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이관술 1902~1950> / 안재성 / 사회평론 2006

2004년 <경성트로이카>(사회평론)를 써 잊혀진 일제하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생생히 되살려냈던 안재성이 이번엔 <이관술 1902~1950>을 펴냈다.

▲<이관술 1902~1950> / 안재성 / 사회평론 2006

“이관술은 1930년부터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해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두 차례의 감옥살이와 모진 고문, 십 년 가까운 수배 생활 속에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쟁한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7월 ‘정판사 위폐사건’의 주모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처형당하면서 거의 잊혀진 인물이다.
...대단히 뛰어난 두뇌와 헌신성으로 일제하 국내 노동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권력욕이나 소영웅심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외모는 수수했고 성품은 장난꾸러기처럼 재미있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선동가로서보다는 선전가로서 능력이 탁월했던, 대중을 감동시키는 현란한 웅변보다는 동료들의 신뢰와 존경심을 바탕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총무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태화강 선바위 담 큰 소년

이관술은 1902년 4월 26일 울릉도에서 태어나 다섯 살 무렵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로 돌아온다. 이관술은 근동에 보통학교가 없던 탓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할아버지 이석도가 연 입신학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소년 이관술은 담이 컸다. 수심이 깊고 물길이 휘감아돌기 때문에 해마다 두세 명씩 죽어나가던 태화강 선바위에서 어른들은 매년 여름 물속에 빠진 영혼을 건져내기 위한 무당굿을 벌였다. 무당굿이 절정에 이르면 돼지머리를 선바위를 지나 건너편 입신학당 절벽 아래 어두운 바위틈 속으로 깊숙이 넣어야 했다. 선바위와 절벽 사이의 좁은 물길은 무척 깊고도 빨라서 어른들도 감히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일이 이관술의 몫이 됐다. 이관술은 돼지머리를 허리에 묶고 검은 소용돌이를 헤엄쳐 건너가 바위 동굴 앞에 올려놓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제사가 끝나 어른들이 가버린 한밤중에 다시 홀로 어두운 급류를 건너 돼지머리를 가져다가 동네 아이들과 나눠먹었다.

울산이 낳은 수재

이관술은 19세 되던 1921년 경주시 외동면 출신 박가야와 결혼한다. 그리고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23년 21살의 늦은 나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관술이 들어간 학교는 경성(서울)의 중동고등보통학교. 중동고교에서 이관술은 3년 내 전교 1등이었다.

1925년 이관술은 당시 최고 명문 동경제대보다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한다. 동경고등사범학교는 졸업만 하면 평생 교사직이 보장되기 때문에 일본과 조선은 물론 중국과 대만에서까지 동양의 수재들이 모여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이관술은 해방 후 현대일보 기고문에서 청년교육을 통해 민족을 각성시켜 보고자 동경고등사범에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동경고등사범 고학년이 되면서 이관술은 법제경제연구회라는 사회과학 학습모임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론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따로 일본 내 사회주의 조직에 가담하거나 재일 조선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을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적어도 학창시절 이관술은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으로 민족주의 교육자가 되고자 열심히 공부만 한 것으로 보인다. 첫딸 정환이 태어난 것은 이 시기 1928년이었다.

반제국주의동맹과 첫 번째 구속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이관술은 1929년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경성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지리와 역사교사로 부임한다. 그해 10월 30일 광주학생운동이 터지고 다음해 3월까지 경성과 지방도시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폭발했다. 이관술은 학생시위를 계기로 민족주의의 허구성을 절감하고 동덕여고 학생들을 모아 학습모임을 만드는 한편, 경성지역의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연계를 맺어나가게 된다.

1933년 1월 이관술은 반제동맹 사건으로 구속된다. 동덕여고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조선총독부 국세조사과에 취직해 있던 제자 박선숙은 이관술이 구속되기 직전 그의 아이를 낳는다. 이관술은 딸의 이름을 경옥이라 짓고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후 곧바로 구속됐다. 주모자로 분류된 이관술은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 2년에 처해졌다.

1934년 4월 9일 이관술은 반성문을 쓰고 가석방된다. 이 시기의 반성문은 나중에 남발되는 전향서와는 달랐다. 이관술은 일경의 고문으로 폐병이 생긴 데다 아버지 이종락의 호소로 어쩔 수 없이 반성문을 썼다고 고백한다. 이후 이관술은 죽는 날까지 다시는 그런 문서를 쓰지 않았다.

가석방된 이관술은 본처 박가야와 세 딸(정환, 성옥, 정선)이 기다리는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넉 달을 머문다. 이때 막내딸 경환이 잉태된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던 이관술은 8월 하순 경성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

경성에 도착한 이관술은 맨 먼저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구속됐다 탈출에 성공한 이재유를 찾아나섰다.

함경북도 삼수의 빈농 출신인 이재유는 이관술보다 3살 아래인 1905년 생으로 일본대학 사회과를 중퇴하고 노동운동에 투신,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선전부 책임자로 3년여 동안 70번이나 체포된 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활동가였다. 1929년 일본에서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된 그는 1932년 12월 석방되자마자 이듬해 5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를 결성, 공장과 학교에서 조직사업을 시작해 국내 최대조직으로 성장시켰다.

