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신앙인아카데미, 『맘울림』제10호(2005.8.) 원고

민중의 아버지 - 1980년대 절망과 탄식의 역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하느님, 이제는 당신이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그랬다. 1983년 어느 날 연세대 신과대 채플에서 기도를 맡았던 그 친구의 일성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민중의 아버지'로 알려진 노래를 만들었던 친구 김흥겸은 그 거룩한 신학생들만의 예배시간에 그렇게 기도문을 열었다. 위엄을 갖춘 선생님들과 순진한 학생들은 모두 경악을 했고, 그 날 예배 설교는 기억 못해도 그 기도만큼은 기억하게 되었다. 10년쯤 지난 훗날 그 친구는 그 때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기도를 재현해놓았다(『살림』1992.10). 세월이 지나 제법 다듬어져 있는데 그 때 그 충격을 다시 회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 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냐고요? 학교를 보세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은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 것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 우리를 시키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보라니까요.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의 실패작인 우리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당신, 바로 당신 야훼 하느님입니다. ...
그래요 우리는 사실 당신의 선택을 받은 무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 예수처럼 살다 그렇게 죽기 위해 있는 게 아니예요. 사실은 이렇게 예수의 처참한 죽음을 예배드리며 팔아먹기 위해, 또 예수의 그 고통스런 삶과 당신의 이야기를 강의하며 팔아먹고 살기 위한 무리들이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신앙을, 신학을 선택한 것뿐이라고요. 그래도 고맙지요. 당신과 예수가 있어서 그것으로 여러 사람이 2천년 동안 먹고 살게 해주시니. ...
불쌍한 하느님, 우리 같은 것을 앞세워 하느님나라를 만들겠다는 하느님, 당신이 그래도 절 사랑한다면 이 길을 가다가 변절하기 직전에 죽여주소서. 당신에게 간구하는 당신의 사람은 이 길을 가다 지쳐 쓰러져 돌아서려 할 때, 그 직전에 죽여주는 잔인한 축복을 허락하소서. 그렇게 사랑하셔서 당신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는 분명히 "아멘"을 했지만, 회중 사이에서는 그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다음부터 연세대 신과대 예배에서는 3학년 학생 가운데서 이름 순서대로 기도를 맡는 일이 사라졌다. 대신에 '착한' 학생들만이 선발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젊은이로 1980년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무슨 구구한 해명이 필요할까? 그의 기도는 그 가혹하고 잔인한 시대에 대한 항변이자, 그 상황 가운데서 한없이 절망했던 이들의 탄식이었다. 1980년 '광주' 직후 시대의 아픔을 절감하고 울분을 토로했던 이들이 그뿐이었을까마는,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그 친구는 그렇게 사고를 쳤다.
그 기도 탓이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빈민운동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살던 그 친구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7년 1월 서른 여섯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혼돈의 1990년대 그렇게 변절의 위기를 넘었던 것일까?

2.

1981년 입학을 해서 처음 그 친구를 만났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다. 큰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때로는 기괴한 인상을 풍기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인상이 주목을 끌었으나, 점차 알고 보니 이 친구 아주 물건이었다. 풍기는 인상만큼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갖고 있었다. 낙서인지 시인지 종이만 있으면 끄적거리기를 즐겼고, 악기들도 제법 다루고 혼자서 자주 흥얼거리기도 했다. 소곤소곤 말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포효를 할 때도 있었다. 철없이 해해거리기도 하고 하늘을 끌어내릴 것 같은 기세로 무겁게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 내 한 몸 추스리기에 급급했던 나로서는 견적을 내기가 어려운 인간이었다.
그처럼 기괴하지는 않지만 재기 발랄한 친구들끼리 어울렸다. 지금 가톨릭의 평신도 신학자 박문수, 와세다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 시인 김응교, 영화에 빠진 목사 정혁현 등과 어울리며 신과대 안의 서클 종교극회 활동을 했다. 당시 나 같은 '정통파'가 보기에는 '리버럴한 딴따라'들이었지만, 그 친구들을 만나면 비로소 숨을 쉬는 같아 함께 절친하게 어울렸다. 그 가운데 김흥겸 김응교 박문수 셋은 주말만 되면 파주의 작은 교회에 함께 나다녔다. 가난한 동네 작은 교회에 세 신학생들이 봉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김흥겸은 그 교회를 그만두고 신림동 난곡의 낙골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1980년대 초반 대학가는 아주 치열했다. 공부하고 싸우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울고 웃고... 신학생이었던 우리들은 한 가지 더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그 자리에서 어깨 걸고 울부짖듯 기도까지 했다. 그 때 우리들만의 노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지금 '민중의 아버지'로 알져진 그 노래였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민중의] 아버지 //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김흥겸이 파주의 가난한 동네를 오가면서부터 혼자서 흥얼거렸던 노래였다. 혼자서 흥얼거리던 그 노래가 어느 순간 우리들의 노래가 되었다. 한동안은 그야말로 우리들만의 노래였다.
그 노래가 만천하에 알려질 기회가 생겼다. 1982년 학교 축제의 창작노래경연대회였다. 흥겸이는 학교 대강당에서 그 긴 다리로 서서 혼자 피아노 반주를 하며 그 노래를 불렀다. 결과는 참담했다. 입상권에 전혀 근접하지 못했다. 의미심장한 노랫말에도 불구하고 김흥겸의 가창력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잊혀질 뻔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다시 알려질 기회가 있었다. 바로 그 5월 축제 대미를 장식할 대단한 이벤트가 하나 예정되어 있었다. 급진적이고 재기 발랄한 친구들이 와글거리던 종교극회는, 얌전하고 교양있는 공연 대신에 놀랄 만한 기획을 하였다. 작은 실내 극장을 벗어나 온 캠퍼스를 무대로 하는 공연을 준비했다. "누가 예수를?" 김흥겸이 주인공을 맡고 신과대 학생 태반이 출연하는 가운데 예수의 체포와 재판과정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온 캠퍼스를 무대로 재연해내기로 했다. 그렇게 재연된 무대는 그야말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1세기의 예루살렘과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1982년 5월 서울이 겹쳐 있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가죽 장갑을 낀 사복경찰에게 체포되어 검은 승용차에 실려간 예수는 도서관 앞 유대법정을 지나 교문 앞 로마법정에 이르렀다. 그것은 의도된 연출이었다. 극중 배역상 로마군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짜' 로마군인들의 출동을 의도했고 그 의도는 적중했다. 로마의 '서대문 군단'(서대문경찰서 시위진압 경찰)이 총출동해 갑옷과 투구를 입고 예수의 재판장에서 무력시위를 했다. 수천 명의 군중이 예수의 행렬을 따랐고 로마법정에서는 군중들도 흥분했다. "로마총독 물러가라!" "학살원흉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가 외쳐지는 가운데 재판이 진행되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 예수의 행렬은 대운동장 옆 언덕 골고다로 향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시종일관 행렬을 따르던 합창단은 해가 넘어가자 횃불을 들었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는 순간 합창단은 한 목소리로 낯선 노래를 불렀다. 바로 '민중의 아버지'였다.

