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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정리단계

논문 올리고

잠시 쉬러 여기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제는 특별히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졸업을 하게 되었고,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논문을 읽고 심하게 부끄러웠다.

문장이 오문 투성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이런 논문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학위를 주는 학교도 문제고 교수도 문제다.

더군다나 내가 이렇게 글을 못쓰는지도 몰랐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함부러

붓 드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적어도 글쓰기는 제대로 배워야 한다.

훈련되지 않은 글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설득보다 의심만 품게한다. 그래서 조금은 글쓰는데

주저하게된다. 그게 정상인거 같다.

 

200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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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순

기타를 친다. 그리고 긴머리에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그의 성대에서 긁어대는 흡사 해금을 연상하게끔 한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는 슬프다. 너무 외롭다. 외로움에 지쳐서 절망에 빠지게 할 만하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이지 않은, 차라리 너무나 너그러움이 담겨있는 노래들이다.

그래서 그녀는 울고 웃으면서 노래를 하고, 그의 기타는 점점 그녀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 장필순은 온 몸으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듣는다. 이런 류의 노래를 경색되다시피 싫어했는데, 가슴에 먼지가 쌓이게 되면 '후'라게 불어줄 수 있는 노래가 필요가 했다. 이제는 그런 노래를 찾은 거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또 버려야 되는 노래일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나서 나는 또 그녀을 찾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위태롭게 하는 요소는 곳곳에 널렸다. 생전 처음 대면하는 상대방의 낯선 얼굴이나 한 사람의 환경 변화 등....인연이란 한 사람이 끈을 놓지 않는 한 이어지는 것이라고....가수 한동준은 장필순과의 인연의 끈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멋쩍게 웃으며 장필순도 한마디 덧붙인다."

"미 투! 설령 음악을 놓는다 해도."  이래서 마음에 든다.

뱀발: 오래전의 글인데 아직도 찾을 수 있다니 놀랍다.


2003.10.10 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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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그리고 두려움

짧게 한마디..

 

실력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는 결국 게으르다는 것이다.

표현하는 것보다 사물을 직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베이스가 탄탄해야 하는데, 기본 베이스를 탄탄하게 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단발적이고, 비약적으로 기초를 무시한 덩어리를 과시한다. 그러나 그 속에 숨은 알갱이가 강한 응집력을 가지지 못하면 결국 쪼개지고 만다. 그 때 붙여봐야 이미 잘 붙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에너지가 있을 때, 마음 껏 활용하라. 인간의 에너지는 전기와 달라서 저장도 되지 않고 충전도 되지 않는다. 평생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한다.

 

200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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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한정하는 능력

tommy emmanuel의 연주곡을 듣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해질 수 밖에 없을 거 같다. 논문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식당에서 밥나오기 전에 이 집이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것과 같다. 아직 쓰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먼저 주제선정의 문제가 있다. 근로감시장비도입에 따른 근로자의 인격권과 관련된 주제가 내 주제다. 물론 이 주제는 내가 작년 2학기에 개별법 수업시간 주제발표를 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주제의 범위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포괄적이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굉장히 협소하다. 전자도입의 종류는 불문하고 기본적으로는 도입의 의도나 실태는 새로운 데이터가 아직까지 없고 사례만 무수히 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감시장비의 도입의 의도를 정확하게 집어내서 그 법적 문제와 대응 방안에 대해서 쓴 다는 것은 탁상공론이 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갑갑한 것은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조화를 통해서 풀어야 하는데, 사용자의 권리남용이 근로자에게 어떤 영량을 미치는지는 제껴두더라도 실제 권리침해의 주체가 근로자다. 그러니깐 사용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인격권을 보호하는 방안 이 양자가 동시에 구사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로자의 인격권이라는 것은 침해당하고 있거나 침해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사용자의 권리는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가 좁혀지냐 마냐의 문제이므로 결국 사용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방법으로 가게 된다. 쉽게말하면 사용자의 시설관리권과 노무지휘권을 일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제한하는 것인데 의도는 둘째치고 사용자의 감시장비 도입은 자연스럽게 합법화된다.

 

문제는 불법적인 감시장비의 문제이다. 불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인 근로자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감시장비 자체뿐 만이 아니라 도입행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양방향으로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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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책상의 거리

너무 분리되어 있다.

 

논문 주제에 한정하다보니 내가 적어도 노동자 감시에 대한 현실을 피부로 느껴야 하는데, 책상머리에서 이것을 하려니 도저히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차라리 실태조사라도 가능한 주제라면 몰라도, 내 알량함이 이런 정신적 참극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다. 주제는 정해져 있고, 현실은 저멀리에 있다. 사고는 이미 참고문헌에 갇혀있어, 노동자의 고통과 심리상태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이런 것을 상상력으로 해결한다면 결국 또 사기치는 것이다.