경성트로이카에는 훗날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이현상, 하룻밤에 소조 하나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직 능력이 탁월했던 김삼룡, 이관술의 이복동생으로 동덕여고를 나와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순금 등 뛰어난 활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경성트로이카는 1933년 늦여름부터 소화제사, 경성고무, 조선견직, 종연방직 등 여섯 군데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7개 중등학교에서 동맹휴학을 벌이는 등 경성 일대 항일운동을 직간접으로 지도했다.

일본경찰은 곧장 탄압을 개시해 경성트로이카는 170여명의 조직원이 구속되고 1934년 1월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이순금 등 핵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조직이 붕괴된다. 이 사건으로 이현상은 7년, 김삼룡은 5년 동안 감옥살이에 들어간다.

체포된 이재유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1934년 3월 경찰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1차로 서대문 경찰서를 탈출했으나 얼마 못가 다시 체포된다. 2차 탈출에 성공한 것은 한 달 쯤 후인 4월 13일, 이관술이 석방된 지 4일 후였다. 일본 순사 모리의 도움으로 재탈출에 성공한 이재유는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경성제대 미야께 교수 집에 숨어들었다. 미야께 교수 집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38일 동안 숨어 지낸 이재유는 미야께가 붙잡히자 교수 관사를 나와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경성재건그룹, 경성준비그룹

이관술은 1934년 9월 동덕여고 제자 박진홍을 통해 남산 장충동 공원에서 이재유를 만난다. 함경도 출신으로 동덕여고 시절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박진홍은 동맹휴학을 주도해 학교를 퇴학당하고 1931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해 말 일경에 체포돼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박진홍은 출소 후 도피 중이던 이재유와 만나 그의 하우스키퍼가 된다. 이재유와 박진홍은 이 시기에 사실상 부부의 연을 맺었고 박진홍은 후일 옥중에서 이재유의 아이를 낳는다.

장충동 공원에서의 첫 만남 이후 이관술과 이재유는 경성트로이카를 재건해나간다. 2기 트로이카는 경성재건그룹으로 불렸다. 한편 가석방 상태였던 이관술은 이재유의 뜻에 따라 재판에 출석,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다.

공식 활동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조직원이 50 명을 넘어섰던 경성재건그룹은 1935년 1월 초순 또다시 검거선풍을 맞는다. 임신 3개월이었던 박진홍이 체포됐고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삼엄한 검문검색을 피해 경성을 탈출, 두 달 동안 강원도 산중마을을 떠돌다가 경성 인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서울 창동 부근)에 정착한다. 경남에서 수해를 당해 농토를 잃고 올라온 수재민으로 가장한 두 사람은 이재유는 김소성, 이관술은 김대성이라는 가명을 쓰며 18개월 동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 시기 이재유는 농부 차림으로, 혹은 양복 차림으로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토막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한편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 <적기> 제작을 책임진다. 1936년 들어 조직원은 60여 명까지 연결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경성재건그룹을 3기 경성트로이카라 할 수 있는 경성준비그룹으로 재편한다.

1936년 11월 말 주재소 순사들이 호구조사를 나온다. 두 사람은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적기 인쇄와 조직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도피 준비에 들어가 12월 25일 공덕리를 떠난다. 그러나 이재유는 이날 조직원이 체포된 줄 모르고 약속에 나갔다가 창동역 근처 야산에서 일본인 고등계 형사 60여명에 의해 체포된다. 이관술은 약속시간이 지나도 이재유가 돌아오지 않자 즉각 도주, 장돌뱅이 행색으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몸을 피한다. 그러기를 6개월, 이관술은 홀로 다시 경성에 돌아간다.

경성콤그룹과 두 번째 구속

1937년 6월 말, 이관술은 영등포 역 근처에 허름한 하숙방을 얻어놓고 조직 재건에 착수한다. 이관술은 우선 박진홍을 만난다. 이재유의 아이를 가진 채 체포된 박진홍은 2년 반 만인 5월에 석방돼 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낳은 아이는 어머니 홍 씨가 기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감옥을 나오기 전에 죽었다. 이관술은 콩그룹과도 접촉, 경성트로이카 출신 활동가들과 함께 새로운 상부 조직을 결성하고 영등포 지역의 현장 노동자 조직에 들어간다.

그러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 지 2주일 만에 이관술은 다시 경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석방된 이순금과 여의도에서 만나다가 왜경의 불신검문에 걸려 여의도파출소에 끌려갔던 이관술은 한밤중의 폭우를 뚫고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경성을 빠져나온 이관술은 거지 행색을 하며 대전으로 이동한다. 두 달 정도 대전에 머물던 이관술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활동을 재개, 1년여를 머문다.

1939년 1월 이관술은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석방된 이순금과 김삼룡을 접촉, 경성에 다시 들어가 경성콤그룹을 조직한다. 경성콤그룹에는 석방된 이현상과 박진홍 등도 합류한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기관지 <코뮤니스트> 발행을 책임진다. 이관술은 한 달에 한 번 발행된 <코뮤니스트>의 기사를 직접 쓰는 한편, 배포망 조직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고물장수로 변장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경성콤그룹은 경인지역과 남부지방, 함경남도까지 조직을 확대한다.

