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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동해보복, 그리고 여타 문제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21 16:48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그냥 덧글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할 이야기가 더 많아졌고, 어차피 논의를 진행할 것이면 트랙백 형식으로 정리된 것이 낫겠다 싶어가지고, 초비님의 글[또다시 의문들]에 달렸던, 새로운 질문을 포함한 덧글들도 여기에 옮겨 놓겠습니다. 또한, 다행히도 초비님께서 저 글에서 칸트에 대해서 질문을 하셨고, 저도 그 칸트에 대해 할 말이 약간 남아있습니다.

 

저는 지난 글[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에서 슈리님의 글[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푸우님께 응답하며] 중 "서론에서부터 <2.>까지는 제가 논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하며 그 이유로 슈리님께서 저에게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한 칸트의 동해보복설에 대해 슈리님께서 "도대체 칸트의 저작들 중 어디서 저런 구절들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끌어내시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칸트 독해에 비추어 볼 때, 푸우님의 주장은 섬뜩할 정도로 터무니없습니다."라고 말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슈리님께 더 자세한 설명을 요청할 일이 아니라, 제가 문헌적 근거를 제시해야 제대로 해결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꾸준히 문헌적 근거를 찾아보았습니다. 몇 가지 유의미한 발견을 했지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의 '형벌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나 형법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칸트에 관한 이야기는, 칸트에 대한 1차 독서가 아닌 관계로 만족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참에 드디어 칸트의 『윤리형이상학』에서 관련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윤리형이상학』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윤리형이상학 정초』랑 헷갈리지 않길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헷갈려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습니다) 영어본으로 대체하려고 했으나, 그것을 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아 일단은 인터넷에 올려진 『윤리형이상학』의 영어본의 주소를 링크해 드리겠습니다.

 

Kant on Punishment

 

"Hence it may be said: "If you slander another, you slander yourself; if you steal from another, you steal from yourself; if you strike another, you strike yourself; if you kill another, you kill yourself." This is the right of retaliation (jus talionis); and, properly understood, it is the only principle which in regulating a public court, as distinguished from mere private judgement, can definitely assign both the quality and the quantity of a just penalty."

 

저 위의 구절을 해석하면 jus talionis, 그러니까 탈리오 법칙, 그러니까 동해보복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한 형벌이라고 칸트가 주장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섬뜩"함을 느끼지 마시기 바라고, 혹여나 미래에도 누군가가 슈리님에게 칸트의 동해보복설을 언급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번만 더 말하자면, 그래서 성매매를 "슈리님의 칸트주의적 방식"으로 분석하면 조금 난감해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초비님의 글에 달린 덧글들을 붙여놓겠습니다.

 

 

 

초비:

티스토리 아이디가 없는 관계로 여기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슈리님은 푸우님의 문제제기를 전혀 듣지 않은 채로 문제를 이상하게 봉합하려고 하고 계십니다. 푸우님의 두 번째 글은 가부장제 폐지야 말로 자본주의 폐지 투쟁이며 노동계급 투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투쟁이라는 글을 인용하고 계신데요. 즉 여성주의-젠더영역, 특수성/ 마르크스주의-경제영역, 보편성이라는 도식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죠.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경제 영역의 문제이며 여성을 경제적 계급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여성주의와 무관한 마르크스주의 맥락이란,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한 여성주의와 마찬가지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성해방 없는 보편해방이라는게 애초에 논리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가능하지가 않다고요. 푸우님도 글 첫머리부터 보편성과 특수성을 중요한 논점이라고 쓰고 계신데, 슈리님은 여기에 대한 답변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운동 내의 성폭력 문제 같은 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주의가 필요하니까 여성주의와 맑스주의를 '같이' 말해보자, 공산주의 운동이 흥하면 "특수"한 영역들의 해방이 잘 이루어 지지만, "특정" 정체성을 가진 사회 구성원 지위향상은 보편해방과 직결이 안되니까 계급문제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여성주의 '뿐 만' 아니라 공산주의적 가치'도' 추구하신다면" (거기다가 바디우를 인용할 정도로 급진적이면?) 현실적 사안에 의견이 갈릴 일 없으니까 괜찮다, 라고 대답하시는 건데, 님 글로 판단해 보면 여성주의/마르크스주의를 여전히 별개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초비:

푸우님은 여성주의자는 공산주의자고 공산주의자는 여성주의자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슈리님의 글은 제가 보기에는 전혀 푸우님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바디우든 지젝이든 주판치치든 누굴 인용하든 간에 핵심적인 논지가 서로 갈리는데요. 물론 여성주의는 그냥 젠더 문제라고 생각하는 좌파도 운동권 성폭력 문제 덮어두자는 주장에는 같이 반발할 수 있죠. 근데 개별사안에서 연대할 수 있으면 이론적 기반 따위 그냥 퉁치고 넘어가도 되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면 애초에 첫 글은 왜 쓰신 건지 전 모르겠습니다.