3.

그 대장관을 다들 기억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 노래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노래는 처음부터 악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종 노래 책에 구전가요로 전해진 사연도 그 때문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 흥얼거리던 그 친구는 악보를 만드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는데도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익혀지는 대로 불렀다. 그렇게 김흥겸이 혼자 부르던 노래에서 우리들의 노래로 불려지면서 노래에 간단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가사의 한 대목이 바뀌었다. 전편을 부르고 되돌아가 앞의 두 소절을 다시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이 노래 가사의 마지막 구절은 '늙으신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김흥겸이 처음에 그 노래에 붙인 제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울산에서 씩씩하게 노동운동을 하는 1년 후배 이종호가 그 대목을 다시 부르면서 마무리할 때 '민중의 아버지'라고 고쳐 부르자고 한 것이다. 김흥겸은 그 순간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제주도서 올라왔다는 후배, 광주 항쟁과 학살보다 먼저인 4.3 제주 민중 항쟁의 뿌리를 곱씹으며, 누가 보아도 기독인이 아니고 신학생도 아닌 그 무지막지한 녀석의 한마디에 맥없이 동의했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변모 이후에도 그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만 더디게 퍼져나갔다. 악보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만천하가 알다시피 나는 거의 음치에 가깝지만, 그 노래만큼은 비교적 잘 불렀다. 물론 그 잘 불렀다는 것은 화성학적으로 격을 갖추었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노래만큼은 우리들의 노래라고 생각했고 그 절절한 탄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불렀다는 점에서 그렇다. 형편없는 노래 솜씨지만 내 입도 그 노래의 전파에 한 몫을 했다. 1983년 여름 그 노래를 전국적으로 퍼뜨릴 기회가 생겼다. 기독교장로회 청년대회(기청대회)였다. 요즘에는 청년들이 모이는 것이 신통치 않지만 그 때는 모였다 하면 천 명이었다. 그때는 각 교단별로 청년대회를 열었는데, 단연 기청이 가장 활발했다. 전국 각처 교회에서 모인 청년학생들의 축제였던 기청대회는 학생운동의 주요 이슈와 청년문화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대회에 그 노래를 잘 부르는 두 신학생이 참여했다. 나, 그리고 비교적 노래를 잘 부르는 1년 후배 김보한이었다. 이 대회를 통해 그 노래를 제법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꼭 그 덕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고 얼마 후에 나는 처음으로 그 노래 악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 노래책을 지금 찾아보니 안 보여 애석하지만, 고려대 노래팀에서 발간한 노래책으로 기억한다. 그 노래 책에 '구전가요'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후에 여러 노래책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책마다 제목이 제 각각이었다. '혀짤린 하나님', '늙으신 아버지',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민중의 아버지' 등 제 각각이었다. 노래를 만든 이에 대한 표기도 '구전' '작자 미상' 등으로 전해지다, 소문에 소문이 이어진 탓인지 어느 순간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름도 두 가지였다. 김흥겸이 빈민운동을 하면서 김해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던 탓이었다. '철거민 해방'을 뜻한다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노래가 '민중의 아버지'로, 그리고 그 작자가 '김흥겸'으로 확인되었을 즈음에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종종 부른다. 술집이나 거리가 아닌 교회에서 80년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교우들과 함께 부른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옛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교우들과 함께 『욥기』를 공부하면서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의 아버지'는 영락없는 욥기의 압축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1980년대 한국판 욥기인 셈이다. 성서연구에 열심히 참여하는 한 교우가 어느 날 욥 노래를 발견했다며 음반을 가져 왔다. 유명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음반에 실린 '욥'(Job)이었다. 로드리게스의 독특한 창법으로 전해지는 욥의 절절한 심정을 느끼며 그 노래도 심심치않게 듣는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그 포르투갈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 가사를 번역해준다면 '민중의 아버지'와 한번 비교를 해보고싶다.* (0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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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7 08:36 2005/08/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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