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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21
    일본 사태관련 독일 언론-F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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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3/20
    더 이상 거짓말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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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3/19
    살아남는 최후 수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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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저분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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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독일에서의 파급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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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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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1/02/18
    링반델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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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태관련 독일 언론-FAZ

현재 진행중인 일본사태관련 이런저런 논설을 찾아 다니는데, 뼈아픈 논설이 하나 있다. 독일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프랑푸르트 알게마이네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의 발행인 프랑크 쉬르마허(Frank Schirrmacher)의 글이다.

 

지난 목욕일 독일 제2국영방송 ZDF의 뉴스 <Heute Journal>에서 방영된 일본사태관련10분짜리 영상보도를 극찬하는 글이다.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에나 어울리는 말들이 난무하는] 라이브 티커 앞에서 모든 집중력을 상실하고 그저 멍하게 바로 보고 있는 우리에게” 뭔가를 명료하게 해주는 보도였다는 것. 그 영상보도가 보여준 것은 다른 보도와 다를 바가 없는데, 영상에 겹치는 일본특파원 게르트 안할트(Gert Anhalt)의 잔잔한 말의 내용이 달랐다는 것.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폐허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여주는 장면에 “그들이 예전에 일으켜 세운 나라가 이젠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더 이상 도울 수가 없게 되었다. … 이들이 바로 예전에 일본을 재건했던 세대다. 대참사가 가져다 준 폐허에서 비극적으로 그들의 생이 지금 원점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쉬르마허는 이 코멘트가 심금을 울린다고 한다. 재앙이 이토록 크면 망가진 자기 삶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한 생을 지배해 왔던 논리가 한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게르트 안할트가 보여준 것은 우리가 어쩌면 머리로만 알고 있는, 인간의 삶이 “공기, 물, 먹을 것, 그리고 열이란 원초적인 조건”에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재앙을 당한 일본사람들의 삶이 물리적으로 그런 원초적인 상황으로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앵커맨 클라우스 클레버(Klaus Kleber)의 “구조는 어떤 수단보다 더 오래된 수단, 즉 물로 한단다.”라는 코멘트는 이런 뼈아픈 통찰에 도장을 찍는 말이라는 것. 자연의 힘이 나중에 일어날 일에 절대 자신하는 기술과 함께 우리가 의지하는 것, 이념 혹은 신념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과 살아온 발자취를 몽땅 부정했다는 것이다.

 

이어 프랑크 쉬르마허는 이런 통찰이 그저 “분위기”로만 지나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을 라이브 티커와 실시간 동영상에 매달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식으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법에 따라 소비하는 것을 겨누어 원전은 과도가 아니라 끝장이 나야 한다고 (“Kein Übergang, ein Ende”) 한다.

 

후쿠시마와 같은 사태와 마주하는 지금 „과도“니 „가교기술“이니 하는 것은 진부한 것이라는 것.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안 하는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실재하고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지난 목요일 <heute-journal>이 이런 진리를 증명했다는 것. 즉 „실수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과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일으키는 순환을 스스로 중단하여 끝장을 보는 것“이 필수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이런 실수는 업데이트나 차후보안으로 지양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제 원전이 „더 이상 과도가 아니라 끝장“이라고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 메르켈 정부가 견딜 수 있을까 한다.

 

자료출처:www.faz.net/s/RubB08CD9E6B08746679EDCF370F87A4512/Doc~E3C3F2F3178964159AC700871C7415730~ATpl~Ecommon~Sconten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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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거짓말은 안돼

7-80년대에 비해 많이 우경화된, 소위 고등교육을 통해서 부르주아가 된 “교양부르주아(Bildungsbürger")가 애용하는 독일 주간지 “Die Zeit”지의 이번 목요판 1면.

 

“더 이상 거짓말은 안돼!”

 

“일본이 세계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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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최후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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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ww.faz.net/s/RubD5CB2DA481C04D05AA471FA88471AEF0/Doc~E1F2B6933CDD443C391748D5D60C69526~ATpl~Ecommon~SMe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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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한 말

우리 정서는 말에 신경을 쓰는 전통으로 다져진 것 같다. ‘말을 아끼다”란 표현과 같은 표현이 다른 말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서양언어에 익숙한 사람이 우리말을 배울 때 적절한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게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나이가 되었는데도, 일본 대지진과 관련해서 조용기란 목사와 같은 발언을 들으면 막 패주고 싶은 생각에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설친다.

 

이렇게 잠을 설치면서 떠오르는 생각.

 

제1명제: 일본대지진에 하나님이 있다. (조용기란 목사발언 참조)

반론: 야훼는 일본대지진에 없다.

