나온 바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200년 전에 “인간”의 권리가 선언된 후부터, 거의 항상 “여성”의 권리도 “뒤따라” 선언되어 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런 선언들에서 “여성”이 “인간”에 포함되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2. 여성주의의 위기?


여하간 여성은, 아무런 장치 없이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기가 힘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성주의 진영에서는 여성들의 내레이션을 듣고, 그것을 번역(translation)하는 데 일정부분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박가분 씨가 본인의 글[슈리의 글과 논쟁을 읽고서 – 맑스주의의 아포리아]에 덧글을 달며 한 문제제기가 상당히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입니다. “이를테면 집창촌 여성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성주의자들 자신도 모르는 점이 있다”, “그들[성매매 여성들]을 공론의 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데 여성주의자들의 역할이 있는데, 그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의문[이며] 솔직히 말해서 잘 못했”다는 문제제기 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여성주의자들이 성매매 여성들의 발화를 듣고, 번역하는 작업에 실패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주의 이론이 그 발화를 듣고 번역하는 데 더 이상 적합하지 않거나, 그 역시 공백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여성주의의 위기”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간략하게나마 그 문제제기를 검토해보겠습니다.

 

잠시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문제제기에 대한 검토는 약간 다른 맥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이브리님께서 하신 문제제기의 핵심은 “이론가의 윤리”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이론가는 자신이 다루려는 문제에 대해 “최대한 정확히 확인하고”, “성실한 조사”를 한 뒤에 글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가분 씨께서는 여기에 대해 “이 점[성매매 여성들이 공적인 장에 나오기 힘들다는 점]에 대한 고려 없이 근거 없는 판단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려 없이 근거 없는 판단”을 한 행위가 “이론가의 윤리”에 어긋난다는 점도 동의를 하시는지요? 왜냐하면 정작 여기에 대한 대답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박가분 씨께서는 “공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며 여성주의자들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바로 문제의 그 언급을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제기라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검토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 저 부분에 대해 고려를 해야지만 “공정”해지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듭니다. 왜냐하면 이브리님의 문제제기에 따르면 “고려 없이 근거 없는 판단”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그 이론가와 그 이론가가 글을 쓰는 대상의 발화 조건이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 이론가와 다른 이론가와의 관계가 어떻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박가분 씨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고려 없이 근거 없는 판단”을 한 것이 적어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침 박가분 씨의 문제제기를 검토하는 이 과정이, 과연 박가분 씨 본인은 “고려 없이 근거 없는 판단”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성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제기를 다루겠습니다. 박가분 씨의 글에 등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이라는 단어가 약간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성주의에도 많은 입장이 있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 자신도 모르는 점이 있다”라고 말을 할 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여성주의자들이] 잘 못했”다고 할 때 그것이 모든 여성주의적 입장이 전부 다 그렇다는 것인지, 여태까지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여성주의 진영이 실패했다는 것인지에 대한 구분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일단 별다른 단서를 안 붙이신 관계로 전자라고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성매매 특별법)’을 추진했던 여성 관료들이 반드시 여성주의자는 아니라는 점은 일단 지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매매 특별법의 ‘실패’를 ‘성매매 문제에 대한 여성주의의 실패’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합니다.

 

“집창촌 여성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성매매 집결지 여성의 입장이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가분 씨도 이 부분은 인정하셨습니다(“아마 성매매 여성들이 공론장에 나올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저 두 부류[공창제에 반대하는 성매매 여성과 찬성하는 성매매 여성]의 여성들 사이의 간극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다면 애초 “집창촌 여성의 정확한 입장”을 여성주의자들이 과연 알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가능합니다. 물론 “단일한 입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한 입장”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이를 인정하는 경우, 여성주의 진영에서 그 나름대로 “정확한 입장”을 전달하려고 할 때,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이 “단일한 입장”을 지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정확성을 공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번 벌로와 보니 벌로의 『매춘의 역사』처럼 유의미한 정리는 분명히 있어 왔으며, 국내에서도 ‘전국 성노동자연대(이하 전성노련)’나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 등지에서 꾸준히 성매매 여성들의 비교적 “정확한 입장”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나의 예시로, 민성노련이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활동한 경과를 “성노동운동 행동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성노련이나 민성노련 활동가 분들이 박가분 씨가 지칭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론가로 “여성주의자들”을 한정짓더라도 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적어도 이런 ‘다양한 입장’의 공존에 대해 상당히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예컨대 정희진 씨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보더라도, 성매매 여성들의 입장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언급들이 있습니다. 또, 성매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감정적 동요 없이는 읽기 힘든, 성매매 여성들의 수기인 『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만 보아도, 성매매 여성들의 (적어도 일부) 입장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든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 제시를 통해 여성주의자들이 성매매 여성들로 하여금 공론의 장에 나오도록 돕는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박가분 씨의 의문을 어느 정도는 해소시켜 드렸기를 바랍니다. 어쨌거나 여성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수기가 나왔으며, 이것은 성매매 여성들이 공론의 장에 적어도 하나의 경험을 제출한 행위입니다.

 

결국 아직 여성주의자들이 성매매 여성들의 입장을 파악하고, 그녀들의 욕망을 파악하고, 그녀들의 욕망을 전달하는 것을 “잘 못했다”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3. 윤소영 씨의 문제?


추가로, “만일 윤소영이라면 성매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가 거기에 딱히 발언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라고 박가분 씨께서 하셨는데, 이미 현재하는 윤소영 씨의 대답이 있기에 알려드립니다. 출처는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개정판)』, 361에서 363페이지 입니다.

 

“성노동자는 성을 판매하는 여성이 스스로 제기한 개념입니다. 성매매가 더 이상 형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핵심인데, 판매자가 아니라 구매자만 처벌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쟁점이 아닙니다. 대신 성노동자라는 개념은 성매매가 상법이나 노동법 같은 민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래서 성매매도 일반적인 상거래나 노동으로 취급해준다면, 성노동자가 스스로 성매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셈이에요.

 

물론 성노동자라는 개념을 사용한다고 해서 미성년자의 경우나 인신매매의 경우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성노동자가 사기와 협박 같은 강제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빈곤으로 인한 자발적인 성매매가 대부분이라는 주장이에요. 미성년자나 인신매매 같은 비자발적인 성매매가 확산되는 것은 오히려 금지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어쨌든 페미니즘 안에서 상당히 오래된 논쟁이지만, 가정주부는 ‘좋은 여자’이고 성매매여성은 ‘나쁜 여자’라는 어처구니없는 편견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매매여성의 처지가 부인보다 ‘못할 것은 없고 오히려 더 정직하다’(no worse, more honest)는 울스톤크라프트의 주장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 생각으로 아직도 금지론을 주장하는 남한의 얼치기 페미니스트가 심각하게 자기 반성해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뿐더러 윤소영 씨와, 윤소영 씨가 관련된 ‘사회진보연대(이하 사진연)’에서는 단순히 가족임금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그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한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성적 차이의 윤리’라는, 보다 여성주의에 고유한 지점 역시도 꾸준히 언급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2004-2005년도 당시에 사진연에서 성매매 특별법과 관련하여 활발한 논쟁[0718 성매매 회원토론회 자료글]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