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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젠더의 문제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10 16:16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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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님의 [관념적 글쓰기?] 에 관련된 글.

 

페미니즘 저서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섹스와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 성애적 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의 구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주디스 버틀러가 이 모든 개념은 결국 다 '젠더'를 지칭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여성연대(http://blog.jinbo.net/kimpoo88/?pid=11)라고 말할 때의 여성은 젠더로서의 여성이며, 이는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여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간에는 차이가 없다. 젠더를 마치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한 사회문화적 성이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있지만, 젠더를 '성차'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젠더는 섹스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성(을 줄여서 사회적 성)임을 드러내게 하는 용법에 가깝게 보인다.

 

이후 어떤 보편적 여성에 대해서는 주디스 버틀러의 글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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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나의 정치적 개입 덕분에 『젠더 트러블』에서의 입장 몇 가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나는 '보편성'의 주장을 극히 부정적이고 배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광의의 인권 문제에 관해 성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집단인 게이와 레즈비언 인권위원회(1994~1997)에서 처음에는 이사회 회원으로 그 다음엔 회장으로 있으면서 특별한 활동과 집단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이 용어에 바로 그 비본질적이고 열린 범주로서 중요한 전략적 용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보편성에 대한 주장이 어떻게 예기적(proleptic)이면서 수행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불러내고, 서로 만난 적 없는 문화지평들의 수렴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문화적 번역이라는 미래 지향적 노동으로 정의되는 보편성에 대한 두번째 관점에 도달했다.<<나는 이후의 글쓰기에서 보편성에 대한 생각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생각은 『격분하기 쉬운 말』 2장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각주13)>> 좀더 최근에는 내 작업을 정치 이론과 연결해야 했고, 다시 한번 헤게모니 이론과 그것이 이론적 좌파 활동가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쓴 공동 저작(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verso, 2000-역주)에서는 보편성 개념과 연결해야 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조현준 옮김, 2008년 경기도: 문학동네, p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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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연대의 촉구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10 11:21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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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on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내 입장을 다시 정리해본다.

 

1. 왜 laron의 글은 여성 억압적인가?

 

laron은 김윤옥을 자체 제작한 포르노에 등장시켰다. laron은 ‘포르노에는 반여성성 말고도 많은 문화사회적 맥락(http://blog.jinbo.net/picotera/?pid=425)’이 있다고 한다. 포르노의 문화사회적 맥락은 아마 포르노의 어원,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포르노가 등장하게 된 맥락을 지시하는 것 같다. laron은 자기 글이 그런 의미에서 포르노의 문화사회적 맥락에 충실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지배계급을 희화화시키는 도구로 포르노가 이용되었듯 자신도 김윤옥이라는 지배계급을 희화화하는 데 포르노적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그래서 laron은 강용석 때문에 그만 두고자 했을 것이다. 포르노의 문화사회적 맥락만 따진다면 강용석의 발언이 laron의 글보다 훨씬 포르노적이니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노동자 여성은 노동자 남성의 아내로, 자본가 여성은 자본가 남성의 아내로밖에 불리지 못하고 그렇게만 보인다. laron의 눈에는 김윤옥 역시 여성으로 보이기보다 이명박의 아내로밖에 보이지 않았나 보다. 여성으로 보였더라도 그는 어떤 계급투쟁에의 이로움 때문에 김윤옥을 여성으로보다는 한 남성의 아내로 읽어내고 등장시켰다.

 

여성 억압적 포르노와 여성 억압적이지 않은 포르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포르노는 문화사회적 맥락상 여성 억압을 내포한다. 포르노가 여성 억압적이더라도 그 문화사회적 맥락과 의도를 고려해서 그 유용성을 인정하자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말하는 ‘계급혁명이 일어나면 여성도 해방될 것’이라는 오류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문화사회적 맥락에 충실할수록 포르노는 오히려 더 여성 억압적일 수 있다. 여성 해방에 저해가 되더라도 포르노의 유용성을 받아들이자는 뜻밖에는 더 되지 않는다.