근거: 열왕기상 19장11-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나고 난 뒤에 불이 일어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제2명제: 하나님은 자연의 힘을 동원해 그를 멀리한 사람을 벌한다. (다시 조용기란 목사발언 참조)

반론: 야훼는 계시의 하나님이지 자연의 뒤에 숨어서 벌하는, 그런 치사한 짓은 하는 분이 아니다.

근거: 구약성서 이곳 저곳. 대표적인 예: 요나, 소돔과 고모라 등.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을 읽는 점쟁이 짓을 하는 목사가 필요 없다. ‘계시’란 어려운 말이 아니라 야훼는 스스로 오거나 사자를 보내거나 아니면 3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일을 하는 인격체란 말이다. 그래서 흥정도 가능하다. 야훼가 조용기란 목사의 꿈에 찾아가 ‘내가 일본을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조용기란 목사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야훼와 흥정했기를 바란다. 안 그랬으면 목사란 옷을 벗고 점쟁이 점을 차리기 바란다.

 

말이 지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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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태의 독일에서의 파급효과

여론조사기관 여론조사실시일 기민당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 좌파당 기타

Forschungsgruppe

Wahlen  

2011-03-18 38 22,5 25 5 4,5 5
Infratest dimap 2011-03-17 39 22 24 5,5 4,5 5
Infratest dimap  2011-03-14 42 22 21 6 4 5
Emnid  2011-03-12 39 24 20 7 5 -
Forsa  2011-03-11 40 26 20 5 4 5
Emnid  2011-03-04 38 25 21 8 4 4
Forsa  2011-03-02 39 26 19 6 4 6
Emnid 2011-02-27 40 23 22 6 4 5
Emnid  2011-02-20 40 20 23 7 5 5
Emnid  2011-02-13 40 19 25 7 4 5

Forschungsgruppe

Wahlen     

2011-02-04 41 19 25 6 4 5
Infratest dimap  2011-02-03 39 21 24 6 5 5
Emnid  2011-01-29 40 20 27 5 4 4
Emnid  2010-12-19 41 19 29 4 4 3
Infratest dimap  2010-12-02 39 18 28 5 5 5

Forschungsgruppe

Wahlen    

2010-11-26 39 19 26 5 4 7
Allensbach  2010-11-19 38 22 26 5 5 4
TNS Forschung    2010-10-09 34 19 32 6 5 4
Infratest dimap   2010-09-08 35 21 27 5 5 7

Infratest

Politikforschung  

2010-07-27 37  25 20 7 5 6
Infratest dimap  2010-02-28 43 20 17 11 4 5
2006년 총선 결과   44.2 25.2 11.7 10.7   6.1

출처: www.landtagswahl-bw.de/wahlumfragen.html

 

오는 2011년 3월 27일에 있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선 여론조사동향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녹색당 지지율의 변동이다. <슈트트가르트21> 중앙역 신설계획에 반대하는 주민운동이 정점에 다다랐을땐 녹색당 지지율이 32%까지 올라갔다. 이후 소위 <중재절차/Schlichterverfahren>란 과정을 거치고 녹색당 지지가 수그러지는듯 하고 기민당이 정권을 사수할 수 있을 것 같이 보였으나,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상황이 돌변하고 있다. 문제되는 원전 가동을 일단 중지한다는 메르켈의 정치적 제스쳐와 원전가동을 적극적으로 밀어부치고 심지어 EnBW라는 독일 4대 전력회사의 지분을 사들여 원전가동 연장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마푸스 주총리가 카노사행을 방불케하는 친원전하차발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기민당 지지율이 하향세로 치닫고 있다. 3월 18일 여론조사결과라면 녹색당이 사민당을 주니어파트너로 하여 연정을 구성하고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주총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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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II - 이성과 겸손

횡설수설하는 인간이 어찌 유럽 정신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성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겠소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게다가 겸손까지 곁들어 놓고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본인도 알송달송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오래된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어딘가에서 베껴다 놓은 한 구절이 생각나서 중이 목탁 두드리듯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 quantum ipsa lux quae iluminat cor quaerentium se nobis aditum rerum quas ingredi conamur aperuit ostendemus.”

 

알고보니 9세기에 살았던 아일랜드 출신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의 <예정론>(De praedestinatione)의 1장 2절 첫 문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빛이, 궁금해서 안절부절 하는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 빛이, 우리가 애써 파헤쳐보려는 노력하는 사물로 들어가는 문을,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이미 얼마나 열어 제켜놓았는가를 보여줄 생각이다.”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이성과 겸손이었다. 여기에 유럽에서 말하는 이성의 본질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미 이해의 장에 들어가 있다는 해석학적 이성 혹은 아프리오리나 존재적/존재론적 아프오리 말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물론이고.

