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검진도중 받은 전화

  새로 이 지역으로 이사온 사업장이다. 높은 수준의 기술에 기반한 제조업체.  노동자의 반 이상은 석사급 연구원.  진찰받으러 들어오는 사람마다 기분좋게 인사도 잘 하고 전반적으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아직 본격적인 생산활동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사람을 채용하고 있는 곳이어서 예상인원보다 열 명정도 추가로 배치전 검진을 했다.

 

  이 회사의 특징은 중견간부들의 혈압이 매우 높다는 점.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들어보니 8시출근 12시 퇴근,  지난 일년간 휴일에 쉬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제조관리, 개발, 영업까지 모두 총괄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작업관련 뇌심혈관 질환에 대해서 설명하고 일을 조절해야 한다고 하니까 내가 제시하는 방안마다 불가능하다 했다.   예를 들면 적절한 위임 -> 위임할 만한 사람이 없다-> 위임할 만한 사람은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 훈련시킬 시간도 없다 -> .... 등 .  긴 대화중에 어떻게 그렇게 쪽집개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아시냐 한다.  어떻게 알긴요, 이런 분이 많으니까 잘 알죠. 

 

  회사 초기에 일시적으로 과로를 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앞서 말한 간부외에도 운송작업자들 5명중 4명은 혈압이 높았다.  장거리는 9시간까지 급하게 배송하는 일을 하는데, 야간운전할 때는 특히 더 힘들고, 늘 피곤하다고들 했다.   이런 경우에 본인이 어떠한 위험에 처해있는 지를 알려주는 것과 회사측에 과로에 의한 직업성 질환 예방의 필요성을 보고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처음 검진하는 곳이라 확인할 것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는데, 중간에 어느 회사 노조 지회장이 전화를 했다.  검진끝나고 전화하겠다 하고 끊었는데, 검진이 끝나자 마자 사무장이 또 전화를 했다.  첫번째 용건은 우리 병원에서 최근 손가락의 퇴행성 관절염 진단을 받은 노동자가 있는데, 이게 업무상 질병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손가락이 안펴지는 증상(아마 방아쇠 증후군) 환자에 대해서 업무관련성과 사후관리에 대한 의견을 달라는 것이었다.

 

  답변을 하기 전에, 이 전화를 왜 나한테 하는 지를 물었다. 그 회사 담당 간호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성의껏 잘 처리하고 있고 사측에 분명한 권고사항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노조측은 사측으로 부터 전달받은 내용이 없기 때문이고, 담당 간호사/의사에게 말해도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질문받은 건에 대해서 반복해서 설명을 하고 나서 앞으로 이런 문제는 노사양측이 함께 한 자리에서 우리측 담당자가 정식으로 보고하고 의논해서 처리하는 방향으로 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담당 간호사에게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냐?  열심히 일한 그녀.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그가 딱히 잘못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노사양측 중 한 쪽하고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 일은 생길 수 밖에 없다.  사업장 방문시마다 노조 사무실에 가서 의견을 정기적으로 청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으로 신경써 달라.  이번 문제의 해결을 통해 노사 양측의 신뢰를 바탕으로 일을 잘 해나가기를 빈다 했다. 

 

  우리 과에 명확한 업무분장이 있지만 사업장 담당자나 노동조합에서는 이러한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사정을 좀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전문가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서 뭔가를 해결해 달라 하는 일이 많다.  내가 특검에서 직업병 판정이 나갈 만한 사안은 아니다 하자, 노안부장이 과장한테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해달라 하기도 한다.  거꾸로 다른 교수가 맡은 사업장에서 나에게 연락을 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일이 계속 되다 보면 장기적으로 그 사업장의 보건관리는 안정화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오전 내내 검진하느라 에너지를 쏟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삼십분이상 이런 문제로 통화를 하고 나니까 잠깐 짜증이 났었다.  조직내에서 적절한 역할분담을 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하는 것 뿐 아니라 조직 전체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게 일해나가기란 원내 쉬운게 아닐진저.  그냥 이렇게 꾸준히 가야지 뭐 별 수 있겠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