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응답[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푸우님께 응답하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론에서부터 <2.>까지는 제가 논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슈리님께서 ‘애매’한 용어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예컨대 저는 ‘예지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배우는 입장에서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요청한다고 슈리님께서 그러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제가 보기에는 아주 중요한 논점은 아니니(저의 첫 글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제가 파악하는 논점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입니다) 바로 <3.>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 여성주의와 무관한 마르크스주의 논쟁은 가능한가?
본격적으로 <3.>의 논점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일종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슈리님만을 수신자로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논쟁을 보는 사람들 중에 이 논쟁이 여성주의와는 거의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물론적 여성주의가, “여성 해방 없이는 노동자 해방도 없다!”고 주장한 이래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적인 글을 제출하고 나서 이것이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발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유물론적 여성주의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유물론적 여성주의는, 자본주의에서의 여성노동(여기서의 노동은 엄밀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임노동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이 현저히 저평가, 내지는 애초 평가조차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 노동의 재생산과 새로운 노동의 생산비용을 거의 모두 여성노동에 떠맡김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마음대로 증식할 수 있는 것1”이라고 판단합니다. 중간의 논리를 생략하자면 “가부장제 폐지 투쟁은 자본주의 폐지 투쟁의 전제이며 노동계급 투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투쟁,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투쟁, 코뮌을 형성하는 투쟁2”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주의자들”이야말로 오늘날의 (그녀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공산주의자들”3”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한 “왜 여성주의와 무관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성주의와 연결시키느냐?”는 항변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주장, “성매매에 대한 ‘순수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하고, “노동자 계급만이 혁명의 핵심적인 세력”이라는 그 주장이야말로 여성주의와 첨예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들(물론 여기에도 미묘한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 해방을 노동자 해방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던가요?)이야말로 유물론적 여성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발언들입니다. 그래서 이 주장들이 여성주의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지니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여성주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제일 과제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이제 <3.>의 쟁점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원글[문제의 글에 덧붙임]에서는 “특수한 요구들이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된 경우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젠더와 관련된 특수한 요구도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요구와 맞닿아 있다고 했고, 슈리님은 최근의 응답에서 이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더욱 높은 진리를 확립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간의] 선의의 경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입장이 변하신 건지, 원래 이런 입장이었는데 그것이 원글에서는 제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지금 슈리님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가 진리 확립을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한다고 이 둘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한편 슈리님께는 마르크스주의가 이 선의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일단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갈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일 과제”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이것이 순수하게 이론적인 발언인지, 전략적인 발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어떠한 이론적인 증명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하나의 전략적인 발언으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적인 발언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아시는지요?
그러니까, “노동을 위해서는 여성주의에 대해 일단 침묵하자”는 저 발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현실을 가져오는지 아시는지요? 맞습니다, 저는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 사건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2000년의 KBS 노조 간부 성폭력 사건에서부터 2009년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거쳐오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가 전혀 보이지 않나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가 발족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에게 “고소는 하지 말아달라”라고 말하는 운동진영을 전략적으로까지 정당화해야겠습니까?
슈리님은 본인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여성주의를 ‘배려’한다고, 그리고 여성주의는 “세계를 이해하는 담론의 일종으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순간,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이 발생하여, 이것이 여성주의적으로 공론화되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타격’이 갈 것으로 예상되는 순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제일 과제”라는 전략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줍니까?
하나 분명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서야 말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운동진영에서의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대한 ‘타격’이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 문제의식 말입니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발화를 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 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상상은 불가능한 것인가요?
