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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어진 야채 - Culinary Misfits

사람이 이렇게 되가는 건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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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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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가 먹는 과일 야채도 이래야 된단다. 최소한 오이, 바나나 등 과일 야채에 대한 EU-규정을 따르면 오이라고 다 오이가 아니고, 바나나라고 다 바나나가 아니다. 일정한 구부러짐 등 다양한 규정을 충족해야 비로소 ‘오이’ 또는 ‘바나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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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이가 아님. 표준굽음률을 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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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되려면 이래야 함. 더 빤듯하면 좋음. 일등급이 될 수 있음.)
 

 

이런 규정들이 EU-관료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비난이 대상이 되고나서는 삶을 편하게 해준답

시고 우리 일상생활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규정하려는 ‘배려’가 좀 수그려진듯하다.

 

그러나 대자본이 운영하는 슈퍼에 등장하려면 오이, 바나나 등 야채, 과일은 미스선발대회를 거쳐야 한다. 키가 넘 커서도 안 되고, 넘 작아서도 안 되고, 피부가 매끈해야 하고,  다리가 벌어져서도 안 되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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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바로 버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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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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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안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물론 절대 안됨. '못 생긴 것들이 여기가 어딘데, 감히 결사를')
 

 

 

 

 

 

 

 

 

 

 

 

 

 

 

농사꾼들도 이를 알기 때문에, 미스선발대회에서 탈락한 야채, 과일들은 버림을 받는다. 봐주는 사람이 없다.

 

근데 이런 야채, 과일들을 봐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베를린 주변 농가를 찾아다니면서 버림받는 야채를 모아, crowd funding으로 연 상점에서 판매한다.

 

 

혹시, 베를린에 오면 이 집 들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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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8)


(보다 넓은 의미의) 포스트구조주의 논쟁에서 [각자의] 이론구조에 따라 각양각색의 받침대로 뒷받침되는 구성적인 통제 불가능성과 역동성은 매우 차이 나는 양식으로 긍정된다. 첫째,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폐쇄와 고정화의 토대와 함께 이것의 지속적인 훼방․횡단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둘째, 특히 포스트모던적으로 다듬어진 관점아래 모든 요구와 욕망들이 다 같은-타당성(Gleich-Gültigkeit)으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불안전성과 역동성을 긍정하는데 있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긍정으로, 셋째, 규정 저편의 [反헤겔적인] 것이 중심에 있는 (예컨대 알랑 바디우에서 두드러지는) 사건철학들과 존재론들에서처럼 예견할 수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타자가 [동일자의, 그게 비록 타자를 변증법적으로 끌어 안는 동일성이라 할지라도, 연속성 안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를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발생을(ereignishafte Entstehung) [예비하는] 가능공간으로 긍정된다. 여기서 토론된 대부분의 저자들은 -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하지만 - 첫째 이해양식에 속한다.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렇게 읽는 것은, 근본적으로 폐쇄․완성될 수 없는 운동을 출발점으로 삼는 가운데, 그때마다의 특수한 고정화들과 함께 이들의 [반복]․지속적인 불안정화(탈-고정화)에 관심을 두고, 이때 [반복]․지속되는 불안정화보다 기존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로서의 사건들에 더 관심을 두는 셋째 이해양식과 전적으로 교차․중첩된다. 이 두 이해방식의 중첩에 대해선 3장에서 다시 거론하겠다. 여기서 토론된 모든 저자들은 모든 요구들이 “같은-타당성”을 갖는다는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둘째 읽기방법과는 매우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반-근본주의”와 (허무주의로 선언된) 상대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자신을 지켜 [보호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이해방식이 되는 첫 번째 이해방식은 반면 “기체로서의 역동성과 그것의 ‘표현’간의 범주적 차이”의 전제에 기반한다(Niederberger/Wagner 2004: 185). 바로 이 차이가, 우리가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에서 정치와 경찰 간의(랑시에르) 혹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 간의 “정치적인 차이”(Marchart 2010)로 발견하는 이 차이가 사회적인 것이 교섭되는, 달리 표현하면 (끝을 맺을 수 없지만 그러나 [허공으로 부상하지 않는] 기반위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둘러싼 것을 놓고 싸우는 “공간 아닌 공간”(Nicht-Ort [=ou topos])(Butler)을  표지(標識)한다. 이와 같은 이해방식이 지향하는 바에 의하면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에서] 중요한 것은 구성적인 역동성과 차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긍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특정한 헤게모니적인 경직화/고정화들을 비판적으로 횡단/훼방하는 역동성과 차연에 배어있는 잠재력이 중요하다는 걸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1)

 

 

1)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첫째 이해양식과 관련해서 참조한 저자들에게서 위의 중요한 구별을 약간 불식시키는 모종의 역동성 강조를 부인할 수는 없다(예컨대 Butler 2009: 69f. 참조).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거슬리게 비틀거나 삐딱 하는 미세한] 편차운동(Absatzbewegung [Absetzbewegung/분리운동이 아님]), 탈영토화, 미시차원에서의 분자운동 등을 그 자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늘 강조했지만, 그들이 [생각을 펼친] 글에서는 사실 경향적으로 최소한 탈주선과 유목민되기사유(Nomadologie [이게 사유의 유목민되기인지, 유목민되기의 사유인지 불투명하게]에 대한 긍정적으로 채색된 현혹이 엿보인다(Deleuze/Guattari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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