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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자 조선일보 칼럼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9/01 12:38
  • 수정일
    2015/05/06 18:50
  • 글쓴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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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일자 조선일보 칼럼란에 매우 흥미로운 글 두 개가 실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38면에 실린 양상훈씨의 LA 두 한인회장과 100년 전 닭싸움이라는 칼럼. 일부만 발췌해보았다.

 

"...

적(敵) 앞에서 분열하는 우리의 '오랜 전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천안함 피격이 북한의 소행인 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김정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의 상대편이 이 사건으로 득을 보는 것이 싫은 것이다. 국내 상대편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100년 전 조선 내부도 바로 이런 식으로 싸웠다.

 

천안함 침몰로 우리 군인 46명이 죽었는데 대북 결의안을 우리 국회가 다른 나라들 의회보다 늦게 채택했다. 그나마 4분의 1은 반대했다. 우리 내분은 이 지경이다. 어느 당이 '마지 못해' 낸 다른 결의안엔 북한의 책임을 묻는 어구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어이없는 결의안에 그 당의 장관 출신들이 동조했다. 어느 정권에서든 '장관'이라면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그 정도의 경험과 양식이라면 천안함 사건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그 '결의안'에 손을 들고 나선다. 살아온 길까지 버리고 패싸움에 휩쓸려 들어 핏대를 세운다.

..."

 

그리고 39면에 실린 진석용씨의 兵 복무기간 환원 논의 성급하다이라는 칼럼. 역시 일부만 발췌한다.

 

"...

다른 문제와는 달리 군사 및 안보 문제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가정들을 전제로 추론이 이루어지고, 기밀 또는 비밀 사항이 많기 때문에 일반 국민은 정부와 군 당국이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여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나는 조선일보가 무슨 정신으로 이 두 칼럼을 같은 날 나란히 기재했는지 잘 모르겠다. 양상훈씨 칼럼은 사내칼럼이고, 진석용씨 칼럼은 사외칼럼이며, 사외칼럼은 사내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사외칼럼이 사내칼럼의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는 경우는 만들지 말아야 조선일보 독자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 아닌가?

 

조선일보 안의 안티조선을 목격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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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과 용산참사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22 10:12
  • 수정일
    2015/05/06 18:5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한겨레21 제824호에 유시민과 박형준의 대담이 실렸다.

 

다음은 인터뷰의 일부:

 

 

사회 부동산 개발은 다 민간이 하기 때문에 정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느냐가 쟁점이다. 서울 용산에선 법을 집행하다 사람이 죽었다. 부동산 문제는 민간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건데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망루’가 이 정부 들어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참여정부 때도 수없이 그런 일이 있었지만, 가만히 놔뒀다. 그 대신 공무원이나 정보과 형사가 가서 농성자들을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 이러면 당신들도 갑갑하고, 시행사·시공사도 어렵고, 금융 비용도 발생한다. 얼마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렇게 한달 두달이면 협상을 했다. 심각하게 정의가 침해됐다고 생각해서 농성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생각을 완화할 정도가 되면 악수하고 의례적인 절차를 거쳐서 해결됐다. 시행사나 시공사, 지주가 약간의 손해를 봤지만, 국가는 어느 쪽도 손들어주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세입자들도 그렇게 이익 분배에 참여했으니까 (용산) 농성자들도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전국철거민연합이 망루를 지은 거다. 그런데 (경찰이) 들어와서 밟아버렸다. 이명박 정부도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잘 안 살폈고. 농성자도 이렇게 들어올 줄 몰랐다. 볼트 좀 던지고 화염병도 해가 안 될 정도로 던지면 “야야, 대화하자” 그럴 줄 알았던 거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관행적 의식으로 굳어진 측면이 있는데, 국가가 정의의 실현자처럼 “떼법” “도시 게릴라” 운운하면서 밀어버렸다. 현명하지 않은 개입 시점과 방식 때문에 문제가 커진 거다. 더구나 우리의 정의 관념 중엔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아무리 심해도 죽이면 되나. ‘먹고사니즘’만큼 중요한 게 어딨나” 하는 게 있다. 그런데 국가가 권위를 내세우고 시민 위에 군림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문하거나 성금을 보낸 사람은 소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가슴 아파하고, 죄책감과 참혹함을 느끼고, 사회정의가 짓밟힌다는 느낌을 받는 거다.