3. 여성이 겪는 불편함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정 여성의 불편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어떤 여성들이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소의 불쾌감과 위험을 감수하고 성이라는 상품을 팔기로” 하는 현상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여성이 공장 노동자이든 성매매 여성이든 가정주부이든, 가부장제가 존속되는 한 느낄 수 밖에 없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 여성이 자신의 언어로 제대로 발화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불편함,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이 저 주체에게 전달되지 않음으로 인해 느껴야 하는 불편함,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여성이라는 그 이유 자체에 대해 절망하게 되는 불편함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실 불편함은 너무 약한 단어입니다. 여성은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버리는데, 그것이 단지 불편하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소외 현상을 구조화된 폭력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으로 윤리적인 판단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판단이야말로 개별적인 상황에 충실한 공산주의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겨지는 실재, 그것에 연관된 “권리들”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노골적인 반-공산주의4”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기에 동의하겠지만, 칸트의 ‘자유주의적’ 도덕관에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저 물음이 또 새롭게 들릴지도 모르니 일단 적어놓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여성에 대한 구조화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제가 지지하는 입장은 성적 차이의 여성주의이며, 이로부터 도출되는 윤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기 위해 뤼스 이리가레를 인용하겠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한다면, 남성은 아직까지 자신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성적 욕망의 문화와 차이 속의 공존의 문화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감성과 지성, 육체 또는 감정과 시민적[문명화된] 존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사랑을 다시 사고하고 가족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 문제다.5”
“그/녀를 타자로 인정하기 위해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아마 가장 유용하고 아름다운 과제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들뿐만 아니라, 인종들, 세대들, 전통들 사이의 관계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6”
그리고, 비록 알랭 바디우와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적 대립은 선명하지만 “사랑을 다시 사고”하는 지점에 있어서 마주하는 부분이 있기에, 특히 그것이 어떻게 정치(경제)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바디우의 구절이 있기에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반동세력이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떤 형식 속에서건, 아주 갑작스레 등장하는 정체성에 관련된 주제입니다. 주제가 정체성의 논리로 일관될 때, 사랑은 필연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차이를 위해 우리는 이러한 논리의 경향, 그것의 비사회적인 차원과 야만적이고도 경우에 따라 폭력적이기도 한 면면에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안전을 주장하고, 안전하려는 모든 행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런 “사랑”을 폭로할 것입니다. 법을 위반하고 법에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사랑을 보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요구되는 임무입니다. 최소한, 우리는 사랑에서 차이를 의심하는 대신 차이를 신뢰하고 믿을 것입니다. 반동은 언제나 동일성의 이름으로 차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반동의 일반적인 철학적 좌우명입니다.
(중략)
차이를 만들어내고, 고유하며, 반복을 전혀 동반하지 않고서, 고정되지 않고 낯선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반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숭배와 대립시켜야만 합니다. 저는 1982년 『주체 이론』(Théorie du sujet)에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7”
댓글 목록
비밀방문자
관리 메뉴
본문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푸우
관리 메뉴
본문
에고 뭘요 ㅠㅠ 저는 오히려 퇴보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구멍
관리 메뉴
본문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 푸우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푸우
관리 메뉴
본문
앗 감사합니다! ㅎㅎ곰탱이
관리 메뉴
본문
저도 푸우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성주의 없는 맑스주의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푸우
관리 메뉴
본문
맞습니다, 여성주의 없는 마르크스주의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곰탱이님의 글 덕분에 이 글을 쓰는 게 훨씬 수월했습니다. 감사합니다.정말 궁금해서
관리 메뉴
본문
그런데 맑스주의 없는 여성주의는 생각할 수 있나요?푸우
관리 메뉴
본문
그 역시 생각할 수 없습니다.reverie
관리 메뉴
본문
맑스주의가 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주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여성도 주체성을 상실했습니다.reverie
관리 메뉴
본문
제가 잠시 코멘트를 해도 될까요. 푸우님의 글에 대해 전체적인 비평이 아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오히려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주장, “성매매에 대한 ‘순수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하고, “노동자 계급만이 혁명의 핵심적인 세력”이라는 그 주장이야말로 여성주의와 첨예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맑스주의자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EM님이 블로그를 통해 "성매매 또는 성노동의 경제학적 이해"라는 글을 쓰셨죠. 성이라는 상품은 당연히 정치경제학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거죠. 그런데 과학은 하나의 규정성하고만 관계해요. 이를테면 라깡처럼 사랑이나 욕망에 대해서 사고를 하는거죠. 그래서 라깡이 사랑이나 욕망에 대해서 쓴 글을 읽으면 일정하게 사랑이나 욕망이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하지만 라깡의 이론으로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죠. 규정성들은 굉장히 많고, 사회는 그런 수많은 규정성들이 접합된 효과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한가지 대상에 대해 탐구하는 학자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해요.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폐해가 있다면 맑스는 과학이다, 곧 진리다 그래서 자기가 맑스를 어설프게 읽은 그 지식 가지고 모든 사회현상을 다 설명하는 무거운 짐을 자기 스스로 짊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맑스의 이론이 총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여전히 유효하고 많은 것들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좌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또 무기가 되고. 그런데 EM님처럼 정치경제학적으로 성을 설명하는 것은 성이라는 상품에 대한, 이것이 노동력인가, 아닌가 기타등등 해서 이것만 설명하는 것이지 총체적인 설명을 한게 아니라고 봐요. 저도 댓글에서 그런 식으로 접근했고, 성매매로 받아들이든 성노동으로 받아들이든, 이 주제는 굉장히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슈리님이 너무 단정적인 글을 썼다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굉장히 정치적으로 첨예하고 민감한 주제를.