 

2. 왜 laron이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이 비윤리적인가?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나는 이 논쟁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여성이 이 논쟁에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이 전략적 오류라면, 남성이 그러는 것은 비윤리다. 윤리라는 것은 자기가 고립된 개인이 아니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타자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고 그로부터 어떤 행동양식을 만들어 낼 때, 그 행동양식을 윤리라고 부른다.

 

남성이 여성 억압적 글쓰기에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은 젠더적 지형과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한국을 살아가는 몇몇 남성들(과 조선일보의 박은주)은 OECD에서 2006년에 발표한 GID 지수(http://www.oecd.org/dataoecd/57/20/36240233.pdf, 아랍권 국가들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허무맹랑한 지수다. 이것은 ‘제도’가 얼마나 평등한가를 보는 지수로서, 여성이 현실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에서 대한민국의 성평등이 세계 4위니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중 하나라고 외치고 다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남성은 오히려 성평등에 대한 일종의 피로감을 호소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 여성이 여성으로서 말할 수 없고, 동등한 임금을 받지도 않으며 가족 내에서 가부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제도가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딛고 있는 현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성 억압적 현실에서 남성이라는 젠더는 억압하는 총체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윤리는 자신이 억압하는 총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laron이 자기 글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글을 썼다는 현실적 인식을 회피하는 것으로서 윤리적 기반이 부재해 있다.

 

3. 왜 표현의 자유의 문제로 보면 안 되는가?

 

먼저 본격적인 질문과 아주 무관하지 않은 작은 문제제기부터 하겠다. 많은 블로거들이 laron의 성찰과 반성을 요구한다. 진보넷도 답변에서 성찰과 사과를 주문했다. 물론 laron의 성찰과 반성은 중요하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찰과 반성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계급문제를 논할 때 부르주아지의 성찰과 반성이 부가적인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핵심이 되지는 않는다(오히려 부르주아지의 자선이 일종의 성찰로 읽혀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 해방 운동에서도 남성의 성찰과 반성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아니다.

 

이 논쟁에서 과연 여성 억압적 표현도 표현의 자유가 될 수 있는지가 화두가 된 듯 하다. 의도했든 안 했든 laron을 비판하는 여성들도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laron의 글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본다면 다시 자유주의 프레임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자유주의 프레임은 문제의 해결을 자유의 내면적(계몽적) 내지 외재적(강제적) 제한으로 풀어나가게 된다. 만약 laron이 끝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데도 표현의 자유를 중점으로 논의가 흘러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진보넷에서 여성 억압적 글쓰기가 허용되어야 하는가, 어느 정도의 제한이 가해져야 하는가의 테제들이 등장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그 제한에 관련한 논쟁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유주의, 그것도 자유주의 법학과 연관을 맺게 된다. 우리는 자유주의 법학이 중성으로 가장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 법학의 중성성은 논의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며 심지어는 그 운동성까지 갉아먹는 해를 끼친다.

 

실제로 여성 억압적 표현, 다시 말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을 제한하기로 합의를 봤다고(‘반성’했다고) 가정하자. ‘김윤옥 포르노’류는 제한될 것이다.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가 섹스를 하는 상상을 한다’류는 제한될 것이다.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랑 섹스를 하고 싶다’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잘 모르겠으면 조금 더 심화시켜보자.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랑 섹스, 그것도 쓰리썸을 하고 싶다. 김ㅁㅁ도 그러길 바라면 좋겠다.’ 확실한 대상화이며 ‘나는 김ㅁㅁ랑 섹스를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다르지 않으므로 이 역시 제한될 것이다. ‘나는 김ㅁㅁ가 좋다. 나는 김ㅁㅁ랑 식사를 하고 싶다’류는 어떤가? 언뜻 보면 여성 대상화가 아닌 것 같지만 그 맥락을 살펴보면 여성 대상화가 맞다(특히 김ㅁㅁ가 여성이라는 가정 하에서는). 남성이 여성과 데이트를 할 때, 그 최종 목표가 성관계인 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맞는 명제다. 그렇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여성 대상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 맥락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대상화라는 점을 시사한다.

