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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04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공돌
  2. 200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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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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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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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돌
  5. 2007/12/04
    짝사랑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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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씨. 이 양반 어릴 때부터 안 해본 것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면서 공부도 곧잘 했다죠. 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태백이 어릴 때 산에 들어가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싫증이 나 그만 공부를 때려치우고 산에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산기슭 아래 냇가에서 어느 할머니가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이태백이 묻습니다.


“할머니, 도끼를 갈아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하고 있네.”
할머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을 이태백은 어떻게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사자후와 같은 한 마디가 이태백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중단하지 않는다면야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지.”
마부작침(磨斧作針). 결국 이태백은 산으로 다시 들어가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대 모방할 수 없는 최고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는 과정은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신호이지요. 중도에 포기해버리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의 고통은 피할 수 있습니다.

참터가 올 하반기에 들어 할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수다공방 디자인 공모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패션쇼 준비에도 여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큰 행사들이라 몇 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참터가 이런 큰 행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부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었죠. 그러나 수다공방 교육과 패션쇼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어 본 셈이죠. 그러나 마냥 바늘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요. 이제는 그 바늘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시는 분들도 많을뿐더러, 이제는 본격적으로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을 당당히 판매하여 소비자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검승부를 해야 한단 말이죠. 물론 그 길이 쉽지 않지만,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지난 시간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의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바늘로 실을 꿰어 한땀 한땀 수를 놓아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날까지 너무 기다려집니다만. 그래서 참터는 수다공방 교육생님들과 회원님들의 진심어린 관심과 참여를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다면야 함께 끝장을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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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인연

 

‘인연’이라는 게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들이 맺고 있는 인연은 몇 천 겁(劫)에 걸쳐 단 한 번 이어지는 거라죠. 그 한 번도 짧은 울림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필 꽂혔다’고 하는 말이 그런 것이겠지요. 그게 찰라(刹那)입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겁’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인데, 겁이라는 시간은 상상이 가지 않는 시간일 겁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km 정도 되는 큰 바위를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이 그 바위를 비단으로 스쳐서 그 바위가 완전히 닳아 없어지면 그게 1겁이라는 시간입니다.

 

이에 반해 ‘찰라’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하는데 이것도 상상이 안갈 겁니다. 2명의 남자가 여러 가닥의 명주실을 팽팽하게 당겨 잡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날이 매섭게 선 칼로 단숨에 명주실을 자릅니다. 그 때 그 한 번의 내리침으로 명주실 한 가닥의 허리가 끊어지는 그 시간이 64찰라 정도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계산해보니 75분의 1초 정도라고 하네요. 계산한 그 분도 대단하십니다. 여하간 1 찰라에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지고 바뀐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일생에 단 한 번 주어지는 우주 간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의 시작은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인연을 놓치고 삽니다만. 모든 인연을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도 단 하나의 인연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키고 살아갑니다.

 

가끔씩 참터의 회원이 되십사 권유하다보면 저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너 그 일을 왜하냐’고요. 심지어 이 일을 돈받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물론 수다공방에서 만든 옷을 팔러 다닌 적이 있어 ‘보따리 장수’로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하간 그렇게 물으면 인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연에는 나쁜 인연이 있습니다. 나쁘게 맺어진 인연은 평생 서로의 골을 파고 상처를 안기며, 증오하고 복수심에 가득차게 합니다. 나쁘게 맺어진 인연은 번식력이 좋아서 증오에 증오를 낳고, 복수에 복수를 낳습니다. 늘 다가올 인연을 맞이하려면 나쁜 인연부터 청산해야겠지요.

 

참터와의 인연. 모든 사람들은 좋은 인연을 원합니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만들어지지만,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사건, 집단과도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연은 과학적인 뭔가도 아니며, 다만 숙명에 가까운, 그 분이 오셔서 맺어주는 ‘계시’에 가깝다는게 제 생각입니다만. 농담같은 이야기 같지만 것도 그럴 것이, 좋게 맺어진 인연도 번식력이 좋아서 또 다른 좋은 인연을 만듭니다. 그렇게 만나고, 또 만나서 하는 일들이 인연이 닿아서 하는 일인데 어떻게 그것을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인연이 다가왔다면 오랫동안 유지하고 가꿀 수도 있어야 겠지요. 우리 소식지도 그런 인연을 만들고, 가꾸는 소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우리 소식지가 회원님들과 참터 식구들 간을 잇는 인연의 실타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달콤한 인연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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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창세기

 

