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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짠 옷감과 같은

뻐꾸기님의 [참 예쁜 안전관리자] 에 관련된 글.

   그 회사에 갈 때 마다 문 앞에 뭔가를 붙여놓은 걸 읽어 본다. 오늘은 가보니 세익스피어가 했다는 말을 붙여 놓았다. 인생은 선과 악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짠 옷감과 같다던가 그 비슷한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 바뀐다는 이 글귀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대하여 인내심을 길러라 이런 종류의 것이다. 



   구조조정과 합병의 결과 70여명 규모의 작은 회사로 변해 있었다. 살아남은 안전관리자의 얼굴이 별로 밝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본다고 반가와서 웃었는데. 알고보니 이번 작업환경측정결과 소음이 노출기준을 초과했다고 한다. 그 측정일이 한달에 한 번 꼴로 있는 작업물량이 최대인 날이라 재측정을 요구했는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어쩐지 "내년에 또 만나요"하고 인사를 하는데 "내년까지 있을 지 모르겠어요"하더라니. 에구에구. 이를 어쩐다.

 

  #1. 20세된 남자가 요당이 4+라 물어보니 소아당뇨병을 진단받은지 4년째인데 인슐린 주사를 맞았다 안 맞았다 한단다. 집이 서울인데 여기 취직해서 주말에만 간다. 그런데 이번 주엔 깜빡 잊고 인슐린을 안 가지고 와서 그냥 지냈다고 한다. 허걱. 소아당뇨병은 교대근무에 부적합한 질병인데......당장 병원에 가도록 했다.

 

  #2. 반복적인 허리숙임이 있는 발포공정에서 일하는 20대남자는 허리가 아픈 지 6개월되었다며 이렇다가 허리를 못 펴는 장애가 생기는 것 아니냐고 물어왔다. 14시간 작업하고 나면 아프던 것이 점점 심해져 이젠 4시간 작업하고 나면 아파서 일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증상으로 보아 근육성 통증인 것 같으니 일단 허리부담이 적은 작업으로 옮기고 물리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보자고 했더니 절대 안된다고 하며 회사에 보고도 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자기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허리아프다고 하면 짤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올 8월에 정규직 전환이 될 지도 모르는데 그 때까지 참아보겠다고 한다. 

 

   2년전 이 회사에서 외상과염이 심했던 남자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시간이 없으니 여름 휴가 때 병원에 가겠다고.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보니 결국 수술을 했고 계속 통증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 때 내가 강력하게 말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후회를 했었다.

 

   그래도 나는 이럴 땐 작업전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 못 한다. 그가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최종 결정은 그가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정기적으로 우리 간호사를 만나고 증상이 더 심해지면 그 땐 고용형태에 관계없이 조치를 취하자고 하고 만약 법적인 문제를 의논하고 싶으면 조**노무사를 찾아가라고 알려주었다.

 

   검진끝나고 안전관리자에게 만약 비정규직이 요통으로 타부서로 작업전환을 하게 된다면 다음 계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물어보았다. 안전관리자는 작업전환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다음 계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정규직 전환을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다. 아, 모르겠다. 일단 좀 지켜보자. 담당 간호사에게 인계했다.

 

   건강의 직업성 위험요인에 대하여 조직적인 수준이나 개인수준에서 관리한다는 것은 복잡한 의사소통과정을 필요로 한다. 당사자의 판단과 의지, 부서장의 의견, 사업장 안전보건관리자의 의견이 충분히 토론된 후에 결정되어야 한다. 전에 이 회사가 잘 나갈 때는 그런 일들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아니다. 

 

  1999년에 산업의학실무를 처음 시작하면서 결심한 것은 제도권내에서 하는데 까지 해보자는 것이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가 조금 넘는 나라에서 '제도권' 산업보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머지 90%에 대한 대안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에 진전이 없다. 공장의사가 많은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작업장의 심각한 문제는 예방하고 살아야 한다, 노력하면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말수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 

 

 #3. 갓 스무살 쯤 된 여자가 자궁경부암 치료중이라고 하여 깜짝 놀랐다. 들어보니 '임신을 했었다. 오빠도 오빠네 엄마아빠도 다 아는 사이라 아기를 낳으려고 했는데 산부인과에 가보니 자궁경부암 초기라고 해서 원추절제술(?)을 받았다. 아기는 이번엔 낳을 수 없다고 해서 인공유산을 했다"고 한다. 갓 스무살에 그런 병이 온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고 그렇다 하더라도 진짜 수술적응증이었을까 싶다. 

 

   멘델존박사의 "여자들이 의사에게 어떻게 속고 있나"라는 책에 나오는 가지가지 사례들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부쩍 현대의료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더 든다. 지금까지의 주된 관심은 사실 의료의 접근성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즘엔 의료가 정말 사람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하는 사례들을 더 많이 접하는 것 같다. 검진을 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empowerment)을 가질 수 있도록 적절한 정보를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하지만 교육수준이 낮고 생활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 대한 권고일수록 생의학적 모형에 치중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의사-환자관계에서 내가 갖게 되는 아주 작은 권력이 점점 더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글을 시작할 때는 하늘이 잔뜩 찌푸렸는데 지금은 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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