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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 성비하 발언... 이어서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7/22 10:48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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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용석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강용석은 잘못된 행동을 했다. 강용석의 행위가 정당하냐, 그렇지 않느냐를 논하기 위해 시간과 글자를 쓴다는 것은 거의 낭비에 가깝다. 우리는 강용석의 잘못된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되게끔 하는 현실적, 무의식적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생각보다 일처리가 빨리 된다. 벌써 한나라당은 제명에 들어갔고 언론에 의한 뭇매는 강도가 높아진다. 확실히 강용석을 고립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언론에 의한 초기 보도에서는 강용석이 여대생들을 상대로 한 말들만 전해졌는데 이제는 강용석이 타 국회의원에 대해 한 발언까지 공개되는 추세다. 강용석이 다른 여성 국회의원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과거에는 어떤 발언들을 했는지가 밝혀진다. 이로써 강용석 개인은 분별력이 없고 시대착오적인 성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남자이자 국회의원으로 낙인찍힌다.

 

낙인찍기의 효과는 강용석 사건을 일상과는 관련 없는 분리된 사건으로 만드는 데에 있다. 강용석이 '일반적' 남성과 다르다는 듯이 강용석 개인을 몰아가는 것은 '일반적' 남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아나운서협회는 강용석을 민형사적으로 제소했다. 흥미롭게도 제소이유는 '성희롱'이 아닌 '명예훼손'이다. 사방에서 강용석의 발언을 성희롱으로  규정하지만 어느 누구도 강용석을 성희롱으로 고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성희롱'과 법적으로 규제되는 '성희롱'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법적으로 규제되는 성희롱은 오로지 직장 내 성희롱으로서 남녀고용평등과일∙가정양립지원에관한법률과 여성발전기본법에 규정되어 있다. 이 법률들은 고용상 이익 등 직장 내 업무와 관련된 행위들 중 특히 성적 언동들을 성희롱으로 정의한다.

 

그럼에도 일상에서는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범람한다. 오늘날 일어나는 여성 문제는 거의 다 성희롱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어 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 와중에 도대체 성희롱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가 성희롱에 대해 지금 논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잊힌 듯하다. 강용석이 한 발언은 성희롱이며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성희롱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 성희롱이라는 것인지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여성에 대한 부적절한 성적 언행이 성희롱이라는 어렴풋한 지각만 있다.

 

대중 사이에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퍼진 데에는 성공적인 페미니즘적 기획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기획이 부실하기 짝이 없으며 성 평등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역설이겠다. 성 평등을 위해 여성의 대항 담론이 필요하다면, 대항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성희롱을 소개한 한국의 페미니즘은 단순히 성희롱을 규제함으로써 대항의 대상을 은폐해버려 대항 담론의 형성을 방해해버린 측면이 있다. 성희롱이 지니는 절실한 현실성은 사라지고 키치한 규범성만 남았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막는다. 이를 여성 억압이라고 부른다. 성희롱은 일상에서 나타나는 여성 대상화이다. 성희롱을 성희롱이게끔 만드는 것은 성희롱이 '본질적'으로 성희롱이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본질적'인 성희롱도 간혹 있다. 특히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성희롱들이 그렇다.) 성희롱이 놓인 일상이 가부장적인 탓이다. 성희롱은 정확히 말하자면 가부장제에 의해 일그러진 일상이다. 성희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부장제 자체를 상대해야 하며 이 점에서 성희롱은 대단히 유의미한 개념이 된다: 성희롱은 일상의 가부장제를 드러나게 한다.

 

성희롱에 대한 해결은 가부장적 일상을 지탱하는 구조와 무의식의 대체 내지 다른 무의식과의 공존을 요구한다. 성희롱은 일상과 구조-무의식 간에 놓인 가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보이는 가교라는 점에서 이용가치가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 봐서는 성희롱을 개인 행동의 문제로 계속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 부디 형식적 권리에 집착한 1세대 페미니즘의 오류를 재생하지 않길 바라지만 구조적 담론은 다시금 개인 행동에 대한 규제로 치환되어 간다. 규제를 통한 은폐는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외관상의 거짓 평등을 방패삼아 가부장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뿐이다. 한국에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유입된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성이 덜 대상화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성희롱이 이슈가 되었다면 그 담론적 성격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여성의 비非담론을 발굴함으로써 대상화된 여성의 대상화되지 않은 여성성을 드러내야 한다. 지금은 어떠한가? 언론은 피해 여학생들의 수치심과 모욕감에 대해 '추측'하지만 분명 당사자에게는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이다. 대중이 말하는 그런 수치심 등은 본래 여성의 느낌이라기보다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쓰라고 강요하는 가면과도 같다. 그 가면이 다른 말을 할 때, 다른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성희롱에 대한 논의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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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 성비하 발언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7/21 02:31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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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이 대학생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중앙일보를 인용한 프레시안 재인용(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0720092245&Section=01)