어쨌든 푸우님의 여성주의 없이는 맑스주의도 없다는 그 명제는 사실 누구나 공감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전히 성에 대해 정치경제학적으로도 규명이 안되고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안타깝고, 성에 대해서는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사회학적, 여성학적, 생물학적, 인류학적, 정치적 등등 다양한 논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노동만큼이나 성이나 사랑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니까요. 또한 관계의 문제이고.
L
관리 메뉴
본문
어쨌거나 혁명일어나고 제국에서 독립하면 여성해방하기좋은 세상올거라며,사람이 죽고 그러는데 뭔 여성주의냐며 ......ㅎㅎ푸우
관리 메뉴
본문
그러게요, 조금 곤란하네요;;reverie
관리 메뉴
본문
댓글을 수정하려고 했더니 L님이 댓글을 달아서.. T.T어쨌든 성에 대해 정치경제학적 글이 나오게 된 건 성이 여성주의와 무관해서가 아니라 그럴수밖에 없는 조건이었거든요. 애초에 문제가 된 건 슈리님이 성매매여성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이게 노동력이냐 아니냐 이 얘기가 나온건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건 성 일반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성이죠. 그러니까 얘기가 여성주의와는 무관한 것처럼 흘러가게 되었는데, 왜냐면 시급히 해결되어야할 문제는 성매매여성이 노동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 이거였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여성주의와 무관하게 성에 대한 논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봐요. 성에 대한 논쟁이 곧 성해방에 관한 논쟁은 아니니까요.
푸우
관리 메뉴
본문
당연히 상품으로서의 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하며 그 필요성을 전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대한 분석이 일부 여성주의 진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문제는, 설령 상품으로서의 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여타 다른 현상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라고 하더라도, 젠더적 적대라는 문제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채 그런 분석을 이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설령 그런 '오염'되지 않은 분석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것이 유물론적 여성주의와의 관련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 분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순수'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인정하는 발화 자체가 유물론적 여성주의에 대한 일종의 입장을 제출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reverie
관리 메뉴
본문
그니까.. ^^;;;이론가들이 젠더적 적대로 오염이 돼서 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안나오고 있는거 아닐까요. 성은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EM님도 자긴 성이 뭔지 모르겠다잖아요. 그러면서 성매매에 대한 경제학적 이해.. 뒤집어지는줄 알았어요..
근데 푸우님은 법대생인 것 같아 보이던데, 우리 사회에서 시급한게 성매매특별법보다 사채특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성매매하시는 분들이 최근에 사채로 많이 자살했잖아요.