우리『참신나는 소식』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창신동 이야기들은 저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도엽 선생이 만나는 ‘아줌마’들의 ‘가슴앓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점점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가슴앓이가 그이들의 인생에 성장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랜 ‘지병’이자, 삶의 ‘관절염’같은 존재로 늘 자신들을 눌러왔습니다. 그래서 그이들의 삶을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머리 속에 먹물이 끼어 이제는 씻어도 잘 탈색되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시다의 고통도, 남편의 폭력도, 외환위기의 충격에도 그이들은 몸부림쳤지만 그런 가시덩쿨을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은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있고, 함께 웃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삶이 자신을 지치게 할 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그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신’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 번지르르한 지식으로 칠갑한 가식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금방금방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쉽게 현혹되는 저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매일매일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내야 한다’고 주문을 외치며 수많은 절망의 손목을 끊어내면서 시퍼렇게 멍든 손발로 미싱을 돌려야 했던 우리 언니, 누이, 형님, 오빠들.
 70년대 혼돈과 폭압의 역사를 뒤집으면서, ‘나’라는 존재는 ‘우리’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고, 그이들의 몸은 ‘한 몸’이 되고 ‘한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이들이 창신동의 ‘창세기’’를 연 주인공이며, 우리 봉제의류 산업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창신동의 역사는 ‘하얀 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싱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새 살이 차오르는 고통을 이겨낸 손들이 만든 역사입니다. 그 손으로 조막만한 엷은 가슴이 찢어질 때마다 짜깁고, 또 이어붙이며 이윽고 너덜해졌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의 색깔은 오색의 찬란한 모양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밤에도 창신동, 아니 미싱 아래 가느다란 바늘에 초점을 모아 한 올 한 올 수를 짓는 이 땅의 모든 창세기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단박에 세상을 열어내진 못하지만 열 번 스무 번 절망을 이겨내며 엮어낸 희망이 비단융단처럼 세상을 빛나게 만듭니다. 그 비단융단같은 세상을 꼼꼼히 지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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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몸살

감기몸살

 

제 몸을 함부러 다룬 탓일까요. 한 몇 일, 제 몸에 바람이 불고 혹독한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기어올랐습니다. 아프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제 몸을 비난하고 미워했습니다. 평생동안 몸과 정신은 서로를 길들여가며, 의견을 맞춰가면서 살아갑니다. 아프다는 것은 몸과 정신이 반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내 몸에서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사회는 오죽할까요.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유마거사(維摩居士)에게 그이의 병이 왜 생겼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세상이 병들어서 나도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병이 드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제 것이 아닌데 어찌 몸에 드는 고통스러운 물건마저 나만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사회의 병이든 모든 이의 아픔이고, 고통일 때 그 병은 완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37년 전, 철옹성 같이 버티고 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듯한 세상 사이로 제 몸을 불살라 인간다운 삶의 길을 낸 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이의 죽음을 모두의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모두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몇 일전 제 몸이 불덩어리가 된 날, 한 택시노동자가 온 몸에 불을 당겼습니다. 그 또한 우리 민중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 ‘한미FTA’를 반대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제 몸을 불살라야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일까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비정상적인 이 나라가 원망스럽습니다. 그이를 설득할 능력도 없이 한미FTA를 과연 했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열사달력의 매일 칸마다 빼곡히 차 있는 열사들의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한 뭔가가 올라옵니다. 그 뭔가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대에 대한 분노심과 배반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노심과 배반감은 쇳불로 벌겋게 달아오른 채 좀처럼 삭아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근근히 획득한 ‘사회적 발언권’을 통한 생존의 소리를 현 정부가 듣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감기몸살에는 걸리지 않았는지, 그런 ‘사회적 질환’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말해도 듣지 않아 생기는 ‘속병’은 늘어만 가고, 들어도 모른 척하는 ‘이명증’은 더욱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감기몸살에 합병증까지. 감기몸살도 정복될 수 없는 병이지만, 이 병을 그냥 방치해 두었다가 큰 병이 되면 수술로도 완치될 수 없습니다.

 

제 몸에는 건강이라는 평화가 다시 찾아왔지만 우리 사회의 평화는 언제 찾아올지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달의 참신나는 소식을 전하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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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부터 시작하자

짝사랑부터 시작하자

 

“너랑 나랑 가는 길은 다르지만 한번 끝까지 가보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얼마 전 ‘하얀거탑’이라는 MBC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그의 라이벌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주인공이라는 작자는 야망에 눈이 멀다 못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고, 그의 친구는 맹한건지 착한건지는 몰라도 친구의 과도한 출세욕을 경계하지요. 그래서 가는 길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의 궁합이 절망에 가까운 수준이라도 친구랍시고 깊은 우정을 과시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관심은 친구를 만들지만 무관심은 적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반대의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관심’이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저 또한 지긋지긋하게 오래가는, 말마따나 ‘안보면 보고싶고 보고나면 이 갈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만나면 서로 못잡아서 먹어서 안달입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은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상대방에게 무관심해집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말이 이해갑니다.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구하는 경지에 다다르면 상대방에게 관심을 얻게 되고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짝사랑 요거 돈 안들고 상대방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매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태껏 우리 ‘참신나는 소식’은 명랑하고 즐거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근데 고민에 빠졌습니다. ‘참신나는 소식’이 친구처럼 여러분 곁에서 잔잔한 소식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죠. 이런 고민의 시작에는 반성도 함께 따르더군요. ‘참신나는 소식’을 ‘라면받침’으로 사용했다는 죄책감. 회개하는 마음으로 우리 소식을 제대로 전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먼저 짝사랑, 짝사랑부터 하자. 우리 회원들과 독자들을 먼저 짝사랑하자. 관심받기 보다는 먼저 관심을 가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친구도 되고, 사랑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해서요.
우선 점수를 좀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참신나는 소식’은 빗질도 하고 옷매무새도 새로 고쳐가며 새단장을 했습니다. 아직은 100만 볼트 ‘삘’이 꽂혀 감전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수줍게 가다듬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을 짝사랑하기로 한 ‘참신나는 소식’, 짬이 날 때면 가끔씩 곁눈질해 주세요. 뜯지 않은 봉투 안에 ‘참신나는 소식’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숨쉬는 ‘참신나는 소식’, 봉투를 여는 순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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