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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죄 폐지에 대해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1/19 15:21
  • 수정일
    2015/05/06 18:5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줄곧 간통죄 폐지론을 옹호해왔으나 최근 들어 그 확신이 흔들려 왔다. 어제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는 다분히 감성적인 글을 읽고 난 후 꽤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유는 폐지론이 지니는 공허함에 있다. 간통죄 폐지론은 가장 핵심적인 물음에 대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 존치론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기도 하다.

 

 

간통은 부부계약 위반이기 때문에 형사적인 해결이 아닌 민사적인 해결을 봐야 한다는 것이 폐지론의 가장 중요한 논거다. 간통이 일어났을 경우 민사적인 해결을 봐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간통죄의 제대로 된 쟁점은, 민사적인 해결과는 별개로 형법이 개입을 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어떤 행위가 민사계약 위반이라고 그것이 형법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사기죄나 배임죄, 횡령죄도 분명 민사계약 위반을 처벌하는 법규들이다.

 

민사계약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형법이 관여하는 경우는, 그 위반으로 인한 위법성이 민사적 규제만으로는 시정되지 않을 때이다. 가장 대표적인 민사계약 위반인 채무이행지체와 같은 행위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민사적 규제의 일종인 지연이자(법정이율 5%)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채무이행지체가 시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사기나 배임과 같은 행위는 민사적 규제로 충분히 그 행위의 위법성이 규제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극단적인 규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형벌을 동원해서라도 규제하는 것이다.

 

부부계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동거의무, 부양의무 위반도 엄연히 위법한 행위지만 그것을 가지고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다. 정조의무 위반, 그 중에서도 특히 간통(간통은 정조의무 위반보다 더 좁은 행위 유형이다.)이 과연 민사적인 제재로 충분히 시정되는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만약 불충반하다고 인정된다면 형사처벌이 고려될 수도 있다. 간통이라는 행위에 대해 어떤 제재 수단이 가장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폐지론도 존치론도 제대로 된 근거를 갖춘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폐지론자들은 간통이 윤리의 영역이기 때문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윤리'에 대한 한국 법학계의 천박한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고 봐도 된다. 윤리란 단순히 착한 행동, 바람직한 사고 방식, 건전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어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이다. 그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따라 그 규제의 강도가 달라질 뿐이다. 예컨대 대중교통수단에서 노약자석을 비워둬야 하는 의무를 위반한 것은 그 정도가 비교적 경미해서 '주위 사람들이 비난'이라는 규제가 가해지고,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강제집행'이라는 민사 규제가 가해지고, 타인을 살해하는 것은 '형벌'이라는 형사 규제가 가해지는 것이다. 맨 첫 번째가 윤리의 영역이고 뒤의 두 사례가 법의 영역인 것이 아니다.

 

간통의 경우, 그것이 바로 윤리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행했을 경우 어느 정도의 규제를 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 폐지론자들의 말대로 간통이 윤리의 영역에 있으니까 법적 규제를 가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면, 간통으로 인한 손해배상도 부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민사적 사건은 개인간의 일이지만 형사적 사건은 개인과 국가간의 일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규범학에 대한 매우 일차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섣부른 판단이다.

 

민사적 사건이든, 형사적 사건이든 모두 다 그 규범적 해결이 문제가 된다.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개입을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국가가 개입을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르게 말한다면 민사적 사건도, 형사적 사건도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개입이 필요하다. 결국 다시 간통이 어떤 규제를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로 회귀하게 된다.

 

 

법기술적 측면에서 간통죄의 폐지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간통죄로 상대방을 고소하기 위해서는 이혼신고가 요구되며, 간통죄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혼인생활은 더더욱 파탄이 나기 때문에 간통죄는 혼인생활의 보호기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형법의 기능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낸다. 형법은 기본적으로 사전예방기능을 담당하고 있지 사후복구를 해줄 수는 없다. 즉 애초에 간통을 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기능은 가지고 있지만 이미 간통이 일어난 이상 그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살인죄를 생각해보면 된다. 살인죄가 있다고 해서 이미 살해된 사람이 되살아 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살인죄는 생명권의 보호기능이 없는 것인가? 참고로 물건을 도둑맞은 경우에도, 형법의 절도죄가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주지는 않는다.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주도록 강제하는 역할은 민법 규정이 담당한다.

 

 

성년 간의 합의된 성행위는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내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은 간통에 대한 민사 규제도 부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더 근본적으로, 어떤 행위가 얼마나 내밀한지와 그 행위가 위법한지는 어떤 상관도 없다. 예컨대 A가 공무원 B에게 청탁을 하며 그 대가로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내밀했든, A와 B가 거기서 얼마큼의 쾌감을 얻었든 A와 B는 뇌물죄(수뢰죄와 증뢰죄)로 처벌되어야 한다. 요체는 그 행위가 윤리적 의무를 위반하고 있는지의 여부이지, 그 내밀함의 정도가 아니다. A와 B의 사건에서는 성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청탁이 문제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간통죄도 마찬가지다. 성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신뢰를 깨뜨렸다는 것이 문제다.