 

 

푸우:

저도 슈리님의 글에 반응을 하고 싶었는데 트랙백을 보내기는 애매하고, 티스토리 아이디가 없어서 덧글은 달 수 없어서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초비님께서 이런 공간을 마련해 주셔서 더 추가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선 저도 초비님께서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듣고 싶습니다.

 

추가적인 질문도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슈리님이 운동권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슈리님이 운동권 내 성폭력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시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정말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슈리님이 "자본주의 타도가 제일 원칙"이라는 전략을 취소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최소한 수정이라도 하시고 싶은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혹은 아예 "자본주의 타도가 제일 원칙"이라는 전략이 그런 운동권 내 성폭력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분명히 그 전략과 운동권 내 성폭력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인데, 슈리님께서는 마치 본인은 애초부터 거기에 반대하므로 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셔서 저에게 상당한 무안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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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19 12:30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응답[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푸우님께 응답하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론에서부터 <2.>까지는 제가 논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슈리님께서 ‘애매’한 용어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예컨대 저는 ‘예지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배우는 입장에서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요청한다고 슈리님께서 그러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제가 보기에는 아주 중요한 논점은 아니니(저의 첫 글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제가 파악하는 논점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입니다) 바로 <3.>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 여성주의와 무관한 마르크스주의 논쟁은 가능한가?

 

본격적으로 <3.>의 논점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일종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슈리님만을 수신자로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논쟁을 보는 사람들 중에 이 논쟁이 여성주의와는 거의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물론적 여성주의가, “여성 해방 없이는 노동자 해방도 없다!”고 주장한 이래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적인 글을 제출하고 나서 이것이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발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유물론적 여성주의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유물론적 여성주의는, 자본주의에서의 여성노동(여기서의 노동은 엄밀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임노동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이 현저히 저평가, 내지는 애초 평가조차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 노동의 재생산과 새로운 노동의 생산비용을 거의 모두 여성노동에 떠맡김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마음대로 증식할 수 있는 것1”이라고 판단합니다. 중간의 논리를 생략하자면 “가부장제 폐지 투쟁은 자본주의 폐지 투쟁의 전제이며 노동계급 투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투쟁,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투쟁, 코뮌을 형성하는 투쟁2”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주의자들”이야말로 오늘날의 (그녀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공산주의자들”3”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한 “왜 여성주의와 무관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성주의와 연결시키느냐?”는 항변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주장, “성매매에 대한 ‘순수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하고, “노동자 계급만이 혁명의 핵심적인 세력”이라는 그 주장이야말로 여성주의와 첨예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들(물론 여기에도 미묘한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 해방을 노동자 해방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던가요?)이야말로 유물론적 여성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발언들입니다. 그래서 이 주장들이 여성주의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지니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제일 과제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이제 <3.>의 쟁점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원글[문제의 글에 덧붙임]에서는 “특수한 요구들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젠더와 관련된 특수한 요구도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다고 했고, 슈리님은 최근의 응답에서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더욱 높은 진리를 확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간의]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입장이 변하신 건지, 원래 이런 입장이었는데 그것이 원글에서는 제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지금 슈리님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가 진리 확립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한다고 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한편 슈리님께는 마르크스주의가 이 선의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일단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갈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일 과제”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이것이 순수하게 이론적인 발언인지, 전략적인 발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어떠한 이론적인 증명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하나의 전략적인 발언으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적인 발언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아시는지요?

 

그러니까, “노동을 위해서는 여성주의에 대해 일단 침묵하자”는 저 발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현실을 가져오는지 아시는지요? 맞습니다, 저는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 사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2000년의 KBS 노조 간부 성폭력 사건에서부터 2009년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거쳐오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가 전혀 보이지 않나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에게 “고소는 하지 말아달라”라고 말하는 운동진영을 전략적으로까지 정당화해야겠습니까?

