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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어떤 식으로든 느낀 것들을 기록하려 했으나 결국 또 늦었다.

기사를 뒤적이다보니 다시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이 '얼굴들'을 두번째로 본 날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건,

이 다큐가 지금까지 4번밖에 상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 중 한번은 조합원들 내부에서 상영한 것이라

실질적으로 상영된 것은 3번에 불과하다.

 

어떤 이가 그런 질문을 했다.

만약 어떤 남성들의 노조에서 6년간 이만큼의 투쟁을 했다면

그리고 그 투쟁과정을 다큐로 만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민주노총에서 지원이 없었을까 싶다고.

 

얼굴들,은 감독의 문제의식이 빛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쉬운게 있다면 그 문제의식이

조합원들과 소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렵다.

'가족', 더군다나 '우리' 가족을

거리두고 바라보기는 정말 어렵다.

나만 해도 가끔 엄마 없는 삶을 생각해보면

지금 하고 있는 '짓'들을 다 때려치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가족에 대해, 그것이 사랑이든 애증이든 증오든 간에

무자르듯 뚝 잘라질 수 있는 감정도 아니며

가족주의 혹은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는게

"가족에게 정 주지 말자" 는 것도 아니잖아?

다만 내 '어머니의 삶' '내 아버지의 삶' '내 동생의 삶'을

조금은 다른 위치에서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테다.

 

실은 나도, 우리도 잘 못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너무 성급하게 다가갈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온정주의는 단호하게 끊으세요"  막 이런거지.

 

하여튼 가족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무지하게 복잡해진다.

'정의'조차 어려운 가족.

도대체 무엇이 어디까지가 '가족'인거고

사람들은 왜 '가족'을 꾸리려하는건지

나를 대입해 생각해볼수록 어려워진다.

 



기사원문 : http://sanosin.jinbo.net/Publish/labor.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803

그녀들은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영상다큐《얼굴들》

  
   

  지난 2월 10일, 노동해방학생연대에서는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그녀들의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 《얼굴들》상영회와 시그네틱스 노동자들과의 간담회를 진행했다. 《얼굴들》은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이 영풍자본에 대해 투쟁했던 기록만이 아닌, 가족 내에서의 그녀들의 위치와 여성노동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 무엇과 싸워야 했는지를 얘기했던 다큐멘터리였다. 이른바 ‘이중의 굴레’. 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투쟁에 나서면서도 한편으로는 싸우기 위해 집을 비우는 것에 대한 남편의 ‘허락’을 구해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밥을 챙겨주지 못한 자괴감을 가슴 한 켠에 놓아두어야 했다.
IMF 이후,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던 2001년은 시그네틱스 투쟁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비정규직 투쟁의 선봉이었던 한국통신계약직 투쟁이 한창이었고, 부평에서는 1750명의 정리해고에 맞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울산에서는 효성, 태광산업, 고합 화섬 3사 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있었다.

그 수많았던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시 꺼내든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받아안지 못했던 평가지점들이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놓쳐버린 그녀들의 투쟁은 당시 우리가 보아야 했던,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보지못하고 있는 것을 얘기해준다.

시그네틱스 투쟁에서 보여졌던 여성노동자들의 굴레들, 다큐멘터리 《얼굴들》을 소개한다.

 

2001년 염창동에서 2007년 파주까지

시그네틱스 노조의 투쟁은 2001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97년부터 이어진 경영난에 어용노조는 임금동결과 성과급 반납까지 약속했지만 98년, 결국 한국시그네틱스(주)는 영풍자본으로 인수되었고 염창동 공장에서 파주공장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민주노조가 건설되었던 2000년 말, 영풍자본은 갑자기 약속을 바꾸어 안산공장으로의 일방적인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파주공장에 민주노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2001년 7월, 시그네틱스 노조는 안산공장은 언제 문닫을지 모르는 창고라는 사실을 알고 원래 공정이 이전된 파주공장으로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도 싸우고 있다.


