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교내집회·시위 금지 시행령 그리고 서울광장 조례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10/02 14:42
  • 수정일
    2015/05/06 18:5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내가 조선일보에 대한, 콤플렉스라면 콤플렉스고 양가감정이라면 양가감정이랄 게 있다. 너무 거창한 표현들일 수도 있으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조선일보는 극우 매체이기 이전에 내가(여기서의 '나'는 말 그대로 '나'에 국한된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다.

 

조선일보 기사를 쉽게 넘기지 못한다. 오늘도 조선일보에 "교내 집회·시위 금지 담긴 시행령 마련… 내년초 적용"라는 기사가 1면 하단에 실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 기사를 읽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나는 99%의 경우 그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고, 이 기사도 그 99%에 들어간다고 본다.) 그냥 읽지 않는 것이 낫다. 역시나 별 특별한 내용은 없으니까.

 

"

교과부, 일부 교육감 '학생인권조례' 추진에 맞서
 

교육과학기술부가 학생들의 교내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마련해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내년 초까지는 시행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교과부 고위관계자가 1일 밝혔다.

 

곽노현 서울교육감 등 일부 진보·좌파 교육감들이 학생인권 조례를 제정해 학생들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하자, 교과부가 상위법을 통해 이를 저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도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학생의 권리신장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와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것도 강조돼야 한다"며 "앞으로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시행령을 통해 교내 집회·시위를 금지해놓으면, 시·도교육청 차원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더라도 상위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고 교과부는 설명했다.

 

경기도의 경우 김상곤 교육감이 오는 5일 두발 자유·체벌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학생인권조례를 선포할 예정이다. 다만 당초 교내 집회·결사의 자유를 학생인권조례에 포함하려 했으나 반대 여론이 높자 이 내용은 뺐다.

"

 

우선 기사 제목을 잘못 뽑은 것 같은데, '교과부'라는 발언 주체를 큰 제목으로 보내고 '내년초' 등의 내용은 작은 제목으로 뺐어야 했다. 실제로 오늘 배달된 신문에는 '교과부'가 큰 제목으로 올라갔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익명의 교과부 고위관계자가 교과부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교과부가 실제로 그런 시행령을 발하길 바란다는 조선일보의 욕망에 불과하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 기사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부령이 아닌 대통령령이라서 교육과학기술부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의 제·개정 주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교과부가 그런 시행령을 마련할 수는 있어도 그 시행에 들어가는 것까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익명의 교육과학기술부 고위관계자가 가지고 있는 오해다. 고위관계자는 시행령의 작동 방식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의 재학생을 학생 따위로만 파악하지만 법률적으로 이들은 엄연한 기본권의 주체다. 이 기본권의 주체들이 집회·시위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것은 곧 그들의 기본권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기본권 주체의 기본권을 시행령이 제한하기 위해서는 상위법의 구체적인 위임이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의 상위법인 초·중등교육법에는 학생들의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시행령에 위임하는 규정이 하나도 없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시행령의 제·개정 주체가 아닐 뿐더러, 그 주체인 대통령도 법률의 위임 없이는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시행령을 발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조선일보의 욕망과 고위관계자의 맥락없는 의견이 합해져서 이상한 기사가 하나 더 나가게 되었다(안타깝게도 법치주의와 법 준수의식을 혼동하는 현 정부 하에 이 기사의 내용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 못하겠다).

 

 

 