 

슈리님은 본인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여성주의를 ‘배려’한다고, 그리고 여성주의는 “세계를 이해하는 담론의 일종으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순간,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이 발생하여, 이것이 여성주의적으로 공론화되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타격’이 갈 것으로 예상되는 순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제일 과제”라는 전략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줍니까?

 

하나 분명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서야 말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한 ‘타격’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 문제의식 말입니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발화를 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 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상상은 불가능한 것인가요?

 

 

3. 여성이 겪는 불편함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정 여성의 불편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어떤 여성들이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하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여성이 공장 노동자이든 성매매 여성이든 가정주부이든, 가부장제가 존속되는 한 느낄 수 밖에 없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제대로 발화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불편함,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이 저 주체에게 전달되지 않음으로 인해 느껴야 하는 불편함,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여성이라는 그 이유 자체에 대해 절망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실 불편함은 너무 약한 단어입니다. 여성은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버리는데, 그것이 단지 불편하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소외 현상을 구조화된 폭력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윤리적인 판단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판단이야말로 개별적인 상황에 충실한 공산주의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겨지는 실재, 그것에 연관된 “권리들”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노골적인 반-공산주의4”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 동의하겠지만, 칸트의 ‘자유주의적’ 도덕관에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저 물음이 또 새롭게 들릴지도 모르니 일단 적어놓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여성에 대한 구조화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제가 지지하는 입장은 성적 차이의 여성주의이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윤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기 위해 뤼스 이리가레를 인용하겠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한다면, 남성은 아직까지 자신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성적 욕망의 문화와 차이 속의 공존의 문화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감성과 지성, 육체 또는 감정과 시민적[문명화된]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사랑을 다시 사고하고 가족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 문제다.5

 

“그/녀를 타자로 인정하기 위해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아마 가장 유용하고 아름다운 과제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들뿐만 아니라, 인종들, 세대들, 전통들 사이의 관계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6

 

그리고, 비록 알랭 바디우와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적 대립은 선명하지만 “사랑을 다시 사고”하는 지점에 있어서 마주하는 부분이 있기에, 특히 그것이 어떻게 정치(경제)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바디우의 구절이 있기에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반동세력이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떤 형식 속에서건, 아주 갑작스레 등장하는 정체성에 관련된 주제입니다. 주제가 정체성의 논리로 일관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차이를 위해 우리는 이러한 논리의 경향, 그것의 비사회적인 차원과 야만적이고도 경우에 따라 폭력적이기도 한 면면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안전을 주장하고, 안전하려는 모든 행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런 “사랑”을 폭로할 것입니다. 법을 위반하고 법에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사랑을 보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요구되는 임무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사랑에서 차이를 의심하는 대신 차이를 신뢰하고 믿을 것입니다. 반동은 언제나 동일성의 이름으로 차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반동의 일반적인 철학적 좌우명입니다.

 

(중략)

 

차이를 만들어내고, 고유하며, 반복을 전혀 동반하지 않고서, 고정되지 않고 낯선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반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숭배와 대립시켜야만 합니다. 저는 1982년 『주체 이론』(Théorie du sujet)에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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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blog.jinbo.net/ljydialogue/322, 곰탱이.텍스트로 돌아가기
  2. 같은 곳.텍스트로 돌아가기
  3. http://www.ciepfc.fr/spip.php?article202, Etienne Balibar "Et je dirai ceci : une des réponses possibles (non la seule, certainement), c’est que « les communistes » sont aujourd’hui « des féministes » (qu’elles se désignent ainsi ou non), parce que les féministes apportent un supplément de politique démocratique et révolutionnaire au communisme historique : un supplément dont il ne croyait pas avoir besoin, parce qu’il se croyait autosuffisant (ou se pensait comme une « totalisation » du « mouvement réel qui abolit l’état de choses existant »), mais sans lequel il ne saurait plus se reconstituer (bien que peut-être, désormais, ce soit lui qui, dans telle ou telle conjoncture, ait à se considérer comme composante ou élément d’une nouvelle politique, et non pas comme sa figure d’unité)."텍스트로 돌아가기
  4. Alain Badiou, L’éthique: essai sur la conscience du mal, Nous 2009, p. 7.텍스트로 돌아가기
  5. 뤼스 이리가레,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성적 차이의 윤리」, 도서출판 공감 2003, 이미경 초역 윤소영 교열, p. 64.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같은 책, p. 66.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 조재룡 옮김, pp. 107-108.텍스트로 돌아가기

