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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일의 기록이 우리에게 남긴 고민들
《하늘을 덮다─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메이데이, 2013
우완/서울 이화여고 duipsul@gmail.com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칩니다.
학교 다니는 일이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그래도 수업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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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망설였다. 6월 말에 원고 청탁을 받고서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쓰면 안 되나?’ 하는, 피하고픈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안의 민감성을 생각할 때에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던 점이 가장 컸고, 신변의 여러 가지 일 때문에도 그랬지만, 보다 솔직하게는 읽으면서 내내 불편했던 마음 때문이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글은 책 앞쪽에 실린 100쪽을 훌쩍 넘는 피해생존자의 수기이다. 2부와 3부에 담긴 사건 경과와 그에 대한 평가, 2012년 총선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의 싸움, 지지모임의 활동을 담은 글들 또한 중요하지만 기록물로서 가치 있는 글들이지 새로운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러나 1부에 실린 그녀의 수기는 이 사건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녀의 글에 담긴 상처들은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것을 넘어선,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잊고 지내던 나의 과거 경험들을 불러냈다. 나 또한 그녀가 받은 것과 같은 상처를 누군가에게 주던 사람이었기에 글을 읽어 내려가기가 고통스러웠다. 스스로가 과거에 행하고 겪었던 일들로 인해 마음에 남아 있던 꺼림칙함이 그녀의 글을 읽으며 이제야 명료해지는 듯했다. 그렇기에 나는 마냥 ‘그녀를 지지한다’고 목소리 높여 말하기에는 어딘지 떳떳하지 못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받은 ‘상처’가 중요하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사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본다
1부에 실린 피해생존자의 글을 읽으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은 ‘이 사건을 성폭력 사건으로만 명명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가해자 김○○가 저지른 일은 강간미수 사건이고, 명백한 성폭력 사건이다. 그 이후에 이어진 2차 가해자들의 행태도 전형적인 성폭력 2차 가해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피해생존자의 글은 성폭력 사건이 있었던 당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글은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은신을 돕게 된 과정, 그리고 그가 연행된 후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있었던 대책 회의와 그날의 술자리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이 피해생존자가 기억하고 있는 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믿고 헌신해 왔던 조직으로부터 이석행 전 위원장 사건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라는 희생을 강요받았다. 또 아끼고 의지하던 후배로부터 배신당했다.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직과 주변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한결같이 짧고 단순했다. “조직을 위해서”,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 또한 그들은 피해생존자에게 무례하고 성의 없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석행 전 위원장이 도피하고 있는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진심을 다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피해생존자는 이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 “기막혔다”,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한다.
피해생존자가 받은 상처는 이 지점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시작, 그 뿌리를 어디로 보느냐가 중요한데, 이 사건의 시작은 대의명분을 위해 개인의 희생과 피해를 당연시하는 민주노총과 전교조,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활동가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상처를 공동의 문제로 인정하는 데 인색한 우리
개신교 사회에서 쓰이는 ‘시험에 들다’라는 말이 있다. 교회 내부에서 목사나 교회 간부 집단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갈등을 문제 삼거나 이것을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이들에 대해 개신교인들은 간단하게 그가 ‘시험에 들었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 내용을 검토하는 일은 뒷전이다. 이 어구에는 ‘믿음과 신앙이 있다면 문제를 삼기보다는 인내했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결국 그 정도 시험도 견디지 못하고 ‘감히’ 교회를, 혹은 목사를 등졌다는 말인 셈이다. 여기에는 조직을 등졌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것을 촉발한 문제의 내용은 듣지 않겠다는 조직의 완고함이 담겨 있다.