 

덤으로 일부일처제를 막무가내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부부간에 간통을 서로 허가한 경우에는 간통죄는 처벌되지 않는다(이것을 '종용'이라고 한다). 부부가 모두 상호합의한 스와핑 같은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간통죄 존폐의 문제는 정확히 우리가 간통이라는 행위에 대해 어떤 윤리적 평가를 내릴 것인가와 연관이 된다. 간통죄가 보호하려는 법익이 부부간의 신뢰라면, 그것을 보호하려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간혹 개인이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외부자(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지만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의 여부와 외부자의 개입 여부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 살해 행위도 어떻게 보면 개인이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나,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개인이 개입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떤 행위가 윤리적 의무를 수반하고 있다면, 그 개인이 자신의 윤리적 의무를 지킬 수 있도록 그 행위를 강제하는, 내지는 억제하는 여러 수단이 등장할 수 있다. 폐지론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간통에 대한 강력한 손해배상제도도 자율적 영역에 대한 개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형사처벌로서의 간통죄와 다를 바가 없다. 요점은 다시금, 과연 어떤 수단이냐, 어느 정도냐에 있다. 그리고, 굉장히 허무한 결말이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 형사처벌이 지니는 의의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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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식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0/12/28 01:01
  • 수정일
    2014/11/07 13:0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성탄절 전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성탄절 아침에 입관식을 하였고, 그 다음 날에 발인을 하였다. 부모님과 막내 동생은 아직 전주에 있다. 나와 내 동생은 먼저 서울에 올라왔다.

 

위로가 필요한 시간들이었고 실제로 위로를 여기 저기서 받기는 했지만 내가 엄마를 위로해드려야 했기 때문에 마음껏 위로 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욕망을 표현할 방법을 잘 모르겠고, 그러다 보니 잘 표현하지도 못했다. 발인을 하는 동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상 중에 내가 한 작은 말실수가 계속 나의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참 재미없는 시간들이라고 농담 삼아 한 말이, 그 말이 계속 내 귓가를 맴돈다.

 

지루했던 것은 사실이다. 접수대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계속 부조금을 받고, 주차 확인증에 무료 주차 도장을 찍어주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내가 했던 말을 내려놓지 못하겠다. 시신을 땅 바닥에 내려 놓을 때에도, 흙을 내려 놓는 순간에도 그 말은 가만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입관식을 지켜보고,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이제 핏기 하나 없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엄마는 엎어져 우셨다. 삼촌들은 각자의 가족에 안겨 내가 여태 한번도 보지 못했던 당신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멈출 것 같지 않던 그들의 울음과 나의 눈물은 잦아들었다. 삼촌들과 엄마는 어느새 장례절차에 관하여, 부조금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적어도 그 순간 죽음은 삶을 냉소하게 만들었다. 죽음은 너무 자명하게 보였기에 그 냉소도 내가 여태까지 접해왔던 그 어떤 냉소보다도 선명했다. 냉소는 내가 지향하는 모든 가치와 목표와 이상의 찬란함을 단순간에 잿빛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냉소는 그러나 너무 설득력이 강하다. 여타 다른 냉소가 어떤 논리나 설득으로 타파가 된다면, 죽음이 불러오는 냉소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합리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불현듯 그 냉소에 휘말리지 않는 윤리를 구축하여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애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기분이 어떻든 일단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잘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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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기출문제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0/12/06 19:29
  • 수정일
    2014/11/07 13:0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사법시험 기출문제를 풀다가 하도 열받아서 결국 글까지 쓰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국 사법시험 문제는 객관적으로 엉망이다.

 

제52회 사법시험 1차(객관식) 헌법 1책형 13번째 문제를 보자.

 

이 문제는 의원내각제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를 모두 고르라고 한다.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지문이 있다: "이 정부형태가 성공하기 위하여는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 있어야 하고 정치인에게 투철한 공직의식이 요구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를 확신하기 어렵다."

 

우선 직업공무원제의 확립과 정치인에 대한 투철한 공직의식의 요구는 비단 의원내각제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제를 채택하는 모든 정부형태에서 다 요구되는 사항이다. 의원내각제의 특질을 묻기에는 다소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문제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어쨌거나 의원내각제에도 그런 사항들이 요구되는 것은 맞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의원내각제가 그런 사항들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는 의원내각제의 단점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의원내각제가 그런 사항들을 요구하는 것을 가지고 바로 의원내각제가 '우리 실정'과 맞는지 안 맞는지를 판단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때문에 이 지문에서 의원내각제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의 경우 이를 확신하기 어렵다."라는 문구 속에 있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문제는 의원내각제 자체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이건 의원내각제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실정'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너그럽게, 그것이 의원내각제를 도입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근거가 되므로 의원내각제와 상관이 있다고 인정해보자. 그리고, 이런 현실인식도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자.

 

진짜 문제점은 무엇이냐? 우리나라의 경우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되어 있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간혹 부정비리가 적발되는데, 그렇다고 직업공무원제 자체가 확립되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부분만 보면 저 지문은 틀렸다(참고로 정답에서는 저 지문이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게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또 아니었다. 이건 그냥 정답이 잘못 나간 정도로 볼 수 있으니까(물론 정답이 수정되진 않았다 - 사실 이것만으로도 사법시험이 얼마나 개판인지는 증명이 되겠지만...). "이 정부형태가 성공하기 위하여는 정치인에게 투철한 공직의식이 요구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를 확신하기 어렵다."를 살펴보자.  여기에 진짜 문제점이 있다.

 

저 문제는 나더러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투철한 공직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단답형으로 판단하란다. 그래, 마음만 같아서는 '없다'라고 쉽게 정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정답/오답이 명확해야 하는 '객관식 시험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웃기는 소리다. 끔찍하게도, 이런 저질 문제가 저것 하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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