1939년 12월 이관술의 제안으로 박헌영이 영입된다. 박헌영은 그해 9월 대전형무소에서 석방됐다. 이관술은 박헌영을 청주의 비밀 아지트로 보낸다. 박헌영은 청주에서 40여일을 보낸 후 경성에 올라갔다가 1940년 2월 인천의 아지트로 내려가 기관지 편집 책임을 맡는다.

이관술은 1940년 5월 함경북도에 잠입한다. 청진에 도착한 이관술은 주을광업소에 노조 결성을 지도하고, 경찰의 검거가 시작되자 수성천 부근 산중에 동굴을 파고 은거하면서 기관지 <붉은 길>을 발행한다.

1940년 12월 이관술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간다. 10월에 이현상이, 12월에는 김삼룡이 체포되면서 조직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이관술은 대담하게 구두닦이를 가장해 서대문경찰서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며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이관술은 1941년 1월 7일 조직 복원을 의논하기 위해 인민전선부를 맡은 김태준 집에 갔다가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돼 3년여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일경은 수배 6년 만에 붙잡은 이관술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한다. 일본인 형사보다 조선인 형사들이 더 지독하고 악랄하게 고문했다. 노덕술이 대표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노덕술은 이관술과 같은 울산 출신이었다. 노덕술은 일본인 밑에서 고문기술자로 있으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병사하게 만든 자였다. 일제의 개가 되어 수많은 조선인 애국자를 고문했던 노덕술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특채돼 경찰 고위직까지 승승장구한 끝에 고향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부귀영화를 누린다.

경성콤그룹은 백 명이 넘게 구속되면서 조직이 급속하게 마비됐다. 체포를 모면한 박헌영은 1941년 9월 이순금과 함께 전라도 광주로 내려가 백운동의 한 벽돌공장에서 김성삼이란 가명으로 취직해 은거에 들어간다. 1944년 10월 하순 이재유는 청주감호소에서 병사했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그러나...

이관술은 고문으로 얻은 폐병이 점점 심해져 구속 3년 만인 1943년 12월 말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 범서로 돌아온다. 병보석 기한이 만료되자 이관술은 1944년 3월 31일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관술은 폐병에 걸린 채 거지나 다름없이 유랑생활을 하다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는다.

해방 직후 서울에 올라온 이관술은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 이순금 등 경성콤그룹 출신 핵심 멤버들과 함께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한다. 이관술은 9월 19일 공식 출범한 조선공산당의 중앙검열위원이자 공산당의 안살림을 총괄하는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는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 이관술은 ‘가장 뛰어난 정치 지도자 5인’으로 선정됐다. 우익 성향의 단체인 ‘선구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33%, 이승만 20%, 김구 17%, 박헌영 15%에 이어 이관술은 13%로 5위를 차지하는데 지지율로만 보면 김구, 박헌영과 큰 차이가 없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터졌다. 미군정청 치하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5월 14일 조선공산당 주도 하에 조선정판사 지하실에서 거액의 위조지폐가 발행됐다고 발표했다. 공산당은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전면 탄압으로 돌아선다. 5얼 18일 조선공산당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벌어졌고 미군정은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 처분했다. 이관술은 이 사건으로 수배됐고 7월 6일 체포된다.

9월 6일 미군정은 3대 진보신문인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폐간시키고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 조선공산당 핵심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10월 17일 이관술에 대한 첫 공판이 열린다.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이관술은 11월 28일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듬 해 4월 대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해 형을 확정지었다. 이관술은 생애 세 번째 감옥살이를 시작한다.

골령골에서 죽다

이관술은 형이 확정된 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1950년 3월 이주하와 김삼룡이 잇달아 체포된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은 수감된 좌익사범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한다. 6월 28일 남산 헌병대에 수감돼 있던 이주하와 김삼룡은 소나무에 묶여 총살당했다.

7월 8일부터 10일간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와 다른 형무소에서 이송해온 좌익수, 국민보도연맹원 등 모두 2천여명이 산내면 골령골 계곡에서 총살됐다. 이관술은 이 때 맨 먼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한때 월북했던 이현상은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 지리산에 대규모 빨치산이 형성되자 지리산에 입산,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53년 남로당의 몰락과 함께 북한 정권에 의해 모든 지휘권을 박탈당한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벽소령으로 오르는 도랑을 타고 가던 중 국군에게 사살당한다.

박헌영은 1956년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박진홍은 1948년 월북해 평양의 최고재판소 판사로 일하고 있었으나 전쟁 이후 행적을 확인할 수 없다. 이관술의 누이동생 이순금은 1989년까지 살아서 북한 사로청 지도위원과 인민대의원을 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1992년 이관술의 유족들은 무덤도 없는 고인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운다. 그러나 울산 일대 보수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비석은 송두리째 뽑힌 채 땅 속 깊숙이 묻혀지고 만다. 이 비석은 언제 다시 캐어져 다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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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8 21:04 2006/09/1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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