 

미치도록 감시 당하고 싶다.

 

200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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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의 도처에는 새로운 시도 발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그러한 노력들이 '개량주의'으로 치부되거나 매도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도 비단 그런 일은 흔히 발견된다. 좌파할동가들은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와 같은 사람들을 개량주의자로 도매금화 해버린다.

그러나 그들도 유심히 읽으면 반면교사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로자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의 논쟁 속에서도 왜 카우츠키 해법에 대한 로자의 분석이 때로는 그 당시에 대중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는가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그 당시 로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편이다.

 

얼마전 환경운동가 대니 서라는 작자가 텔레비젼에 모습을 간만에 드러냈다. 그가 77년 생 29세이니깐 22살 때 다큐멘타리를 했다고 하니, 약 7년만에 그가 어떻게 변신, 혹은 변질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그를 보면서 두가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를,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대처하는 태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첫째는 그가 왜 환경운동가에서 에코-스타일리스트로 변화했는지에 대해서다. 그는 참으로 똑독하고 자기주관이 강한 소위 '난 놈'이다. 그에 대해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가 '지구의 날'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왜 우리는 노동자의 날에 태어나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을 묻어나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좀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경찰이 경찰의 날에 태어났다고, 목사가 성탄절에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부러워할까에 댛서는 지극히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냥 여기까지는 이렇게 해두자.

 

그의 직업 변화는 기존 환경운동가들과의 연대를 박차고 나가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식에 맞는 운동방법을 택한 것이고, 그것이 설사 운동이 아닌 하나의 비지니스라해도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의 행동이 환경운동의 대의와 배치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의 차이이고, 그 목표에서 상이한 형태라 할지라도 사회에 유익한 방법이라면 굳이 그것을 비판하거나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도리어 부메랑이 되는 법이다. 다만, 그의 행동을 면밀하게 보면서 우리가 그의 아이디어에서 배울 점은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 두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둘째, 대니 서라는 작자를 보여주는 언론의 태도, 즉 언론관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달라져 보일 수 있다. 언론관이라 뭣하지만 방송사에 보내는 대니 서의 평가는 가히 극찬이다. 비지니스 사업가로서도, 기존의 환경운동의 형태면에서도 세련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중산층의 환경운동(혹은 환경관련)참여는 환경문제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속성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자기가 출판하는 잡지회사에 대기업의 광고가 선듯

 

나의 광고를 내어달라는 것은 자기 회사의 '친환경성'을 상품화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없이 오직 '성공'의 관점에서만 미화하고 포장한다.

이건 좀 문제있다. 과정이 없다. 광고를 게제하기 까지의 환경서약 쯤은 있지 않겠는가. 그런 과정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니 서가 자기는 핸도폰과 자동차없이 사는 사람이고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방어하면서 산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매니져가 전화다받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대충 선수라면 좋게봐주겠지만, 일반인의 시각에서 그것을 풀어주는 뭔가가 없다는 건 문제있다. 대니 서가 그리 못되먹은 작자는 아니라고 보지만 냉철한 평가도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위 두 가지를 묶어서 그것을 내 행동양식에 조금이나마 접목하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먼저 일정한 원칙은 존재하되, 그 원칙의 경직성에 대해서도 의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의 경직성이 전체가 유익한 방향으로 가는데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거라면 새로운 발상으로 전환도 필요하다. 그러나 실험에서 그쳤을 때에는 과감하게 돌아오고 실험이 가능성을 보이면 끝장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나와 관계된 사람, 혹은 대중들과의 소통에서도 항상 소통이 과도할 정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대 남의 의견을 재단해서는 안되며 재단해야 하는 경우면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속의 평가는 일부가 주도권을 잡은 평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충분하게 내릴 수 있는 평가로서, 한 쪽 방향의 경직된 형태의 비판이 아니라 '상호 평등한 양과 질의 비판'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정도로도 개량이나 변질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냥 제자리에 있는 것이 낫고, 이 정도의 자세가 되어있다면 개량이나 변질의 비판을 감수하고도 한 번 새로운 발상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물론, 내 생각에는 그렇다.

 

2005.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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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홈스봄

“공산주의를 비롯해서 대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갖는 최악의 문제는,

 너무나 고결한 나머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까지도 정당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적은 그르지 않다.