 

후쿠시마 사태를 보면서 이건 합리성으로 추락한 이성의 결과물이라고 비약해본다. 이성이 합리성으로 추락하면서 교만한 것이 되었다고.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를 매우 사랑하고, 나사로를 일러 친구라고 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누이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41절 이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자세다. 예수가 “나사로야 일어나라” 해서 나사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사로는 이미 일어나 있는데, 다만 자기가 하나님과 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소리질러 명했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의 자세가 구조적으로 이런 예수의 자세와 비슷한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세는 이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러 가나안 땅을 보긴 했지만 들어가진 못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성이란 무엇인가? 물론 무엇이라고 들어올려 보여줄 수 없지만 달리 할 수 없어 무엇인가라고 질문해 본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아픔과 아픔의 기억이 발하는 빛에 기대에 “그건 아니다”라고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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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그립다

후쿠시마 - ‘하나님을 멀리한 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검색에 뜨는 그 목사의 이름.

 

이럴 때면 단테가 그립다. 단테는 저런 목사들이 지옥에서 불타는 것을 어떻게 그렸을까?

 

기독교에서 가장 무서운 교만의 죄를 지었으니, 필히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고 그 형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뒤에 서서 하나님이 들고 있는 카드를 보고 훈수하는 저들. 저 작태보다 더 교만한 행동과 혓바닥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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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후쿠시마 2011년 3월 12일 15시 36분. 원자력 시대의 종말”. 이번주 월요일 <슈피겔>지의 표지.

 

아무 일에도 집중이 안된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뉴스가 온종일 반복되지만 그래도 뉴스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독일에서 후쿠시마 원전사태의 파장은 크다. 적.녹연정(1998-2005)이 관철한 <원자력 하차/Atomausstieg> 정책을 의기양양하게 철회한 흑.황연정이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두고 입장을 하루아침에 바꿀 정도다. “하차”에서 “하차”한 다음 다시 “하차”한다는 것이다. 물론 야당의 빗발치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엊그제까지만 해도 독일 원자로는 안전하고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필수라고 침 튀기지 않았던가? 적.녹연정의 정책에 항의하여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전력기업과 협상하여 어렵게 따낸2000년6월14일 <원자력 중단합의/Atomkompromiss>와 이에 따른 제반 법령을 메르켈 정부는 일방적으로 철회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하여 최근 시행한 것이다. 원자력법 실행권한이 주 정부에 있기 때문에 관련 법률개정은 연방상원을 통과해야 한다는 지적 및 항의에도 불구하고 연방상원의 찬성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우기고 발효한 것이다. NRW 주에 좌파당이 암묵적으로 지원하는 적.녹 소수정당이 들어섬에 따라 연방상원에서 과반수를 상실한 흑.황연정의 우회정책이었다. (이 문제는 물론 헌재소에 걸려있다.) 메르켈 정부 법개정의 골자는 원자로 가동을 평균12년 연장한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가동중단조치에 해당되는 30년 이상 되는 원전들이 계속 가동하게 되었다. 근데, 이 원전들의 시한연장을 3개월 유보한다는것이다. 그리고 7개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켰다. 얼마 전까지의 작태를 보면 믿기지 않는 조치라는 비판이다. 2주 후에 있을 바텐-뷔르템베르크의 주총선을 염두한 조치라는 것. 이 주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건국이래 줄곧 기민당이 집권하여 왔는데, 현재 <슈트트가르트 21> 중앙역 신설계획에 대한 주민의 대대적인 저항운동 등으로 정권상실위험에 빠져있다. 적.녹연정의 <원자력중단합의>의 번복을 앞장서서 밀어부친 마푸스 주총리가 메르켈의 원전정책으로 불거지고 후쿠시마 사태에 더욱 거세게 진행될 반핵운동에 견딜 수 없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반핵운동에 뿌리를 둔 녹색당이 득세하여 정권을 창출하는 것은 불 보듯이 뻔하다는 것. 이런 정세판단이 메르켈로 하여금 “하차”에서의 “하차정책”을 채택하게 했다는 비판이다.

 

 