‘노동자’와 ‘아내,어머니’의 사이

다큐《얼굴들》은 해고판결을 내린 중앙노동위에 항의하는 와중에도 수화기를 통해 아이들을 달래는 윤민례 지회장의 모습부터 시작한다. ‘보통’의 경우, 아들과 통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 이상할 것은 없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투쟁하는 ‘노동자’와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야하는 ‘아내,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갈등했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투쟁의 시작점이었다. 《얼굴들》의 질문들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투쟁에 나서기 전에도, 후에도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항상 여성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뉘우기는 커녕, 가족의 식사와 뒷바라지를 해야했다. 그런데 투쟁이 시작된 후, 집회, 상경투쟁, 철야농성등의 일정들은 가족 내에서 이러한 여성노동자들의 위치와 역할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러한 균열들은 여성노동자들이 투쟁과정에서 겪는 가족과의 갈등들로 나타났다.
그러한 갈등들을 해결하는 것은 순전히 여성노동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대부분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그 자신 또한 남성노동자인 남편의 ‘허락’이었다. 대부분 기혼이고 자식들이 있었던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은 투쟁 초기부터 남편에게 이러한 ‘허락’을 구했다.

시아버지의 68세의 생신에 참석하는 대신 집회에 오기 위해 남편의 ‘허락’을 구했던 조합원부터, 철야농성을 하고 밤늦게 온 조합원에게 바람을 폈다는 등의 얘기를 하는 시부모와의 갈등, 노조활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자 남자 말을 무시한다며 화를 내는 남편과의 갈등들을 봉합하느라 애썼던 조합원들까지. 그녀들이 자본과 투쟁하는 과정은 가족 내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서울에 2박3일 농성한다고 하면은 같이 직장생활해도 보통 마누라가 챙겨주는 양말이랑 짐싸가지고 올라와서 일보고 내려가고.. 애들이 어떻게 학원을 가고 밥을 먹는지 솔직히 대부분은 신경안쓰는데 여성들 같은 경우는 그것까지 다 대책을 세우고 신경쓰지않으면 (농성이나 상경투쟁하는) 그 2박3일 집을 나온다는 것 자체가 힘든 여건이니깐”

시그네틱스지회 교육선전국장


그녀들을 옭죄었던 건 남편과의 갈등만이 아니었다. 조합원 개인마다 깊고 얕음의 차이는 있었지만 철야농성, 구속수배, 집회참석 때문에 아이들을 챙기지 못해 느꼈던 ‘어머니’로서의 죄책감은 그녀들을 더욱 가정에 얽매이게 했다. “우리도 그렇게 커왔으니깐..”이라며 그녀들을 옭아매고 있는 ‘어머니 역할’에 대한 무언의 강요는 그녀들로 하여금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느끼는 죄책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자본과의 투쟁 속에서 그녀들은 ‘어머니, 아내 노릇’과 ‘노동자 역할’ 사이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조율해야 했다. 한 조합원과의 인터뷰 중 어디선가 들려온 “물 좀..”이라는 남편의 목소리에, 여성노동자로서 겪는 투쟁의 어려움을 얘기하던 ‘여성노동자’는 어느새 ‘아내’로 돌아가 남편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모습에서 수년에 걸쳐 투쟁현장과 가족 사이를 오갔던 그녀를 발견한 것은 그저 착시에 불과했을까.
남편과 자식들의 밥을 챙겨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남편으로부터의 허락, 가족 내에서 위치하고 있는 ‘아내, 어머니 역할’을 방기함으로써 가지는 죄책감, 그리고 투쟁의 정당성 사이에서 그녀들은 끊임없이 동요하고 갈등해야했다.


가족대책위, 서로 다른 의미

노동자들이 투쟁하게 되면 보통 가족과의 연대가 수면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 ‘연대’는 남성노동자들과 여성노동자들에게 서로 다르게 규정된다. 가족대책위의 조직과 활동은 그것을 잘 드러내었다.
노동운동에서 가대위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가대위는 주로 남성노동자의 ‘가족과의 연대’를 위해,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기 위해, 때로는 실질적인 투쟁동력으로 활동하였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라는 측면에서는 공동대책위등의 기구와 같았지만, 그 구성원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가족이라는 측면은 가대위 운동을 특징지었다. 가대위가 조직되었던 것은 남성노동자들의 사업장이 대부분이었고, 그 주목을 받은 것은 특히 98년 현대자동차 투쟁이나, 01년 대우차 투쟁, 02년 발전노조 대공장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였다. 여성노동자의 경우는 남성노동자와는 달리 조직이 거의 불가했고, 그나마 손에 꼽을 정도였다. 비정규직 투쟁에서도 하이닉스매그나칩, 현대하이스코, 포항건설노조 투쟁등 남성노동자들의 가대위가 많았다.

