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거리에 텃밭을 구했는데 다니시면서 농사 좀 지으실런지, 다니시기 어려운 분들한텐 텃밭상자를 만들어 나누어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모종 하나라도 키워보실런지, 모양새 없이 묻고, 기억해두고, 발품 팔다가 4월 말에서야 겨우 윤곽이 잡혔다. 다행히 밭이 해결되니 이어진 일들은 나름(!) 일사천리.
우리의 최대 후원조직(?)인 농수산물 시장에 들러서 실질적 후원자인 아저씨들께 부끄럽지만 담배값 정도 쥐어드리고 고추장 통이며, 식용유 통이며, 스티로폴 박스며 잔뜩 얻어 왔다.
.
더러운 것들은 좀 씻어내고 물구멍 뚫어서 텃밭상자로 이용.
주위 분들한테 텃밭농사를 제안하면서도 가장 고민됐던 게 흙과 모종이었다. 원래는 지역의 다른 단체에서 추진 중이라고 들었던 도시농업지원사업 등의 도움으로 해결해볼 요량이었는데, 마냥 기다릴수만은 없어서 자체 비용을 들여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밭이 구해지면서 흙은 자연스럽게 해결됐고, 모종은 (사)흙살림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흙살림 오창센터. 센터 내 밭에서 유기농 채소 모종을 직접 기르고, 지역에 보급한다.
흙살림 활동에 더 관심 있으신 분들은 www.heuk.or.kr
흙살림 박대호 쌤.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회적 경제 활동을 해오고 계신다. 마을에서 도시농업을 실험해보려고 한다고 하니까 이것저것 신경써주고 계신다. 고추, 가지, 토마토, 상추 등 한아름 챙겨주셨다.
흙살림에서 얻어온 모종들
처음 텃밭 얘기를 꺼낼 땐 공부방 아이들 부모님, 평소에 알고 지내던 몇몇 분들 외엔 뭉뚱그려진 '동네 분들'이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실체(?)가 드러나고 나니까 텃밭 얘기를 꺼내기도 쉬워지고, '동네 분들'도 좀 더 구체적인 사람들로 다시 바라봐진 것 같다. 평소에 많이 마주치던 할아버지에게 텃밭상자가 필요하신지 물어보기도 하고, 지나가시는 아주머니들이 상자를 쳐다보고 계시면 말을 걸어서 모종을 드리기도 하고, 평소에 공룡에 잘 오지 않은 공부방 아이에게도 엄마에게 물어보고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하기도 하고...
햇빛 화창한 날에 공룡이 총출동해서 흙을 섞고, 채우고, 모종을 심었다.
만들어진 텃밭상자들. 일부는 공룡의 농사로, 나머진 원하는 분들께.
그 분들과 이후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선 더 고민하고, 내용을 준비해야겠지만 어떤 걸 고민하더라도 '텃밭 상자 가져가신 어디의 누구'가 된 건, 그리고 그 분들에게도 공룡이 정체모를 까페의 이상한 젊은이들이 아닌 흙지어다 모종 심어서 상자 나눠준 "농사도 지으려고 하고 기특한 젊은이"들이 된 건 분명한 것 같다.
처음 뵙는 분들도 살아있는 녹색풀 때문에 말씀을 걸어오신다.
호기심 반, 걱정 반 남겨주신 이런저런 말씀들은 모종값을 하고도 남고,
상자배달을 하면서 덤으로 농장(?) 견학의 기회도 갖게 된다.
뭔가 의미들을 담지해내야할 것 같은, 프로그램화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도시농업'이라는 개념, '텃밭학교'라는 프로그램 자체에 갇혀서 버둥거린 기간이 있었고, 지금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텃밭상자 나누기'라는 액션 자체가 가져다 준 사건들, 관계들, 그 과정에서의 공룡들이 체득한 의미들은 상당하다.
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련의 꺼리들을 가지고 다시 도시농업에 대한 고민들을 엮어 나가는 작업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할 것 같다. 그래도 처음 시작 때만큼 부담감으로 다가오진 않을거란 기대는 해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운천동 농수산물 시장 폐자원 관리 아저씨들, 밭을 흔쾌히 내주시고, 덕분에 텃밭상자에까지 도움주신 숲해설가협회 14기 모임, 유기농 모종 분양해주시고, 여러 조언해주신 흙살림과 박대호 쌤, 고맙다며 후원금 건네주신, 그래서 수줍지만 기분좋게 해주신 윤지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