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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1/05/14 21:01
  • 수정일
    2014/11/07 12:5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많은 경우 사람보다는 책이 좋다.

 

글쎄, 책이 나에게 주는 상처는 그나마 견딜 수 있기 때문일까.

 

여하간 그래서 당분간은 인강이고 뭐고 독서나 실컷 하고 싶다.

 

그리고 인강 강사는 자기가 모르는 건 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상계=상징계라나 뭐라나.

 

게다가 언제부터 보드리야르가 실재를 예찬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게 포스트모더니즘인지도 모르겠고.

 

이 버릇도 고쳐야 할텐데, 사람을 쉽게 좋아하질 못한달까.

 

장점보단 단점이 내 눈에 쉽게 들어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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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에 대한 애도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1/05/05 08:29
  • 수정일
    2014/11/07 12:59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영혼을 찢는 것, 그리고 찢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망각되지 않은 채 주위를 맴도는 유령이지, 내 앞에 현전하는, 나타나는 저 신체가 아니다. 신체가 어찌 영혼에 일말의 영향이라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유령은 떠나지 않는다. 유령은 영혼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작든 크든 상처를 입힌다. 유령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이유는, 이 유령이야말로 내가 한때 내 마음을 다 바친 바로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유령은 얼마간 내 영혼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그것을 찢을 수도 있다. 유령을 달래는 작업은, 결코 저 기만적인 현재 속에 들어 있는 신체를 어떻게든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유령에 대한 애도는 오로지 그 유령에 대한 기억에 나 자신이 충실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을 유령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지점으로, 바로 그 지점으로 계속 회귀해서 나 자신을 쇄신하는 것, 끊임없이 쇄신하는 것, 그것만이 유령에 대한 참된 예의이다. 어쩌면 그때조차 유령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때조차 나는 온갖 시달림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련을 견딜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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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

  • 분류
    일상
  • 등록일
    2011/02/01 19:48
  • 수정일
    2014/11/07 13:0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시험이 2월 19일이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대략 2주보다 조금 더 남았다. 2주 전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진다. 너무 바빠서 없어질 수도 있고, 아예 자포자기의 심정이기 때문에 정신이 없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시점이 나의 심정을 내려놓기 위한 마지노선처럼 느껴진다. 그간 무기력했던 적은 있지만 필사적으로 무기력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시험을 약 한달 앞두면서부터는 소위 말하는 회독수 늘리기 작업이 시작된다. 시험 범위를 반복적으로 읽어서 최대한 많은 내용을 기억해내기 위한 학습 방법이다. 회독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험 범위를 1회독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읽어내야 하는 독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막바지에 가서는 하루에 약 2000페이지 가량의 법학서적을 읽어야 한다. 지금은 하루에 약 900페이지 정도를 읽고 있다.

 

읽는다기보다는 그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확인하고 바로 바로 넘어간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오늘 하루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힘 없는 아침을 맞이하였고, 헌법 책을 펼쳤으나, 결국 하루 종일 딴 짓을 하고 말았다.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이 과정의 비인간성에 질렸다.

 

누구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공간이 혐오스러울 수도 있고, 누구는 주위의 사람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누구는 시대상이 문제일 수도 있다. 내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과정으로서의 지금 이 시간을 견딜 수가 없다. 내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겨야만 하는 그 당위, 그 의미를 찾아내지 못 하겠다. 왜 내년이면 개정될 법률을 암기할 때에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문제는 이런 클리셰의 수준을 넘어섰다. 나는 규범학으로서의 법학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애정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쏟고 있기도 하다. 내가 읽고, 암기하고, 들고 다니는 법학 서적들은 이런 나의 애정에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나는 혼자서만 고민을 하고, 혼자서만 논리를 개발하고, 나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이 종이 덩어리는 침묵을 지키기만 한다. 여기에는 해답은커녕 반박조차 담겨있지 않다.

 

여기에는 대화의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재가 있다. 풍족한 대화에 둘러쌓여서는 왜 그토록 대화를 추구하고, 선망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오로지 이 곳에서, 이 삭막한 유사학문 속에서만 왜 대화가 필요한지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것에 단 한 순간도 감성을 기대한 적이 없다. 이성마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힘들었다. 지금도 힘들다.

 

이것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모른다. 형사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구성요건, 위법성, 책임이라는 범죄의 3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구성요건에는 객관적 구성요건과 주관적 구성요건이 있다. 주관적 구성요건에는 고의와 과실이 있다. 이것은 도대체 자신의 '위대한' 임무조차 망각하고 있다. 그 망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면, 범죄의 요소에 '주관성'이 들어가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을 정도다.

 

법학이 진실된 규범학이라면, 법학자들은 모든 주관성을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정립 가능한 기준들을 마련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주관적 구성요건이라니? 고의와 과실은 주관적 구성요건이 아닌 '내면적 구성요건'이다. 어떤 내면적 구성요건이 충족되어야 그것이 범죄가 되는지를 객관적으로 규정해낼 수 있어야지만 처벌은 가능하다. 이 구성요건을 '주관적'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법학은 유사학문이 되어 자신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게 된다.

 

내가 여태까지 형법을 공부하는 동안 이와 유사하기라도 한 어떤 유의미한 비판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게으름이 이들을 지배하길래 이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불평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게으름 때문에 지금 당장 내가 질식할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나는 하나의 과정 위에 있고,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질식할 것 같고, 그 과정에 어떤 학문적 진지함이나 과학적 치밀함도 없기에 질식할 것 같고, 나의 물음은, 나의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는 '통과'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기에 질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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