남성노동자들의 가대위는 투쟁의 정당성을 가족에게 얘기하고 설득하는 과정이었기도 했지만, 돈을 벌어오는 가장에 대한 가족의 지지와 지원의 의미가 더 컸다. 하지만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에겐 조직된 가대위는 ‘아내, 어머니 노릇’을 못하는 것에 대해 남편이 ‘허락했다 혹은 양해했다’는 의미였다.


“남성사업장들이 싸울 때는 가족대책위 역할이 더 감성적인 호소, 내 남편이 싸우고, 내 애들의 아빠가 싸우고 그런 감성적인 호소를 하고.. 근데 시그네틱스 경우는 부인들이 자기 아내인 조합원들이 하는 일을 허락한다는 느낌? 좀 그런 게 없잖아 있었던 것 같애요. 허락하고 같이 도와줄 건 도와줘야지. 이런 느낌?”

시그네틱스지회 교육선전국장

 


시그네틱스 부지회장은 인터뷰에서 “투쟁에 결합을 할려면 전보다 더 잘해야 하는거야. 우리 결혼한 조합원들은. 집에서 모범이 되야 하는거야. 반찬도 더 맛있게 하고.. 그렇게 조합원들에게 교육했고, 조합원들도 그렇게 했고... 그래야 투쟁에 결합할 수 있으니깐.”이라고 얘기했다. 가족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아내, 어머니 노릇’을 더 열심히 해야했다.
이렇듯, 남한 노동운동에서 가대위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에게 서로 다른 의미였다.


‘가족주의’에 기댄 호소

“대책없는 정리해고 우리가정 파탄난다” <98년 현대자동차 가대위>

“처자식 걱정 뚝! 돌아오지 마세요! 승리의 그날까지”, “가정을 지키는 발전노동자의 투쟁에 승리의 순간까지 힘내세요” <02년 발전노조 가대위>

“우리 남편 살려주세요” <06년 현대하이스코 가대위>

2001년, 자본의 구조조정 공격이 전 방위에 걸쳐서 들어오던 당시, 시그네틱스 투쟁도 그 한가운데 서있었다. 시그네틱스 가대위 활동양상도 다른 투쟁에서의 가대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자 파주로! 꼭 가야한다!”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즐겨하는 구호였다. 그녀들이 가야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임금동결, 성과금 삭감까지 감내하며 살려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노동자는 분명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가족’에 기댄 호소가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얼굴들》에서 보여진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발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저희 기혼율이 80%입니다. 여기 있는 노동자들 다 아줌마입니다. 집에 아이들 있습니다. 아이들 챙기지 못하고, 가정 챙기지 못하고. 약정서, 약속지키라고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한강대교 고공농성 중, 한 조합원의 발언


노동자 투쟁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자본과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응하여 노동자들은 가대위를 통해 동정적 여론에 호소했다. 남편을 살려내라는 아내의 절규, 아빠를 일하게 해달라는 어린 자식의 외침, 혹은 어머니가 없어 아이들이 불안해한다는 남편의 말, 집에 있어야할 가정주부들까지 투쟁에 나섰다는 발언은 가대위 뿐만 아니라, 남한의 노동운동에서 자주 쓰였던 구호였다. 이는 남성노동자를 가족의 생계 주체로 놓은 “정리해고=가족생계파탄” 등식의 구호를 외침으로써 ‘남성 위주의 가족’을 신성시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동정에 기댄 것이었다.

‘남성노동자=가족의 생계주체’라는 등식은 ‘남성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으로 남편, 아내, 자식으로 구성된 정상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가족임금제가 통용되던 현대자동차, 발전노조등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일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대공장 정규직 남성노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노동자 가족은 남성노동자의 임금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또한,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수는 끊임없이 증가해왔고, 2006년에는 50.1%의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했다.(2006. 7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추이”, 통계청) 이러한 현실은 결코 남성노동자만이 가장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준다.

물론, 노동자들의 가족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의 이면은 남성노동자가 생계주체로서 여성의 무급가사노동에 기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에 기반한 구호들은 ‘남성=가장, 여성=주부’라는 가족 내의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족 내의 성역할’은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희생에 기대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있는 남성과 그렇게 함으로써 재생산비용을 노동자 계급에게 전가하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기대한 구호들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욱 어렵게 했다.