 

강 의원은 "사실 심사위원들은 (토론) 내용을 안 듣는다. 참가자들의 얼굴을 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토론할 때 패널을 구성하는 방법을 조언해주겠다"며 "못생긴 애 둘, 예쁜 애 하나로 이뤄진 구성이 최고다. 그래야 시선이 집중된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또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한 여학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강 의원은 특정 사립대를 지칭하며 "○○여대 이상은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못하더라"고 덧붙였다. 아나운서들이 성접대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는 지난해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는 한 여학생에게 "그때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며 "남자는 다 똑같다.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 옆에 사모님(김윤옥 여사)만 없었으면 네 (휴대전화) 번호도 따갔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재보선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개념을 안드로메다보다 멀리 보낸 발언. 민주당은 겉으로는 충격적이네마네하지만 속으로는 '아.. 대박, 한나라당 은근히 강용석 감쌌으면 더 좋겠다' 하고 있을테다.

 

 

일반 여론은 '여성 비하다' '여성에게 수치심을 주는 발언이다' '여성 모독이다' '천박한 여성관이다'라고 매도한다. 그리고 여론은 이 발언을 '성희롱'으로 규정한다.

 

 

 

 

몇 해전에 교양수업 하나 듣다가 성희롱에 대해 레포트를 제출한 적이 있다. 덕분에 성희롱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성희롱은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성희롱에 대해 꽤 너그러운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레포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그 관점을 완전히 버렸고 성희롱이 가지는 대단히 상징적인 역사성과 맥락성의 '학문적' 가치에 매료되었다.

 

성희롱은 여성을 도구화하고 객체화하는 총체로서의 남성이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남성이 여성의 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자리잡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희롱은 그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도구다.

 

만약 지금과 같은 젠더적 지형이 달라진다면 현재 성희롱으로 규정되는 행위들도 달리 판단될 것이다. 예컨대 '미스 김, 오늘따라 몸매가 아주 나이스해! 미스 김이 타주는 커피는 더 달콤할 것 같은데?'는 여성이 성적 불평등에 시달리는 현실에서는 여성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위축시키는 기재로 작동하지만 성적 불평등이 제거된 상황에서는 커피를 얻어 마시기 위한 아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짜 성희롱은 대학 커뮤니티에 만연해 있는 '어디어디 열람실에 앉은 여자 학우분 예쁘더라'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순결은 남자보단 여자한테 더 중요하지' 따위의 말들일 것이다.

 

강용석의 발언은 성희롱인가? 잘 모르겠다. 확실히 강용석이 묘사하는 현실에서 여성은 도구화 되어있다. 그리고 강용석은 그 현실에 별로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것에 순응할 수 있는 충고를 해주고 있다. 여성 대상화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사람의 의도와 맥락을 보았을 때는 성희롱이 맞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성희롱이 맞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고민했던 이유는 강용석의 발언이 성희롱인지 아닌지의 여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을 둘러싼 논란이 흘러가는 방향이 무섭다. 강용석의 발언은 분명 현실을 어느 정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성급한 일반화를 저지르거나 말을 거칠게 했을지는 몰라도 여성이 철저히 대상화되고 상품화되고 외모에 따라 평가받는 것은 맞다. 현실이 아무리 옳지 않고 그르다고 할지라도 현실은 여전히 현실이다.

 

그런데 각계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이 발언을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개인의 발언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나는 좀처럼 한 사태에 대해 여론이 통일되어(조중동이 바라던 국론통일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한나라당 의원 덕분에!)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목소리는 분명하다: 강용석이 한 말은 용서할 수 없다.

 

중앙일보는 이 발언을 개탄하고, 민주당은 충격적인 발언,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발언이라고 하고, 자유선진당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하고, 아나운서협회는 분노와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한다.