푸우
관리 메뉴
본문
제가 신변잡기식 글들을 쓰면서 제 신상을 조금 많이 노출시켰군요 ^^;; 확실히 사채특별법이 더 실효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초비
관리 메뉴
본문
항상 계급적대가 성적대를 포괄한다는 생각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갑갑했었는데, 푸우님 덕분에, 개인적 의견도 많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여성주의에서 계급적대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푸우
관리 메뉴
본문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 사실 저도 글을 쓰면서 계급과 젠더의 관계에 대해 스스로에게 보다 명료한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reverie
관리 메뉴
본문
좀 더 논의가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에 적습니다. 성과 계급은 한 인간을 지배하는 중요한 규정성이지만, 마치 이 둘이 무관한 것처럼 논의되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계급이 더 지배적인 규정성이고 성은 부차적인 규정성이라는 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푸우님의 글에 코멘트를 하신 분들은 이 둘의 상호연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그런데 맑스가 사회를 분석할 때 계급사회라고 규정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은 먹고 살아야하는 존재라는 유물론적 혹은 생물학적 뿌리에서 시작했습니다. 맑스는 항상 근본적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를 뿌리에서 포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저는 성에 대한 분석도 뿌리에서 포착하는 것이 근본적이고 래디컬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적 지배의 생물학적 뿌리는 역시 동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생식능력, 짝짓기본능, 종의 재생산 같은 것들이라고 봅니다. 흔히 좌파들은 생물학적 얘기를 하면 반동적이라고 하면서 알레르기를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물학적 차이가 엄청난 사회적 차이, 혹은 차별의 원인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제가 진화론은 전혀 모릅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식능력은 다릅니다. 남자는 가능한 많은 여자와 관계를 갖길 원하고, 여자는 신뢰할만한 남자와 관계를 갖길 원할 수밖에 없도록 조건지워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 그래서 여자는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아내와 창녀로. 이 뿌리가 지금도 남자들이 난잡한 성관계를 갖는 건 용납이 되는데,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여자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남자들에게는 걸레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걸레들은 자신들의 걸레스러움을 성적 능력으로 포장하는데, 또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복잡한 성관계를 가지면 성적 매력이 부각되는게 아니라 헤픈 여자로 취급당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대다수 남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는 도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나머지 여자들에 대해서는 성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편견이 계급적 규정성과 만날 때, 즉 생존을 위해 다른 수단이 없는 여자들이 성을 팔 수밖에 없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매매의 문제는 단지 계급적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적 문제만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 규정성이 결합된 문제입니다.
2008년에 경찰이 성매매여성을 최소 80만으로 추정했습니다. 가임기 여성의 숫자를 생각할 때 엄청난 숫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성을 팔지 않는 여성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는데도 자기 실현을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습니다. 노동은 분명히 자기파괴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을 때 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수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매매의 문제는 좌파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초비
관리 메뉴
본문
reverie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매매 문제는 성과 계급이 얽혀 있는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인간의 생물학적 뿌리에서 시작해서 성매매 문제를 보면 푸우님의 글과 다른 결론이 나오나요?reverie
관리 메뉴
본문
푸우님과는 좀 더 대화를 해봐야 의견의 차이같은 것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바디우나 이리가레는 제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초비님이 말씀하신 인간의 생물학적 뿌리에서 성매매 문제를 생각하면 저는 자연상태에서는 여성이 원치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거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의 논리적 귀결이 성매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분명히 자연상태에서 남자가 원하는 것과 여자가 원하는 것은 다를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동일한 권리가 상호충돌할 때는 힘이 해결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성폭력이나 구타를 통해서 여성을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려고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성매매는 제도화된 것에 불과하고.인간의 삶은 노동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아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어요. 그런데 이런 활동들이 생산이 목적은 아니죠.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인데, 이게 돈벌이 수단이 되면 노동이 되느냐. 회복되어야하는 것은 노동만이 아니라, 관계도 회복되어야하고, 그게 주체성 회복으로 가기 위한 조건이겠죠. 그런데 자꾸 노동으로 생각하게 되면 사실 저는 답이 안나온다고 봐요.
reverie
관리 메뉴
본문
좀더 말씀드리면 저는 사실 성매매냐, 성노동이냐 이런 논쟁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고 생각해요. 성매매여성이 이중으로 소외되어있다고 생각해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로부터만 소외되어 있는게 아니라 노동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타인의 의지에 따라 노동을 하고 있어요. 사실 이런 경우에는 노동자라기 보다는 노동도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매매여성의 경우에는 자신이 돈을 받고 성관계를 할 경우 그 성행위에서 소외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소외되요. 성매매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없어지고, 남자들이 자신의 애인이나 아내가 성매매를 해도 그녀를 계속 사랑한다면 우리는 성매매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서로에게 독설을 퍼붓지 않아도 될만큼 좀 홀가분해질 수 있지 않을까해요. 저는 성매매논쟁을 할때마다 뭔가가 우리를 떠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심리적 중압감이 뭔지.푸우
관리 메뉴
본문
reverie// "동일한 권리가 상호충돌할 때는 힘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가 충돌할 수 있는 지점, 예컨대 성관계에서 여성이 바라는 것과 남성이 바라는 것이 다른 경우, 남성이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성매매나 성폭력)를 용인하신다는 것인지요?일단 '동일한 권리'보다는 '대등한 권리'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대등한 권리가 상호충돌할 때 현실적으로 힘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는 현실 인식과, "대등한 권리가 상호충돌할 때는 힘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는 분명 다른 것 같은데, 후자까지 인정하자는 것인가요?
