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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5/19 12:30
  • 수정일
    2015/05/06 18:4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응답[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푸우님께 응답하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론에서부터 <2.>까지는 제가 논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슈리님께서 ‘애매’한 용어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예컨대 저는 ‘예지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배우는 입장에서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요청한다고 슈리님께서 그러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제가 보기에는 아주 중요한 논점은 아니니(저의 첫 글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제가 파악하는 논점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입니다) 바로 <3.>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 여성주의와 무관한 마르크스주의 논쟁은 가능한가?

 

본격적으로 <3.>의 논점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일종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슈리님만을 수신자로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논쟁을 보는 사람들 중에 이 논쟁이 여성주의와는 거의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물론적 여성주의가, “여성 해방 없이는 노동자 해방도 없다!”고 주장한 이래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적인 글을 제출하고 나서 이것이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발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유물론적 여성주의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유물론적 여성주의는, 자본주의에서의 여성노동(여기서의 노동은 엄밀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임노동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이 현저히 저평가, 내지는 애초 평가조차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 노동의 재생산과 새로운 노동의 생산비용을 거의 모두 여성노동에 떠맡김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마음대로 증식할 수 있는 것1”이라고 판단합니다. 중간의 논리를 생략하자면 “가부장제 폐지 투쟁은 자본주의 폐지 투쟁의 전제이며 노동계급 투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투쟁,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투쟁, 코뮌을 형성하는 투쟁2”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주의자들”이야말로 오늘날의 (그녀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공산주의자들”3”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한 “왜 여성주의와 무관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성주의와 연결시키느냐?”는 항변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주장, “성매매에 대한 ‘순수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하고, “노동자 계급만이 혁명의 핵심적인 세력”이라는 그 주장이야말로 여성주의와 첨예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들(물론 여기에도 미묘한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 해방을 노동자 해방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던가요?)이야말로 유물론적 여성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발언들입니다. 그래서 이 주장들이 여성주의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지니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제일 과제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이제 <3.>의 쟁점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원글[문제의 글에 덧붙임]에서는 “특수한 요구들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젠더와 관련된 특수한 요구도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다고 했고, 슈리님은 최근의 응답에서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더욱 높은 진리를 확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간의]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입장이 변하신 건지, 원래 이런 입장이었는데 그것이 원글에서는 제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지금 슈리님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가 진리 확립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한다고 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한편 슈리님께는 마르크스주의가 이 선의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일단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갈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일 과제”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이것이 순수하게 이론적인 발언인지, 전략적인 발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어떠한 이론적인 증명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하나의 전략적인 발언으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적인 발언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아시는지요?

 

그러니까, “노동을 위해서는 여성주의에 대해 일단 침묵하자”는 저 발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현실을 가져오는지 아시는지요? 맞습니다, 저는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 사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2000년의 KBS 노조 간부 성폭력 사건에서부터 2009년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거쳐오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가 전혀 보이지 않나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에게 “고소는 하지 말아달라”라고 말하는 운동진영을 전략적으로까지 정당화해야겠습니까?

 

슈리님은 본인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여성주의를 ‘배려’한다고, 그리고 여성주의는 “세계를 이해하는 담론의 일종으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순간,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이 발생하여, 이것이 여성주의적으로 공론화되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타격’이 갈 것으로 예상되는 순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제일 과제”라는 전략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줍니까?

 

하나 분명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서야 말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한 ‘타격’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 문제의식 말입니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발화를 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 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상상은 불가능한 것인가요?

 

 

3. 여성이 겪는 불편함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정 여성의 불편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어떤 여성들이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하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여성이 공장 노동자이든 성매매 여성이든 가정주부이든, 가부장제가 존속되는 한 느낄 수 밖에 없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제대로 발화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불편함,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이 저 주체에게 전달되지 않음으로 인해 느껴야 하는 불편함,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여성이라는 그 이유 자체에 대해 절망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실 불편함은 너무 약한 단어입니다. 여성은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버리는데, 그것이 단지 불편하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소외 현상을 구조화된 폭력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윤리적인 판단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판단이야말로 개별적인 상황에 충실한 공산주의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겨지는 실재, 그것에 연관된 “권리들”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노골적인 반-공산주의4”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 동의하겠지만, 칸트의 ‘자유주의적’ 도덕관에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저 물음이 또 새롭게 들릴지도 모르니 일단 적어놓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여성에 대한 구조화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제가 지지하는 입장은 성적 차이의 여성주의이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윤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기 위해 뤼스 이리가레를 인용하겠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한다면, 남성은 아직까지 자신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성적 욕망의 문화와 차이 속의 공존의 문화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감성과 지성, 육체 또는 감정과 시민적[문명화된]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사랑을 다시 사고하고 가족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 문제다.5

 

“그/녀를 타자로 인정하기 위해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아마 가장 유용하고 아름다운 과제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들뿐만 아니라, 인종들, 세대들, 전통들 사이의 관계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6

 

그리고, 비록 알랭 바디우와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적 대립은 선명하지만 “사랑을 다시 사고”하는 지점에 있어서 마주하는 부분이 있기에, 특히 그것이 어떻게 정치(경제)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바디우의 구절이 있기에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반동세력이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떤 형식 속에서건, 아주 갑작스레 등장하는 정체성에 관련된 주제입니다. 주제가 정체성의 논리로 일관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차이를 위해 우리는 이러한 논리의 경향, 그것의 비사회적인 차원과 야만적이고도 경우에 따라 폭력적이기도 한 면면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안전을 주장하고, 안전하려는 모든 행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런 “사랑”을 폭로할 것입니다. 법을 위반하고 법에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사랑을 보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요구되는 임무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사랑에서 차이를 의심하는 대신 차이를 신뢰하고 믿을 것입니다. 반동은 언제나 동일성의 이름으로 차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반동의 일반적인 철학적 좌우명입니다.

 

(중략)

 

차이를 만들어내고, 고유하며, 반복을 전혀 동반하지 않고서, 고정되지 않고 낯선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반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숭배와 대립시켜야만 합니다. 저는 1982년 『주체 이론』(Théorie du sujet)에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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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blog.jinbo.net/ljydialogue/322, 곰탱이.텍스트로 돌아가기
  2. 같은 곳.텍스트로 돌아가기
  3. http://www.ciepfc.fr/spip.php?article202, Etienne Balibar "Et je dirai ceci : une des réponses possibles (non la seule, certainement), c’est que « les communistes » sont aujourd’hui « des féministes » (qu’elles se désignent ainsi ou non), parce que les féministes apportent un supplément de politique démocratique et révolutionnaire au communisme historique : un supplément dont il ne croyait pas avoir besoin, parce qu’il se croyait autosuffisant (ou se pensait comme une « totalisation » du « mouvement réel qui abolit l’état de choses existant »), mais sans lequel il ne saurait plus se reconstituer (bien que peut-être, désormais, ce soit lui qui, dans telle ou telle conjoncture, ait à se considérer comme composante ou élément d’une nouvelle politique, et non pas comme sa figure d’unité)."텍스트로 돌아가기
  4. Alain Badiou, L’éthique: essai sur la conscience du mal, Nous 2009, p. 7.텍스트로 돌아가기
  5. 뤼스 이리가레,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성적 차이의 윤리」, 도서출판 공감 2003, 이미경 초역 윤소영 교열, p. 64.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같은 책, p. 66.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 조재룡 옮김, pp. 107-108.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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