여성주의의 보편성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18 11:19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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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을 쓰시고 또 한 편의 글[문제의 글에 덧붙임]을 쓰셨습니다. 두 번째 글 덕분에 하나의 쟁점이 명확해졌다고 보는데, 그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라는 쟁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쟁점이기에 슈리님이 성매매를 소재로 삼은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슈리님이 성매매 여성과의 연대를 거부한 것이 아니며, 그녀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린 것도 아닌데 독자들이 단순한 오해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애매한 글쓰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슈리님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전적으로 변명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서술 등을 하실 때 특히 그렇습니다. 일단 이것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의 판단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별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두 경우 모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어떠한 행동을 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이지 그것을 인용부호로 처리한 다음 ‘전적으로 변명할 수는 없다’는 또다시 애매한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그 말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하다면 도대체 왜 그 바로 위에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을 하시는 건지요?


내지는,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즉 그 자체는 가능하더라도 근본적인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 ‘어쩔 수 없음’ 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전적인 변명이 될 수 없다고 하고자 했다면, 이 문장에 내재된 모순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던가요? 슈리님은 “X라는 행위를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를 하나의 예시로 들어주시는데, ‘어쩔 수 없음’은 바로 ‘죽을 수조차 없음’을 포괄하는 표현이라는 것은 왜 그리도 쉽게 간과하시는 것인지요?


이미 슈리님의 글이 내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있으면서 왜 특수성이야말로 거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시는지요? 만약 슈리님의 명제들이 모두 참이라면, 보편적인 해방을 위한 밑그림은 이미 아포리아에 다다른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저 표현 역시 슈리님의 불찰로 인한 불명료함일 뿐이라면, “양해”는 그만 구하시고, 명료한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거듭된 수정을 거치심이 어떠한지요? 슈리님에게는,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이 글을 제출했어야 했더라도, 여전히 근본적인 자유가 있으니 말입니다.

 


1. 성노동의 문제


슈리님은 결코 성매매 여성들과의 연대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매매를 ‘보편적인’ 문제로 보려는 여성주의와는 필시 거리를 두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요구들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주의도 그런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을 수 있지만, 그것은 가변적이므로 “그 자체로 판단할 사안”이 아닌 것, 즉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되어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것으로 치환되어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여성주의는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슈리님은 왜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님을 굳이 증명해내셔야 할까요? 그러니까, 성매매가 임노동이라서 이것이 보편적인 해방과 관련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실 슈리님의 글의 논리구조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임노동이 아니라는 쪽의 증명이 필요할까요? 선의로 해석한다면 슈리님은 성매매가 임노동일 가능성과, 임노동이 아닐 가능성 모두를 고려한 뒤에, 면밀한 논증 결과 그것이 임노동이 아니라고 판명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선언’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고를 전환하자면, 오늘날 좌파 진영에서 누가 ‘다른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여성주의자들보다 그 누가 더 투철하게 좌파 진영에서 ‘다른 보편성’의 사고를 요청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보편적인 해방’을 수호하기 위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해야 하는 좌파 내의 진영은 여성주의자들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성주의자들을 반박하는 것에 대해, 성매매가 결코 보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진리의 장소’일 수 없다는 충격적인 스캔들을 폭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슈리님의 글은 좌파인 독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성매매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서술하는, 내지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성매매가 설령 여성의 문제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 증명된다면 슈리님의 논증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매매는 당연히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매매는 여성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특수한 문제일 뿐 보편적 해방과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큰 일관성이 있지 않은가요?

 


2. 성과 도덕의 문제


더욱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첫 번째 글의 <2. 성과 도덕>이 슈리님의 논증에 있어서 도대체 왜 필요한가 입니다. 슈리님은 단지 성매매가 노동자 계급의 문제가 아닌 특수한 문제인 것만을 지적하시면 되는데 왜 굳이 그것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증명’하셔서 그토록 글의 맥락을 흐리는 것입니까? 그것도 제대로 된 증명을 하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된 증명인지의 문제에 대해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칸트주의적 답변이 이론적으로, 맥락적으로 맞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성을 파는 쪽 역시,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하기 때문에 악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다(?).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 “위와 같은 칸트주의적 답변은 올바”르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추론을 하기 때문에 성매매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겠지요.


왜 성매매는 부도덕한 것인가요? 참고로 슈리님은 칸트주의적 답변을 기각하고 나신 후 두 번째 글에서 칸트의 철학적 혁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고 합니다. 어쩌자는 것인지요?