후쿠시마는 이런 정치적인 이슈로만 끝나지 않을 문제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1755년11월1일 리사본 대지진이 유럽 정신사에 미쳤던 영향을 넘어서는 사태가 아닌가 한다. 리사본의 지진은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테오디체에 일격을 가하고, 볼테르의<칸디드> 등을 비롯하여 계몽주의를 돌이킬 수 없는 이념으로 완착시킨 사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우리 뇌에 각인하는 계몽은 무엇일까? 우리가 온갖 제물을 갖다 바쳐놓고 엎드려 절하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신은 무엇이고,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거기서 빠져 나간, 빠져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립다. 그리고 그 신전 앞에 합장하는 사람보다 똥물을 찌끄르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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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상’을 어떻게 알파벳으로 표기하지? Isang, Yisang, Leesang, Lichan, Rheesang 등 어지럽다. 붙임표를     ‘이‘와 ‘상‘사이에 삽입하거나 ‘상‘을 대문자로 시작하면 그 변화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게다가 ‘이상‘을 ‘스모모하코‘로 읽고 무슨 말인지 갸우뚱하듯이, ‘이상‘을 이상(理想)으로 읽고 <꾿빠이, 이상>은 도대체 뭘 말하는지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겠다.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혼수상태에 빠지고 레닌의 동상이 크레인에 들려 병실 창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깨어나는 엄마를, 갑작스런 시대변화에 의한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아들의 노력을 소재로 한 <Goodbye, Lenin>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떠올리고 ‘사상의 종말‘에 접한 사회상을 그린 소설 제목인가하고 영 엉뚱한 길로 빠질 수도 있겠다. 내친 걸음 더 나아가면, ‘Goodbye‘가 ‘꾿바이‘로 넘어왔다가 다시 알파벳으로 넘어가면, 넘어오기 전의 ‘Goodbye‘로 다시 넘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다. ‘꾿빠이‘로서의 ‘Goodbye‘와 ‘Goodbye‘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는 말이다. ‘Ringwanderung’이 한국에 착륙하여 ‘링반데룽‘이 되었다가 되돌아가면 ‘Ringwanderung’이 되는지 아니면 ‘Ringwandelung‘이 되는지 궁금하다. (물론 ‘Ringwandelung‘이 독어에 없는 말이란 전제아래 그렇다. 독일에서도 산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인데 나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독어에 없는 말이라면 ‘링반데룽‘이란 말을 만든 (한국의? 일본의?) 독어감각은 과연 뛰어났다고 할 수가 있겠다. ‘Schlafwandeln‘(몽유병)에서의 의미로서의 ‘wandeln’을 ‘Ringwanderung‘에 접목하여 새로운 낱말을 창조한 것이 아닌가.)

 

Traduttore/Traditore – ‘Schiboleth’이 ‘Siboleth‘이 되면 목을 내놓고 강을 건너야 한다. Schiboleth이 Siboleth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이 쉬운 일같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알러(Aller)강에서 그랬던가, 칼 대제에 패배한 작센족은 ‘아멘‘하고 세례를 받으면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을 잃었다. 강에 물이 흐르지 않고 피가 흘렀단다. 그냥 배반하고(거짓말하고) 넘어갈 수 없었을까? 목을 내놓은 사람들은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른 것과의 등가교환은 고사하고 소통조차 불가능한 소유(Eigentum)가 낱말에는 있다. 그것이 (목)소리라고 폴 드 망은 니체에 기대어 설명한다(„Allegories of Reading“). 연인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꾿빠이, 이상>의 김연 기자는 정희의 깔깔거리고 „어머“하는 소리에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근데 깔깔거리는 소리와 „어머“하는 소리가 번역이 안 된다. 한독사전을 뒤적거려보니 ‘어머‘는 ‘ach!; ach Gott!; Wehe mir; du meine Güte!‘ 등이란다. ‚ach‘가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 같은데, ‘어머‘하는 소리에 겹치는 정희의 모습은 ‘ach!‘하는 소리에 겹치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상‘은 어떤 소리지? 그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여 어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어느 날 기억 속에서 사라진 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남도의 소리였다. 알파벳소리에 익숙해진 내 안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내 이름을 남도의 소리로 부르던 그 목소리는 나를 뒤집어 놓았고, 나는 헤매다 그 소리로 돌아왔다. 그 소리가 내 짝지가 되어 지금 내 팔을 베고 고르게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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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반델룽

심심풀이로 김연수의<꾿빠이, 이상>을 번역하고 있다. 매일 조금씩 번역해 나가는데, 오늘 한 단어에 꽉 막혔다. 있는 사전을 다 뒤적거려보고, 거기다 구글검색을 더했지만 속 시원하지 않다. ‘링반델룽’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건 어원이 분명 독어다. ‘Ringwandelung’이라 번역해 놓고 뭔가 석연치 않아 백과사전을 뒤져본다. 근데 없다. 두덴(Duden)에도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을 쳐보니 한국 사이트만 잔뜩 나온다. 어떤 이는 ‘링반델룽’을 독어표기로 ‘Ringwanderung’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Ringwandelung’이라고 한다. R 와 L의 차이다.

 

검색범위를 독일지역과 독어로만 좁혀 다시 검색해 본다. Ringwanderung만 뜨지 Ringwandelung은 뜨지 않는다. 근데Ringwanderung의 의미는 링반델룽의 의미와 좀 다르다. Ringwanderung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원점으로 돌아가게 해놓고 산행한다는 의미다.

 

그럼 링반델룽은 어디서 온 말이지? 독일을 좋아하는 일본이 만들어 논 일본식 독어가 한국에서 사용되는 것인가? 그럼 이건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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