이왕 말하는 김에 오세훈의 서울광장의 집회·시위를 허가제로 운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말(반박)해보겠다. 오세훈은 서울광장은 공유재산이므로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 제20조 제1항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허가해야지 그 공유재산을 사용 및 수익할 수 있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서울광장도 서울특별시장의 허가 없이는 사용 및 수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여기까지는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의 '사용'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다.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은 민법의 특별법으로, 여기서의 '사용'은 민사적인 법률행위로서의 사용을 의미한다. 즉 이때의 '사용'은 그 공유재산에 대한 재산권의 행사로서 임대차나 사용대차 등을 뜻하게 된다. 집회·시위는 민사적으로 '법률행위'가 아닌 '사실행위'이기 때문에 이런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오세훈이 이 법을 근거로 서울광장에서의 집회·시위를 허가제로 운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다.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오세훈이 하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세훈이 근거로 드는 제20조 제1항 바로 다음에 나오는 제20조 제2항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제1항에 따라 사용·수익을 허가하려면 일반입찰로 하여야 한다." 오세훈의 논리에 따라 서울광장에서의 집회·시위가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의 적용을 받는다면 서울특별시장은 집회·시위를 허가함에 있어서 일반입찰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입찰'은 경쟁매매를 뜻한다. 집회·시위가 경쟁매매의 방법으로 허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에 대해서, 그래서 공유재산및물품관리법은 집회·시위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안타깝게도 서울시의회가 오세훈에게 내세우는 반박 논리는 또 하나의 블랙 코미디다. 서울시의회는 서울광장은 특성상 '공유재산'이 아니라는 입장인데, 이것도 웃긴다. 서울광장이 서울특별시의 소유로 등록되어 있거나 규정되어 있는 한 법적으로 '공유재산'은 맞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감정에 대해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0/09/30 01:28
  • 수정일
    2014/11/07 13:01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목수정-정명훈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확실히 감정적인 글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의 일도 그랬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너무 감정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좋은 공격 소재다. 논증없이 입장만 표명하겠다. 감정이 항상 주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감정도 충분히 객관적일 수 있는 상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빨간 운동화를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제각각일 수 있다. 빨간 운동화를 보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분노는 객관적이지 않겠다. 그러나 소수자가 억압받는 상황이나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감정이지만 그 어떤 논리보다도 객관적이고 또 정확하다.

 

그 감정은 맥락없는 이성적 논리보다 훨씬 윤리적이며 사회적이다. 그 감정은 오히려 그 인간적 한계 때문에 더욱이 소중하고 더욱이 객관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리고 다시...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0/09/30 01:12
  • 수정일
    2014/11/07 13:01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나도 대충은 예감했다. 그래봤자 다시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럴 의도로 시작한 대화는 아니었으니까. 아니, 사실 그럴 의도로 시작했을지도,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또 다르게 심란하게 만들어, 지금 고통을 주고 있는 결핍의 상처를 나 자신으로부터 은폐시키려는 작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래봤자 결핍의 상처는 더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파국이다.

 

이번에는 다 닫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고, 여기서 공개하는 이유는, 나의 과거를 부정하거나 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횡설수설좀 하겠다.

 

시험이 두렵고, 내일이 두렵고, 일상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두렵다. 눈을 감는데, 해결이 안 된다.

 

온갖 부호는 다 생략하고.

 

moi, madame rosa je lui aurais promis n'importe quoi pour la rendre heureuse parce que meme quand on est tres vieux le bonheur peut encore servir, mais a ce moment on a sonne et c'est la que s'est produit cette catastrophe nationale que je n'ai pas pu encore faire entrer ici et qui m'a cause une grande joie car elle m'a permis de vieillir d'un seul coup de plusieurs annees, en dehors du reste.

 

당연히 내가 쓴 것은 아니고, la vie devant soi, folio 183.

 

고등학생 때 la vie devant soi에 대한 resume를 작성하라고 해서 주어를 원문과 일치시켜서 써냈다. 그랬더니 교사가 원문의 주어가 1인칭일 때 resume에서는 3인칭으로 주어를 통일시켜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교사가 말하는 것은 compte-rendu 식 글쓰기이고 resume는 원문의 주어와 글 순서를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사는 동의하지 않았고, 점수는 거지같이 나왔다.

 

나는 중학생 시절 resume와 compte-rendu, synthese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익히며 프랑스원문의 글을 요약하는 법을 훈련받았다. 덕분에 원문 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각각 resume와 compte-rendu, synthese의 형식에 맞게 다르게 요약해낼 수 있다. 참 쓸모 없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거지같은 점수를 받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웃기게도 하나의 언어에 능통한지 능통하지 않은지를 객관적으로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이런 잔재주를 검사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모양이다.

 

여하간, la vie devant soi는 당시의 나에게 낭만적 감수성만 불러일으켰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런 낭만적 감수성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포섭하는 의미의 전부였다.

 

이제의 나는 la vie devant soi라는 표현, 그리고 제목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것을 제목으로 글을 써야만 했기 때문에 romain gary는 emile ajar라는 정체성을 끌어들였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 la vie devant soi. 내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냐? pour resister, ou disons plutot pour supporter la vie, il faut accepter que la vie est une suite d'entrainement et rien de plus. 그래, 삶은 무엇보다 훈련이다. 훈련. 덜 아프기 위한 훈련, 아프기 위한 훈련.

 

삶은 무엇보다 깊어지기 위한 훈련이다. 지금으로서는 완전한 실패같다. 훈련. 깊게 살자. 깊게. 훈련.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