투쟁에 족쇄가 되어 돌아온 가족주의

보통 남성 노동자는 투쟁 중에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서 생기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는 한편, 여성노동자는 투쟁 중에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각각 가대위를 조직하는 것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고, 투쟁과정에서 외쳐졌던 가족주의, 동정주의에 호소했던 구호들도 이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똑같은 부담일 수 없고, 또한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도 않는다. 남성노동자들의 부담은 사회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남성’이기 때문에 희석되었고, ‘노동자의 정의를 외치는 주체로서’ 보상받는다. 그러나 여성노동자의 ‘아내, 어머니 노릇’은 그녀들의 투쟁에서 있어서 확실한 제약이 되었다.
이 땅의 여성노동자에게 ‘아내, 어머니 역할’은 분명 자본의 착취와 가족에 대한 희생을 동시에 강요당하는 ‘이중의 굴레’였다. 그리고 여태까지 외쳐온 ‘가족’ 또는 ‘어머니’에 관한 구호는 여성의 ‘이중의 굴레’를 숭고하게(?) 포장함으로써 남성노동자들에게는 가정에서의 남성의 지배를,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이중의 굴레’를 더욱 강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자각하는 여성노동자들

오랜 투쟁으로 돈을 벌지 못해 아이들의 급식비 8만원을 주지 못했던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가서 돈 벌어서 한달에 두명에 (애들 급식비) 8만원 주면 되는데, 그걸 (학교에다가 사정설명하고) 공짜로 달라고 얘기해야 되는 거잖아. 하지만 8만원 벌려면 이걸(투쟁하는 걸) 그만둬야 하거든. 그게 싫은거야. 나가서 (투쟁)하는게 낫지. ..(중략).. 왠지 고만두면 내가 나한테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 있잖아. 그게 너무 싫거든. 그래서 그걸 지킬려고 무지 애를 쓰고 있는데 ○○아빠가 옆에서 계속.. 불을 지르고 있거든. 그래서 ○○아빠 마음도 안정을 시키면서 나의 자존심도 지켜가면서.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게 요즘에 나의 고민이야.”

《얼굴들》중, 한 조합원의 인터뷰


그녀는 자신이 외치고, 돌아가려 했던 가족에서의 “어머니, 아내 노릇”이 오히려 투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남성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가족’이 여성노동자 자신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챙겨주지 못한 데서 오는 아이들에게 가지는 미안함, 저녁밥을 지어주지 않아 느끼는 남편의 불만등 노동자로서 정당한 자기권리를 찾고자하는 여성들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여성노동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녀들은 투쟁하면서 생기는 가족 내의 갈등들을 봉합하고 다시 ‘가족’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가족’을 자신이 진정으로 돌아갈만한 공간으로 재구성할 것인가. 가족주의에 기댄 구호들이 스스로를 얽매이게 하는 게 아니냐는 감독의 질문에 대한 윤민례 지회장의 대답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공간이 바뀌어야 하는 곳임을 얘기한다.


 

“그러니깐 바뀌어야 되는 거고. 난 집에서부터 투쟁한다(고) 그러거든? 노력 중이고 투쟁 중이라고 생각해. 꼭 시그투쟁 뿐만 아니라, 시그투쟁 끝나고도”

윤민례 지회장

 



《얼굴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

△ <얼굴들> 상영회에는 투쟁 중인 새마을호 승무원등 많은 동지들이 참여했다
△ 간담회 중인 시그네틱스 윤민혜 지회장

 



2001년의 “얼굴들”과 2007년의 “얼굴들”을 서로를 마주한다. 그 대면은 비단 여성노동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마주함, 남편과 아내의 마주함, “얼굴들”은 여성노동자들의 가족 문제가 더 이상 여성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려준다.

상영회가 끝난 뒤, 간담회에서 그녀들은 이 다큐멘터리가 이런 내용인 줄 몰랐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본 가대위의 남편들은 영화를 잘못 찍은 것이 아니냐고 했고, 여성노동자들은 투쟁 내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영화를 보고 ‘생각’하게 되었고, 더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녀들은 ‘전진’하고 있었다.
 
글 : 이강우 needle@jinbo.net
등록일 : 200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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