reverie
관리 메뉴
본문
정치의 문제가 그런 식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도 평화적 수단을 통해 사회가 바뀌었으면 좋겠지만, 양보할 리 없잖아요. 그렇다면 힘으로, 즉 폭력으로 세상을 바꿨을 때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보편적인 권리라고 생각해요. 소수의 쿠데타는 정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하지만 민중봉기는 정당하게 받아들여져요. 보편적 권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순전히 자연상태에서(이런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충돌할 때 남자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과거에는 피정복민이나 범죄를 저지른 자를 노예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여자들의 경우에는 신부로 삼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런게 용납이 안돼요. 지금도 여자를 납치하거나 자기 딸을 감금해놓고 성노예로 부리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이건 범죄에 해당해요. 지금 사람들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문화속에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문화에서는 성폭력은 범죄인데 성매매는 범죄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용도 아니고 애매한 상태에 있죠. 하지만 이게 푸우님이 저한테 묻고 싶은 말은 아닐거에요. 당연히 남자가 여자에게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죠.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건 아니잖아요. 제 생각엔 어떤 사회도 인간본성을 바꾸거나 인간성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절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 사회는 또 너무 잔인하기도 해요. 아이들이 당하는 학대, 그리고 학교에서 당하는 소외감, 군대, 직장 등에서 당하는 모멸감.. 등등 해서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증오심을 심어줘요. 실제로 부모가 해고를 당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가정불화가 심하거나 할 경우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는 매우 많아요.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공격성을 자기보다 더 약자에게 해소하기도 해요. 힘으로 타인을 굴복시키는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지만, 비난이나 처벌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요. 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가정의 경우에는 아들이 여성을 존중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 그런 집에서 자란 여성도 마찬가지고. 자신이 당하는 차별을 감내하지 않으려고 할거라고 생각해요. 집단적으로 사회의 불의나 불평등을 바꾸려고 무력을 행사하는 것과, 개인이 개인을, 혹은 집단이 개인을, 혹은 집단이 다른 집단을 굴복시키려고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의 지배라는 점에서 같지만, 목적이 서로 다르죠. 하나는 평등해지기 위해, 후자는 불평등을 만들기 위해.푸우
관리 메뉴
본문
정치의 문제에 국한해서 보자면, 보편적 권리에 기반한 봉기가 정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상황이 "대등한 권리의 상호충돌"이 아니라 "우열이 있는 권리 간의 상호충돌"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마찬가지로 젠더적 적대의 문제에 있어서도 남성이 "이길 수 밖에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정당화가 되거나 그저 "현실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reverie님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명확히 하자는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여성과 남성의 대등한 권리가 상호충돌하지 않는, 내지는 상호충돌이 최소화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의 가능성을 완전 봉쇄해버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reverie
관리 메뉴
본문
권리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권리가 있고 사회적으로 쟁취하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리는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거죠. 이 권리는 타인의 권리를 말살하고도 남아요. 이를테면 인간의 노예화. 그런데 한번 빼앗긴 권리를 투쟁을 통해서 되찾았어요. 권리가 다시 동등해졌어요. 권리란 변증법적으로 계속 발전하는거라고 생각해요.제 생각엔 계급적대보다는 젠더적 적대가 해소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해요. 일단 남자들은 대규모적인 무력을 행사할 수 없어요. 게다가 여자들의 연대성도 계속 확대될 것으로 생각되요. 여기에 남성으로서의 권리를 부담스러워하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젠더적 적대는 경향적으로 해소와 강화가 계속 되풀이되다가 어쩌면 우리도 68혁명 비슷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남자들이 요즘 너무 약해져서 군대도 가기 싫어하고 여자를 먹여 살리기도 싫어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