 

 

 

 

유시민 진짜 나쁘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국가는 어느 쪽도 손들어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당연히 세입자(농성자)의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국가가 '중립'적이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나?

 

정말 정말 정말 나쁜건 따로 있다. 유시민은 망루가 참여정부 때도 수없이 있어왔다고 한다. 근데 그걸 그냥 방치하나? 망루가 생기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할 생각은 안 하나? 용산 같은 경우는 관련 법률이 무려 도시개발법,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정비촉진을위한특별법, 토지보상법 등이다. 노무현 때 금융권을 통합한답시고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 만들 시간 있었으면 재개발 관련 법률이나 손봐가지고 세입자가 제때 제때 권리 보상을 받을 수 있게끔, 아니면 재개발 요건을 가중시켜 재개발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애초에 망루 같은 건 안 만들도록 할 수 있을 수도 있었잖아? 그저 참여정부때는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해결했다고 자랑하는데, 이게 좋게 말해서 협상이지 법이 전혀 예고하고 있지 않은 야메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자기네는 야메로 문제 잘 해결해왔는데, 이명박 너네는 왜 그렇지 않았느냐? 라고 하는 꼴 아닌가? 아니, 이명박이네가 잘했다는 게 절대로 아니다. 이명박이 한 것도 적법절차에 해당하지는 않는, 또다른 야메니까(물론 이게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근데 자기네가 정권 잡고 있었을 때 왜 원론적인 해결은 할 생각은 안 하냐 이거다. 그래놓고서 조금이라도 자기한테 유리한 의제다 싶으니까 '우리는 야메로 잘 해결했어'라고 자랑하다시피, 어떤 죄의식도 없이 말할 수 있냐고... 기가 막힌다. 용산참사는 이미 참여정부 시절부터 예고된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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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타자화와 남성의 윤리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0/08/12 16:23
  • 수정일
    2015/05/06 18:50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나는 남성으로서 여성주의에 대해 어떤 지점에서 발언을 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계속된 고민과 갈등에 시달렸다. 서로 엇비슷한 글들을 약간의 변주만 줘가며 작성했고, 내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지점까지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제서야 내가 어떤 글을, 어떤 지점에서 써야 할지 눈에 들어온다. 이미 많은 글들을 쓰고 나서 또 글을 쓴다는 것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다. 내가 왜,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이 글도 비슷한 이야기들의 반복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남성으로서, 남성이 가져야 할 윤리에 대한 글을 쓴다.

 

남성의 윤리에 대해 말하기 전에, 여성의 대상화에 대한 정리부터 한다. 윤리를 말하기 위한 필수 작업이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핵심이기도 하다. 여성의 대상화란 무엇인가? 대상화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인식시키는 작업이다. 여성을 대상화시킨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성으로서의 여성을 남성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사물이 특히 남성의 페니스를 위한 덮개 내지는 남성과 남성 사이에 교환되는 상품쯤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대상화는 곧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의미한다.

 

대상화는 적절한 용어이기는 하나,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 특히 대상이 주체의 주변부로 몰리게 되는 상황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도 지닌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여성의 대상화라는 표현보다는 여성의 타자화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젠더적 지형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 주변을 타자화시켜야 한다. 한국인에게 일본인은 타자이며, 노동자에게 자본가는 타자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타자화는 거의 다 상호타자화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타자화하며 주체성을 획득하듯, 일본인도 한국인을 타자화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남성주체는 다르다. 남성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여성을 타자화하지만, 여성은 그 반대를 하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에 대해 언제나 타자이며, 자기가 여성으로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여성은 절대 타자다.