 

여전히 이해가 쉽사리 가지 않는다. 왜 그토록 흥분하는가? 왜 한국 사회가 여성을 대상화한 발언을 가지고 이렇게 들떠 있는가? 한국 사회가 언제 여성의 인권에 대해 제대로 신경쓴 적이나 있는가? 정치권이야 재보선의 이해당사자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왜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분노에 잠겨 있는가?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발언을 한 강용석보다는 그 발언을 가능케 한 현실이 아닌가?

 

왜 용서할 수 없을까? 정몽준이 여성 기자의 신체(볼)를 함부로 만졌을 때도, 최연희가 여성 기자를 성추행 했을 때도 이 정도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물리적 간섭은 여성에 대한 심리적 간섭만큼이나 심각한 성희롱인데 왜 강용석만을 용서할 수 없을까?

 

그것은 강용석이 성희롱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반복을 하더라도 신중하게 글을 써야 한다.

 

남성은 여성이 종이 위에 쓰인 평등이라는 단어를 맹목적으로 믿고 자기가 정말로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게 만들고 싶어 한다. 법도 평등하고 제도도 평등하고 다른 형식적 조건들도 평등하니 여성이 현실에 문제제기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 발동된 것은 남성의 무의식적 단일화다. 남성은 강용석의 발언으로 인해 여성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 하고 있다(그리고 몇 여성단체들은 한나라당을 깔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에 동조한다). 강용석이 한 말은 부정되어야 하고 강용석은 매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한나라당 내부의 윤리적 문제일 뿐, 단지 한 개인의 윤리적 문제일 뿐이다. 이것이 나쁜 이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추상적인 평등에 반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며, 여성 비하이며, 여성 모독이며,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성희롱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현실이자 진실일지라도.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 있다. 여성 불평등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과, 그 현실을 깨닫고 잘 순응해서 살라고 말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여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강용석은 틈을 보이게 만들었다. 이 틈은 우리가 배우는 현실과 실재하는 현실 사이의 차이다. 그 틈을 직시해야 한다.

 

남성의 무의식은 강하지만 동시에 꽤 허술하다. 곳곳에서 틈이 발견된다. 혹자는 국회의원이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데 강용석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금단의 영역, 해서는 안 되는 말. 그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강용석이 말하는 말은 현실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쪽과 강용석이 말하는 것은 여성 비하 발언이므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쪽 사이에는 분명히 공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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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후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6/03 17:07
  • 수정일
    2015/05/06 18:51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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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1990년에 3당 야합(합당)에 반대하고 1996년 총선에서 단일화 안 한건 겁나 잘한거고 노회찬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단일화 안 한건 겁나 역적질이자 뻘짓이었다, 그거지?

 

나는 운동권이 다 쇠락해버린 때에 대학에 입학했고, 개인적인 의지가 턱없이 부족해 그간 한국 운동의 역사나 지형, 계보에 대해 잘 모른다. 대충 NL과 PD를 들어봤을 뿐 제대로 접하지는 못했으며, 어렴풋이나마 진보신당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허락할 때 읽어본 몇몇 책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조합주의를 접했고, 진보신당이 가지는 정체성에 선뜻 신뢰할 수 없으면서도 그 맥락을 제대로 짚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어 진보신당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기 어려웠다.

 

때문에 여태까지의 선거에서 마지못해 진보신당을 뽑은 경향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효표를 행사했다. 그러나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노회찬을 뽑았다. 정치인 노회찬에 대해서도 분명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는데, 그가 왜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행사때 참석했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번에 그를 뽑아준 이유는, 어떤 형식으로든 좌익 진형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혹자는 어떻게든 이명박정권을 견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한나라당에 대한 견제론은 일종의 순환론이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를 뽑아주는 한 영원히 유효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 그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만으로도 한나라당에 대한 견제논리는 계속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한나라당 대 민주당의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는 결론은 나에게 필연적이었다.

 

노회찬이 추진하는 공약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그가 말하는 진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나온 서울시장 후보 중 유일하게 자신을 진보라고 소개하는 후보였다. (한명숙이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소개했나? 정말?) 그렇기 때문에 진보라는 대표성에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었다. 단지 그 뿐이지만, 이 '그 뿐'이 나로 하여금 절대 한명숙을 뽑지 못하게 만드는 마지노선이 되었다.

 

만약 노회찬이 단일화를 했더라도, 만약 여론조사결과 한명숙과 오세훈이 초접전이었더라도 나는 한명숙이 아닌 노회찬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번에 노회찬을 선택한 나머지 3.3%도 나와 같은, 적어도 나와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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