 또한 세상에 대해 적당한 기대감을 갖는 사람만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도 그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정이 없다면 인간이 인간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비록 그런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1999, 에릭 홉스봄)

 

홉스봄. 요즘에는 밴디트(Bandit)를 읽고 있다. 집중해서 읽을 시간은 없지만, 가끔씩 읽고 있다. 그이의 학문적 성과물 속에는 학문적 성찰외에도 인간에 대한 내면적 성찰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 책은 잘 없다. 최근에 그런 책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전순옥 선생님의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나의 노동학과 관련된 지식 뿐만 아니라 노동철학과 인생철학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남성노동자들이 많이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한다.

 

위의 홈스봄이 말한 것을 씹어 보면서 또 하나의 느낌이 들었다. 원문이 어떤지는 몰라도 말이다.

 

세상에 대한 적당한 기대감. 그러나 인간 본래 구실. 나는 이 사이의 벽을 '공정함'으로 풀고 싶다. 공정함이 있다면 끔찍한 해악과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고, 인간의 본래 구실이라는 "평등"이라는 가치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말은 지금은 노망든 할매인 오리아나 팔라치(얼마전 내가 본 "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을 읽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가 한 말과 겹쳐진다. 그래서 공정함이 생각났나 부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온 이들이 보통사람과 달랐던 점은 그들의 지성도 힘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상도 아니며, 오직 보다 원대한 야망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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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성경

공동번역에 참여하셨던 두분의 목사님. 문익환 목사와 이현주 목사.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읽었는데....출처의 제목은 '개신교에서 공동번역성서 사용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문익환 목사 : 공동번역을 하자니까 한가지 사실이 발견되었어 무엇인지 알아?

이현주 목사 : ???

문익환 목사 : 요새는 말이야 구교(Catholic)가 신교(新敎)이고 신교(Protestant)가 구교(舊敎)더라고 !!

 

 

공동번역 성경은 예수와 제자가 서로 존대말을 쓴다. 그리고 한글문장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경은 번역을 맡은 학자들이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합의한 부분이 많아 성경을 날 것으로 읽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 성경이 카톨릭과 개신교의 사제, 목회자, 학자가 참여하여 번역하였음에도 유독 개신교는 이 성경의 사용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웃긴 것은 교회 신자들에게는 권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책장에는 다 있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하느님으로 바뀐다고 하느님의 헤어스타일이 바뀔지언정 그 본질은 바뀌진 않는다. 또한 '보혜사'라는 이런 말들은 '협조자', '도움주는 이'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성경이 가지는 진리의 타당성이 높아질 수 있다.

 

여하간 성경에 나오는 많은 구절이 역사적으로나 성찰하기에 좋은 구절이 많아 다시 하나 구입하려고 하는데 여간 쉽지 않다. 신약성경은 새번역성경(카톨릭에서 최근 번역, 출판)과 구약성경은 구약학자 최의원 박사의 ‘새즈믄 우리말 구약정경(신앙과 지성)'을 사도록 해야 겠다. 잔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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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와 붉은 돼지

보보스.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

 

강준만의 간단한 설명.

 

"보보스의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우디알랜의 영화, '애니홀'에서의 압축적인 지적.

 

“쇼핑백을 들고 카페를 전전하면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인간만 아니면 됐죠 뭐.”

 

쇼핑은 할 수 있다. 쇼핑백에 무엇을 담는가가 문제다. 머리 속에 담겨진 것과 쇼핑백에 담는 것이 다르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개인은 모순이지만 이런 집단은 한데 어울린다. 저거들끼리 주고받는 것이다.

 

"진보적 아나바다". 딸딸이다. 서로 손을 잡고, 요래~요래~요래요래~

서로 돕는 자위행위다. 이것은 모순을 뛰어넘는 변태다.

 

진중권이 경비행기를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포르코 로소’(Porco Rosso·붉은 돼지)라고 이름을 붙였단다. 그것이 중형급 자동차와 비슷한 가격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타고다닐지 걱정이다. 기름값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가 보보스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 경비행기 자체에 대해서는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언제 누굴 태울 것인가가 문제다. 붉은 돼지가 왠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 그리고 갑자기 수해와 경비행기가 오버랩되는 이유.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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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

공부. 

 

공부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기다. 시험을 잘쳐도, 시험성적이 좋아도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부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다시말하면 물고기 낚는 사람이 낚시도구를 잘 다루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낚시도구를 잘 다룬다고 고기를 많이 낚는 것은 아니다. 예수처럼 말로써 완빵에 고기떼를 발견하기는 사람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성대모사 잘한다고 다 잘사는 것 아니다. 마찬가지다. 아예 고도로 숙련되든지, 아니면 줄을 잘 타든지. 여하간 결론은 버킹검. 공부는 자기탐구의 과정이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되버린 현실을 부정할 수 만은 없다. 다만 그런 현실에 가끔은 낙담하고 신경질이나 이런 현실이 말세라고 생각할 때, 영혼의 아가미는 적어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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