교회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조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한 개인이 받은 상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의 사건으로 의미화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운동사회 또한 마찬가지이며 나도 그랬던 사람 중 하나이다. 함께 활동하다가 이런저런 일들이 터져 상처를 입고 떠나가는 동지들을 보며, 그들의 상처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동지들의 뒷모습을 원망하기 일쑤였다. 그들이 ‘소심’하며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고,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은 중요하므로 그들이 양보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직의 피해를 줄이고 중요한 활동가를 보호하기 위해 개인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폭력이다. 조직 내부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벌이던 활동가라는 이유로 지인에게 희생과 양보를 바라고 불쾌함을 참아 낼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태도 또한 활동가라는 권력을 이용해 행사하는 폭력이다.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의 거짓된 태도, 그리고 그를 공개적으로 감쌌던 유시민, 이정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진보 진영 내에서 형성된 권력을 이용해 힘없는 조합원을 기만하는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피해생존자의 글을 읽어 보면 그녀가 일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 번 불쾌감을 표현했는데도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피해생존자에게 취한 태도는 마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과 같았다.
가부장적 권력이 만들어 온 주류 사회의 언어가 ‘멸사봉공’이라면 이에 맞설 수 있는 여성주의의 언어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일 것이다. 개인이 사회생활에서 입는 상처들 하나하나에는 차별의 시각과 폭력적 권력관계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기존의 질서에 대한 하나의 문제 제기로 의미화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덩치 큰 거대 담론과 명분들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개인에 대한 희생을, 이제는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야 한다. 피해생존자가 자신이 당한 일련의 일들을 일의 시작으로부터 용기 있게 고백하면서 특히 조직과 후배로부터 받은 상처, 그리고 활동가들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문제 해결 방식 등을 스스로 무화시키지 않고 ‘피해’라는 이름으로 꿋꿋하게 받아들인 이 수기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런 지점에서이다.
반성폭력운동 십여 년 후 우리가 마주한 현실
2부와 3부를 읽으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은 십여 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전혀 달라지지 않은 주류 진보운동가들의 태도를 보는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것을 ‘위기’라고 느끼고 이에 대응하고자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행동들을 취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정진후 전 위원장이 피해생존자에게 독대를 요구하며 거짓 약속을 해 그녀를 달래 놓고 결국은 성의 없이 사건을 마무리한 행동은, 반성폭력 담론에 대응하기 위한 제 나름의 전략을 짜 놓고 대응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아주 씁쓸하지만 십여 년 전과 비교해 진화한 것이라면 진화한 거라 할 수 있겠다. 사건 발생 직후에 해결 주체가 되어야 할 조직 간부들이 사건 해결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이것이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 변명했던 것 또한 십여 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방어 논리일 테니 달라진 모습이라면 달라진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 담긴 지지모임의 활동, 그리고 사건 처리 과정에서 있었던 민주노총/전교조와 반성폭력 담론 주체들 간의 갈등이 담긴 기록들은 운동사회 내 성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한 반성폭력운동의 중간 점검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뚤어진 진화, 왜곡된 변화의 모습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성폭력운동은 운동사회 내 성폭력에 대해 1990년대 말부터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 왔으며,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운동 주체들 또한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모두 거듭나겠다는 약속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과 자치 규약을 만드는 등 제도적인 장치들도 마련했다. 그런데도 2차 가해자를 비롯해 민주노총/전교조의 주체들이 사건 이후에 보인 모습들을 살펴보면 성숙한 태도로 문제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 식 혹은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근시안적인 대처에 머무르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쉬쉬하거나 발끈하거나 못 들은 척하거나 논점을 돌려 협박하는 태도를 취했다. 책의 제목인 ‘하늘을 덮다’는 이들의 이러한 태도를 잘 비꼬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이들이 십여 년간 반성폭력운동을 통해 배운 것은 ‘자기 성찰’이 아닌 ‘자기 보호’ 논리뿐이었던 것일까?
십여 년간 달라진 정치 현실을 생각할 때 이는 더욱 씁쓸하다. 과거에는 진보 진영에 대한 권력의 통제가 엄혹했다는 것이 이들에게 명분과 면죄부를 제공했다면, 2010년 총선이라는 국면에서 진보 진영이 내세운 명분은 선거 승리였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혹은 총선거를 통한 일정 가치의 실현이 가능해진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반성폭력’이라는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고 개인의 희생과 침묵을 강요하는 모습도 여전하다. 선거 승리라는 목표 실현을 위해 피해생존자의 입을 막고 명분을 깎아먹는다며 폭언을 퍼붓고 진실을 왜곡하는 모습. 이것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변화한 진보 진영의 화려함에 감추어진 그늘이다.