여하튼 계속하겠습니다. 성매매가 부도덕한 것은 일단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애매함을 좀 더 밀고 나가” 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근친상간의 금기를 제시하시면서 이 근거 없음이 “인간 사회의 토대이며 실체”라고 하십니다. 근친상간이 금기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습니다. 과연 성매매가 금기인가요?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이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A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할 것입니다. 반면 A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사실 여기서 고려할 것은, A가 성을 구매한 남성이냐, 성을 판매한 여성이냐에 따라서 그 사회적 판단이 달라진다는 지점이겠지만, 이것이 칸트주의적으로 어떻게 해명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츄리님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그것은 금기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근친상간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데도 금기이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금기와 법적 금지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는 없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근거 없이 성매매를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요? 혹은 슈리님의 지나친 말장난 때문에 오해가 생겼다고 치고, 칸트주의적 답변이 옳고, 그것으로부터 성매매의 부도덕함을 추론할 수 있다고 해봅시다. 칸트주의적 답변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우리는 부도덕한 행동을 한 사람을 계속 하나의 인격체로서, 하나의 목적으로서 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다 지도록 해야 합니다. 칸트는 부도덕한 자에게 그 책임을 다하게 하기 위해 동해보복의 제재를 주장했으니, 우리는 “자기의 자유로운 인격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한 것에 대한 동해보복을 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성매매 여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그냥 다시 성매매를 하면 결국 동해보복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관은 성매매에 대해 유효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슈리님은 칸트의 철학적 혁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여기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든지, 성매매가 금기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인류학적 연구를 행함이 어떠한지요? 왜냐하면 근친상간이 금기라면, 그것과 성매매 사이에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즉 완전히 새로운 연구가 필요합니다.

 


3. 여성주의의 문제


슈리님의 두 글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주장은, 노동자 계급의 관점만이 유일한 보편성을 무조건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여성주의자로서,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자로서 이것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슈리님이 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만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지 성실하게 논증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왜 노동자 계급의 문제만이 “진리의 자리”를 독점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증 말입니다. 그러니까 슈리님은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논증은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공백’이 있는 한, 슈리님에 대한 반박은 개연적으로 자의적인 추측을 수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개연성을 용납하실 수 없다면, 부디 성실한 논증을 선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저는 자의적인 추측의 개연성이라는 위험을 떠안고 글을 계속 전개할 테니, 이 자의적일 수 있는 해석이 너무 불쾌하실 것 같다면, 이 글에 대한 독서를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안전한 반박을 위해서, 슈리님이 어째서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되었을 때만이 보편성이 획득되는지에 대한 논증을 추측하기보다는, 그것만 가지고는 보편성이 온전히 달성될 수 없음에 대해 간단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저는 박가분 씨의 <페미니즘의 변용과 성차의 진리>를 적극 인용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더 분명해진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고전적 철학과 정치적 담론이 견지했던 반여성주의적 제스처를 결코 긍정할 수 없다. 우리에게 유용한 참조가 되었던 라캉 역시 예외가 아니다. (중략) 그런데 버틀러가 라캉의 반-여성주의를 논박하면서도 그녀 역시 "여성적 주체"의 고유한 도덕적 가능성에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본연의 주체성을 다양한 수행적 제스처 안에서 상상적으로 해소함으로써 상징적 억압의 여성적 판본을 제출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급진적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본연의 해방 정치의 모든 차원이 폐색에 이른 지금 남성주체와 여성주체가 "마주할 수 있는" 본연의 보편적인 기획을 사고해야 한다."


보편적인 기획 안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관점의 반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주체와 여성주체가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도래(=노동자 계급의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의 달성?)가 이를 보장할까요? 분명 “공명”하지만 이것은 여성주체와 남성주체가 마주할 수 있는, 자본주의보다 나은 조건에 불과합니다. 이 여성과 남성 주체의 “연정어린 조우(amorous encounter)”의 과정 안에서 산출 될 수 있는 진리-사건의 신화적 원형은 “만남”(=사랑)인데 사랑은 분명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와는 어울리지 못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이것에 대해 “이 양자의 차이를 말하자면, 정치에서는 우리가 적이라는 물음에 완전히 직면하게 되는 데 견주어 사랑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보편적인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 달성해야 할 여성주체와 남성주체의 마주할 수 있음은 그 공명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있으며 이 여성주체와 남성주체의 마주침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젠더의 문제로서, 바로 여기에 보편적 기획을 완수하기 위한 여성주의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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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길 출판사 2010 조재룡 옮김, 72p.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