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연금술사

도지히 공부가 안되서 친구가 잠시 빌려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었다. 1시간 정도에 뚝딱 읽어 치웠다. 내가 계속 여행을, 돌아와서는 내가 달라져 있는 그런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졸랐는데 결국 하는 수 없이 이 책을 빌려준거다. 여행, 그것은 이제 설레임이 아니라 나에게는 도전이고 변화이다.

영화 토탈리콜. '미래에도 여전히 웬만한 모델 허리 굵기'만한 팔뚝을 소유하고 있는 더그 퀘이드는, 화성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하지만 돈이 없어 가지를 못한다.
"화성산을 등반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리콜을 방문하세요."
리콜이라는 여행사를 찾아간 퀘이드. 그는 여행사 직원의 상품 소개에 의구심을 갖는다.

"실제 여행을 갔다 온 것처럼 추억을 가질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여행이후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그건 사고죠. 그런 일은 아주 흔하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죠."

그러면서 퀘이드는 여행사 직원이 진짜하고 똑같은 화성 여행 기억을 심어준다는 회사 광고를 점점 신뢰하게 된다. 그러다 여행사 직원은 파격적인 제안을 하게 된다.

"모든 여행은 다 똑같죠. 모든 여행의 공통점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똑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게 어떻다는 말이죠?"
"달라져 있는 새로운 모습, 그것을 원하지 않나요? 우리 리콜에서는 '자아여행'이라는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결국 퀘이드는 여행사 직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밀 요원이 돼서 화성을 구하게 된다는 기억을 이식받기로 한다. 그러나 그에게 처해진 운명은 그를 단순하게 기억을 이식받는 조건의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의 대화는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정리한 거니깐 혹시 영화를 우연찮게 보고나서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지어다.)

오늘 정말 만만디 정신으로 읽었던 '연금술사'는 흡사 고은의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를 연상케하지만 주인공'산티아고'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호탕함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재미없는 소설이다. 외국 소설은 자고로 번역이 중요한데, 그 책의 저자가 밋밋한 글쓰기를 했는지, 아니면 번역가가 밋밋하게 번역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가 생각났다는 말이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앞뒤를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에 모든 것에 몰두한다. 도자기를 빚는데 손가락이 걸리적 거리면 도끼로 잘라버리고, 모든 것을 투자했던 사업이 일 순간에 무너진 후에도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우릴 방해할 것이 없다"며 오히려 홀연해진다. 이미 그는 대자유인인 것이다. 조르바는 결국 자신이 초연한 존재로, 모든 것에 대항하지만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 이미 바람처럼 세상을 비집고 들어간다.

'연금술사'에서는 인간 산티아고 또한 연금술사의 마지막 진언. 바로 연금술은 바로 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언어'가 숨겨진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결국 '사랑'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부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늘 놓치고 있는 것을 점지한다. 그건 '떠남'이다. 산티아고도 조르바도 화엄경의 선재도 모두 '떠남'으로서 얻는다. '떠남'은 하나의 비움이다. 그 비움이 결국 모든 것을 얻게 하지만 그들은 결국 얻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참다운 '얻음'이다.

매트릭스에서 우리는 그러한 '비움'='얻음'의 동시다발적인 개념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사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매트릭스는 일시적으로는 모르지만 영구히 인간을 그 속에 가둬놓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탈출하려고 하는 것인 셈이다. 있다, 그러나 없다. 그것이 매트릭스에서 숟가락의 존재에 대한 오라클의 설법처럼 결국 모든 양상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두 개로 쪼개보는 우리의 허망한 사고에서부터 시작된다.

메시아는 결국 자신이 되어야 한다. 토탈리콜의 퀘이드나 매트릭스의 네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깨어나기 위해 각고의 시련을 겪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자피 세상을 구원한다는 목적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떻게 변화해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자신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과 의지의 종합선물세트가 동시적으로 인류의 미래와 함께 합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건 이미 독수리 오형제에서도 증명된 바가 있다. 나는 그 오형제가 핵가족시대에서 점점 퇴물이 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아쉬움....

오늘도 여기를 떠나면서, 언젠가 완전히 떠나버릴 이 공간에 모든 주변을 찬찬히 돌아본다. 구석구석 말이다. 어짜피 존재는 다들 사라지거나 변질되는 법이니깐.

2003.08.22 00:07:3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