그래서 이제는 ‘변화한’ 그들의 모습에 걸맞은 새롭고 정교한 언어를 만들어 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사건의 본질에 성폭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권력과 관계의 폭력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에 더욱 그렇다. 조직이 개인에게 공공연하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관계 안에서 권력을 가진 이가 상대방이 느끼는 불쾌함에 대해 침묵할 것을 요구하는 것, 대의명분을 내세워 개인을 기만하는 것 등은 단순히 부당한 일이 아니라 조직적인 폭력이고, 이 또한 여성주의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다. 운동사회 내에서 행해지는 이런 종류의 폭력들에 대해 성폭력과는 별개의 결로 (혹은 확장된 시각에서) 성찰하고, 명명하고, 좀 더 정교화된 언어로 투쟁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지 않을까 한다.
전교조라는 조직의 현재에 대한 기록
조직과 후배로부터 배신당하고,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 해결의 믿음직한 주체를 찾을 수 없었던 피해생존자는 외부로 사건을 들고 나갔다. ‘시험에 들었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의 언어로 이야기해 본다면, 피해생존자 또한 조직이 제시한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조직을 등진 셈이다. 조직을 등진 그녀가 제기하는 모든 문제들은 그 순간부터 조직 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무어라고 말을 하든 모두 그들에게는 “나는 시험에 들었다”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반성해야 할 사람들, 일을 해결해야 할 사람들 모두 사건을 성찰하기보다 그녀를 달래고 입을 막기에 바빴다.
그렇게 외부로 사건이 알려지면서는 조직 보위 논리와 정파 논리, 해묵은 진영 논리들에 사건이 휘말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금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교조 내부의 정파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당한 일들에 대해 오롯이 그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사려 깊은 손길들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쉽게 왜곡되고 폄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본질을 알려고 하기보다 정파적 이해관계를 먼저 의심했고, 정파 논리에 기대어 피해생존자를, 지지모임을, 혹은 가해자들을 비난했다. 각자가 속한 조직의 문화를 반성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편을 감싸기 바빴다. 사건을 해결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가해자가 속한 정파에 대한 불순한 음모를 띤 사람처럼 매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들에 대한 비난들 또한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과정 속에서 사건 해결은 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고 피해생존자는 조직 보위 논리와 성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정파 논리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두툼한 서류 뭉치이자 기록물, 백서 아닌 백서라 스스로를 말하는 이 한 권의 책 속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전교조라는 조직의 현 주소다.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라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결하지 못했던 무능함, 각자 제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빴던 이기적인 모습, 공동체에 제기된 문제를 성찰하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한 자기 논리를 만들어 내기에 바빴던 근시안적 모습 등. 이렇게 우리는 오랜 세월의 갈등 끝에 이제는 정말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지켜야 할 가치와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라는 것을 빠르게 인정하고, 또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조금은 덜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을 피해생존자 선생님, 그리고 외로운 길을 걸었을 지지모임 활동가 여러분, 그리고 이 책을 발간하기까지 자료를 정리하고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수정하느라 고생했을 분들에게, 또 책 발간으로 한 번 더 고통을 겪었을 모든 사람들에게 누가 되는 리뷰는 아닌지 조심스럽다.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책이 아닌 것 같아 글쓰기가 더욱 어려웠다. 사건의 진실과 해명, 그리고 해결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글이었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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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늘의 교육》 2013년 9 ․ 10월호(16호)에 실린 것입니다.
※ 글쓴이와 《오늘의 교육》의 허락을 받아 일찍 올립니다. 널리 퍼가실 때 출처를 적어 주세요. :)
* [덧붙임 2014. 9. 24. 우리교육 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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