 

자유주의의 능력이라고는 불분명한 논리로 저 단계에서 어디까지가 부적절하고 제한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즉 모든 단계를 다 제한해서 거의 모든 소통을 금지시키든가, 특히 눈에 띄는 여성 대상화만 제거하여 나머지 대상화들은 남겨두는 오류를 범한다. 또, 남성들은 보다 사적이고 보다 은밀한 공간에서 계속해서 여성 억압을 지속할 것이며, 여성은 다시 껍데기 평등에 안주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진보넷이라는 공간을 여성 억압적 표현이 없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해방되는 것이다.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 나는 그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있지 않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중성을 가장한 남성의 글쓰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글쓰기를 할 때 어떤 결론이 도출될 지는 알 것 같다.

 

여성으로서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진보넷에서 여성 억압적 표현을 몰아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나는 진보넷이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가능한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런데 진보넷의 현실에서 남근주의가 발견된다. 단지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많이 숨겨졌을 뿐 결코 부재하지 않는다. 진보넷을 남근주의가 없는 공간으로 간주하는 것이 여성 해방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진보넷의 기능은 그런 남근주의적 발언에 대해 여성연대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이 여성 억압인 것은 맞다. 그런데 왜 그것이 여성 억압인가? 여성이 동등한 위치에 서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여성이 대상화되지 말아야 하는가?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여성도 남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사회가 성평등 사회인가? 그 사회는 성평등 사회가 아니라 무성생식에 가까운 사회일 것이다. 여성이 동등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이 남성을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할 때는 대상화뿐만 아니라 상품화도 병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은 자본주의와 결합된 가부장제의 특성도 고려해야 할 문제다(상품화를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면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상품화는 대상화의 변주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도로 고려할 필요는 없다). 가부장제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로 봐야 한다.

 

뤼스 이리가레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비슷한 문제에 대해 같은 방향으로,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 2의 성(le deuxième sexe)인 여성이 가부장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했다면 이리가레는 여성은 없다고 봤다. 우리가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남성이 아닌 무언가, 성조차 아닌 성(ce sexe qui n’en est pas un), 주변부에 있는 그것(이다).

 

나는 두 페미니스트의 입장이 상호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의 연대를 이뤘을 때 대단한 동력으로 작동한다고 보지만 지금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이리가레의 문제의식에 서고자 한다.

 

(윗 단락이 내가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독해될 가능성이 있고, 또 실제로 그런 독해가 생겨서 덧붙인다. 이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 '여성연대'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뤼스 이리가레의 연대가 아니다. 나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이 마치 반대된다는 듯이 쓴 글을 예전에 본 적이 있고, 그것을 경계하고자 두 페미니스트의 연대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사실 이미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망한 마당에 두 페미니스트의 실재적인 연대를 바라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 억압에 맞서서 현재 필요한 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복원이며, 그 작업을 위해 젠더로서의 여성은 모두 포함된 여성연대를 주문한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남성에 의해 잉여나 찌꺼기 형태로만 남아있는 이 성에 여성이라는 섹슈얼리티를 입히는 작업이다.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 남성이 오독하고 오역한 찌꺼기의, 상품의 섹슈얼리티를 다시 독해해낼 때 여성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다.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얻어냈듯이 여성도 남성의 대상화 전략을 은유함으로써 남성의 전략을 흔들고 축소시켜 남성의 여성이나, 남성이 되고자 하는 여성이 아닌, 여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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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09 10:39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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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에 와서 처음으로 '반여성적', '반여성성'이라는 표현을 들었다. 아직 여성성, 여성적 섹슈얼리티조차 불안한 상태에서 어떤 행위나 글이 '반여성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그 용어 자체의 미래성에도 불구하고 남용의 소지가 다분하다. 우리는 아직 그런 글이나 행위를 '여성 억압적'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는지 제안해 본다.