 

여성이 타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남근로고스주의 담론에 의해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출발은 남자아이를 설정하고, 그 남자아이에서 페니스를 부재시키면서 여자아이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여성을 남근이 부재한 남성으로 설정하는 데서 여성의 타자화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런 설정행위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시킬 의도가 없다고 해서 여성이 타자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타자일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은 곧 남성으로서의 글쓰기에서 호명되는 여성도 항상 타자로서의 여성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포르노나 일련의 성적 묘사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글쓰기를 거의 다 포섭한다. 포르노가 여성을 ‘극단적’으로 타자화시키고 상품화시키기 때문에, 오로지 그런 방식으로 여성을 표현하는 것만이 더 명확한 타자화로 보일 뿐이다. 아무리 개인으로서의 남성이 자신의 글쓰기에서 여성을 주체로 표현하려고 해도 여성은 다시 타자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이 남성으로서의 글쓰기를 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기 위해 내가 A라는 가상의 여성에 대해, 그녀를 ‘최대한’ 주체로 설정하여 짧은 글을 써보겠다: “A라는 여성이 있다. A는 경찰이다. A는 강력계에서 일하고 있으며, 결혼을 거부하여 자신과 뜻이 맞는 남성이랑 동거를 하고 있다.” 어떤 여성의 타자화도 없어 보이지만 이 순간에도 A는 타자화된다. 여성 A라는 기표와, 경찰이라는 기표와 동거라는 기표가 합쳐진다. 이들을 결합시키면 ‘동거하는 A 여경찰’이라는 상징계 속의 지점이 정해진다. 그 이미지적 결과를 알고 싶으면 네이버 검색창에 ‘여경찰’을 입력한 뒤 ‘이미지’를 보면 된다. 경찰 자리에 교수를 넣든, 검사를 넣든, 군인을 넣든, 의사를 넣든 달라지지 않는다. 남성주체의 직업을 여성이 가지는 것은, 남근주의에서는 여성의 코스프레로밖에 안 보인다.

 

여성의 타자화를 제한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성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여성을 타자화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현실에서 이런 타자화 작업이 남성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이로 인해 여성의 타자화가 여성 억압이 된다는 것이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타자화는, 그것이 여성의 타자화라는 의식 없이 행해질 경우 그 독점적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남성의 윤리는 자기의 글쓰기와 말하기, 자신의 욕망과 무의식이 여성의 타자화라는 것을 인식하고 공개하는 데 있다. 바꿔 말해 자신의 글쓰기가 무성적이거나 중성적이지 않고 남성적임을 밝혀, 타자화 작업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 행위가 여성의 타자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계속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자로서의 비윤리다.

 

‘남성도 성적 대상화되지 않느냐’는 발언도 이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남성은 성적 대상화가 되더라도 절대 타자화, 가 되지 않는다. 남성은 지금의 무의식적 지형에서 언제나 주체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남성의 성적 대상화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는 다르다. 남성에 대한 성적 묘사와 여성에 대한 성적 묘사가 다른 것도 이 이유에서다.

 

남성의 윤리의 시작이 자신의 욕망과 글쓰기가 성별화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만약 진보적 남성들이 정말 소수자를 위한다는 정의감이 남다르다면, 여성의 여성으로서의 발화를 방해하지 않아야 비로소 자신의 행동을 윤리적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여성의 발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침묵하자는 말이 아니다. 소수자적 지위에서 하는 발언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하고, 거기에 논리, 이성, 인과관계를 너무 철저하게 요구해서 여성의 글쓰기를 다시 남성의 글쓰기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최소한 자기의 욕망이 여성을 타자화시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을 노동운동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여성운동에도 적용하는 일관성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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