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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suit of Happyness

 

행복을 찾아서...

 

윌스미스가 주연인 그 영화..오늘은 너무 우울해서 그 영화를 봤다. 50분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확 꺼버릴까 생각했다. 너무 불행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영화가 예상하는 미국식의 행복의 결말도 싫었다.

 

그러나 그러나 영화가 손짓하는 대로 따라 갔다. 그 영화에서 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내용이고, 하나는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1. 행복을 찾아서...극중 크리스 가드너(윌스미스)의 린다(마누라, 이름 모름)가 자길 떠나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비오는 날 전화부스에서 듣게 되는 장면. 그리고 제퍼슨이 그려진 동전을 본다. 그가 초안했던 "행복추구권". 그렇다. 행복은 누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일 뿐.

 

행복은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쉽게 주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행운이라는 것과 달라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얻게 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정신이다. 그냥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것을 자위하면서 살아도 행복이 될 수도는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을 최대한 활용할 때, 그 이상의 가치가 주어질 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생각이 달라져야, 행복도 온다. 한대수의 책을 읽으며 느꼈다. 음악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이는 뭔가가 부족했기 때문에 음악을 통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레논도 엄마없는 설움이, 한대수도 옆에 아빠가 없었던 기억 때문에....그래서 행복은 느리게 찾아온다. 아주 느리게. 노력하며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2. 진보도 마찬가지다. 서두를 때, 과오를 범하고 서로 싸우게 된다.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 김주익 열사 이후, 난 내 부모님의 집인 영도의 한진중공업이라는 회사만 보면 오금이 저린다. 아직도 그의 육성과 그이를 추모하는 음성을 들으면 이성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눈구멍에서 눈물이 흐른다.

얼마전 허세욱씨도 마찬가지다. 난 그의 진보를 믿는다. 원래 진보는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이다. 짜증날 정도로 천천히 가면서 갑자기 뒤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러나 진보는 앞으로 간다는 믿음으로 간다. 그러나 허세욱씨는 왜 혼자만 빨리가려고 했는지...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이들을 이제는 막아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막고 싶다. 신영복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고 했다. 진보의 씨앗이 살아야 진보가 성장한다. 마지막 남은 씨앗까지 태울 때 남는 것은 재밖에 없다. 타버린 재 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들이 가버리면 나 같은 사람은 부끄러워서, 못견뎌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그래도 마지막에 그가 거친 숨을, 전태일이 거친 숨을, 김주익이 거친 숨을 내 쉬며 마지막 한 숨을 내쉴 때 마지막으로 가진 한 알의 씨앗을 건네고 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나는  그런 건 이제는 싫다. 살아라. 살아라. 한 알씩 살아남는 진보의 씨앗이 아니라 풍성하게 민들레처럼, 억세처럼, 수만개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라.

 

나와 나의 동지들을 위해, 그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뿌린 그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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