 

laron의 글쓰기가 표현의 자유 문제로 흘러간 점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그 책임은 laron에게 있다. 여성 억압이라는 젠더적 문제를 '헌법적' 문제로 위장시키려는 (무의식적) 전략은 한 마디로 비윤리적이다. 기타 개인의 블로그에 남기는 글에 너무 과잉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비사회적이라고 평가한다. 현실이라는 비슷한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이상 글쓰기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강용석 사태와 관련된 나의 글에서 반복해서 강조했다시피 이번 논쟁에서도 laron의 글쓰기가 포르노인지 아닌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왜 여성 억압인지는 다른 블로거 분들이 지적했고 아직도 '김윤옥 포르노'가 여성 억압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laron의 입장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여성 억압적 글쓰기에 대항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타 많은 점에서 라브의 행동을 지지한다. 이와 관련되어 촉발된 다른 블로거들의 연대도, 아직 진보넷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반갑다. 그러나 laron의 사과를 받아낸다는 점에 가서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 (진보넷에 공개 질의서를 보낸 행동은 다른 차원이다. 질의서는 진보넷의 입장을 확인하는 시도였고 진보넷이 여성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사과를 받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사과를 받아내면 논쟁은 중단되는 면이 있다(다행히도 laron의 사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이번은 예외가 될지도 모른다). 이는 하나의 논쟁이나 담론을 또다시 개인 행동의 잘잘못으로 축소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은폐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여성 억압의 문제, '김윤옥 포르노'의 문제는 laron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모든 여성의 사건이기도 하다. laron의 사과 여부에 따라 담론이 소각상태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laron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영원히 없었으면 좋겠다.

 

laron은 남성이다.

 

-글을 계속 쓰기 전에 밝힌다. 나도 남성이다. 나는 여성의 현실에 대해 간접 경험이나 페미니즘 저서를 통해서 밖에는 알지 못한다. 남성인 내가 논의의 방향을 바꿔달라는 취지의 글을 쓰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지금의 논의가 여성 해방에 보탬이 되기는 커녕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글을 계속 쓴다.

 

남성이 촉발시킨 사건을 남성의 사과로 끝내는 것은 다시금 담론의 결정권을 남성에게 줘버리는 꼴이 된다. 남성적 담론, 가부장제의 담론은 현실의 담론이다. 지금 형성되는 담론은 미약할지라도 분명한 대항 담론이다. 이 대항 담론이 음순 담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laron의 사과에 집착하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더 많은 여성 블로거들이 지금 형성되는 담론에 가담하길 희망한다. 가부장제의 담론을 재독해하고 다른 담론을 세우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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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댕: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이것은 과연 가치 있는 것이며 작가로서 실천하는 일의 일부가 되는 것인가요?

 

이리가라이('이리가레'가 올바른 표기로 보임): 나는 여자입니다. <나>라는 주체를 갖고 글을 씁니다. 여성의 가치를 경멸하지 않는다면, 또는 성적인 것이 의미 있는 주관적·객관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로 거부되지 않는다면 왜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가 가치 있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여성이면서 한편으로 작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말의 자동화 상태에 젖어 있거나 기존의 의미를 그대로 모방하는 사람들만이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글쓰는 자아간의 분리나 분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몸은 모두 성별화되어 있습니다. 나의 성욕(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섹슈얼리티'가 타당한 번역이라고 판단함)은 나의 성이나 성적인 행동(제한된 의미에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억압의 영향, 특히 성적인 문화의 결핍-세속적·종교적-이 낳는 결과가 여전히 너무나 강하므로 「나는 여성이다」, 「나는 여성으로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와 같은 이상한 발언들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항의에는 남성들만의 문화에 대한 은밀한 예속이 또한 내포되어 있습니다. 과연 알파벳 문자는 가부장제 권력의 세속적·종교적 법전화에 역사적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말과 문자를 성별화하는 데에 공헌하지 않는 것, 이것은 남성 족보와 그들의 논리적 기호체계에 특권을 부여하는 법과 전통의 그릇된 중성화를 영속화시키는 일입니다.

 

 

뤼스 이리가라이, 나, 너, 우리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박정오 옮김, 1996년 서울: 동문선, p. 55.

기울여서 쓴 부분은 번역에 대한 이의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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