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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20호 96.5.30

현대자동차 6대 집행부의 '대등한 노사관계론'과 민투위



  현대자동차 6대 집행부는 '노사대등·공동발전! 고용안정·평생직장! 적정노동·인간생활!'을 집행 이념으로 내세우고 '노사대등한 경영참가제 실현, 생활임금 확보 및 복지 확충, 고용안정과 실질노동시간 단축, 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사업 기조로 삼고 있다.

  WTO 체제 하의 무한경쟁 시대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근대적 노사관계를 깨뜨리고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 "노사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결정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대등한 노사관계"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대자동차 6대 집행부의 이러한 집행 이념이 이른바 '연합 집행부'의 한계 때문에 '절충'돼서 나타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되려 '새로운 노동조합 상(像)'으로까지 높여 여겨지는 느낌이고, 6대 집행부는 적어도 이 점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뭐가 문젠가?

  첫째, 노사관계의 본질인 '대립과 갈등'을 분명히 전제하지 않은 채, '참여'를 '대등한 노사관계'라는 이념으로까지 높여 얘기한다는 데 있다.

  현노신의 구분법에 따르면 노사관계는 크게 '계급투쟁 지향적 노사관계'(극좌세력)와 '협조적 노사관계'로 나뉜다. '협조적 노사관계'는 '종속적 노사관계'와 '참여적 노사관계'로 나뉘는데, '종속적 노사관계'는 제한된 실리를 추구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임시조치로 대응하여 잠재적 폭발성이 있는 불안정한 노사관계(일본형 노사관계, 극우세력)이고, '참여적 노사관계'는 기업을 돈버는 장소일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공동결정과 공동참여를 이룩한 평화롭고 안정된 노사관계(독일형 노사관계)라는 것이다. 현노신이 얘기하는 새로운 노동조합의 상은 당연히 '참여적 노사관계'이고 이는 현노신 스스로도 인정하듯 '협조적 노사관계'다. 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벌이고 있는 '참여와 협력의 신노사관계'라는 것과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다른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노사관계의 틀을 나눌 때, 현대자동차 6대 집행부의 '대등한 노사관계'는 어디쯤 자리할까? '계급투쟁 지향적 노사관계'와 '참여적 노사관계'의 가운데 언저리거나, 아니면 '협조적 노사관계' 테두리 안에 놓인 '참여적 노사관계'쯤일 게다.

  아무리 노동조합에서 공동참여, 공동결정의 폭을 넓혀낸다 해도 그것이 노사관계의 본질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 '대등한 노사관계'의 모범으로 이상화되고 있는 스웨덴을 보자. 엄청 발달된 공동결정제도를 갖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공동결정을 넘어서서 소유를 사회화하는 데까지 밀어부쳐 봤지만(이른바 '기어가는 사회주의'), 거꾸로 자본의 집중과 노자관계의 불평등이 더욱 깊어지는 모순된 결과만 낳고 말았다.

  대립과 갈등이라는 노사관계의 본질은 노사관계 자체를 재생산하는 자본의 커다란 운동구조가 변혁되지 않고서는 바뀌지 않는다. 사람 노동이 만들어내는 잉여가치를 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구조 속에서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재생산을 이끌어 가는 근본 동력을 무시하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건강한(?) 재생산조차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왜냐 하면 자본이 갖고 있는 무제한의 이윤 추구 속성을 노사관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적절히 통제하지 않게 되면, 무차별한 자본의 공세에 노동이 피폐화되고 고갈되어 자본주의 자체가 재생산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6대 집행부가 표방하는 '대등한 노사관계'란 '거대한 총자본의 힘에 맞서 총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유의미한 대립항으로 세력화'되었을 때만 '쟁취'될 수 있는 것이고 그조차도 노사관계의 불평등이 전제되는 것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대등한 노사관계'는 역사상 노동과 자본의 힘이 팽팽히 맞부딪치는 '이중권력'의 짧은 기간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었을 뿐이다.

  6대 집행부 자체가 양봉수 동지의 분신투쟁으로 '쟁취'된 것임을 기억한다면, '노사대등의 집행 이념'을 '변화된 상황에 대한 현자 노조운동의 새로운 활동방식'으로 과도하게 격상시켜 노동조합의 투쟁 자체를 낡은 활동방식으로 폐기처분하려 해서는 안된다. 6대 집행부가 '참여를 넓혀가는 협조적 노사관계'로 개량화되느냐, 아니면 '투쟁을 통해 참여를 확대해가는, 또는 투쟁하면서 참여하고 참여하면서 투쟁하는' 현자 민주노조운동의 적법한 계승자로 '자기 자리'를 잡아가게끔 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현장 민주세력 하기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민투위는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정해야 한다.

  둘째, 6대 집행부의 사업 기조 어디에도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 지역주민과의 연대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6대 집행부 출범 이후 누누히 강조되어왔고 또 실천되었다. 그러나 현단계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최대 당면 과제라 할 산별노조 건설에 대해서 6대 집행부는 전국 최대 단일노조라는 '덩치'에 걸맞는 계획과 실천을 내오지 못했다. 민주노총 가입 경로를 조합원 총회라는 '절차'의 문제로 떠넘긴 것은 분명 6대 집행부의 책임 방기였다. 민주노총 울산시협의회 의장과 현총련 의장에 대해 정갑득 위원장이 '죽어라고' 고사한 것도 지역에서 현자가 차지하는 객관적 위상과 책무를 회피한 것이었다. 이영희 부위원장이 현총련 의장에 선임된 것을 두고 언론이 "현총련 약화, 연대 기피"로 대서특필한 것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다. 이쯤 되면 6대 집행부가 과연 연대투쟁에 대한 최소한의 의지라도 갖고 있는가 걱정된다. 노동절 기념 행사도 그렇다. 영남 노동자들의 현자에 대한 '실망' 말고, 도대체 남은 게 뭔가? 현총련이 밝힌 금속산업 노동조합의 대통합을 위해 6대 집행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등한 노사관계'가 단위 사업장 안에서 완성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산별노조 건설운동이 '노사대등'의 최소 전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의 앞뒤를 따져도 지역주민과의 연대보다 현대중공업과의 연대가 먼저다.

  민주노조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산별 시대를 앞당길 현장활동을 앞장 서 실천해야 할 민투위는 6대 집행부가 금속산별 대통합의 주체로 빨리 나설 수 있도록 밑에서부터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속산별 재편에 있어 민투위 안에서 결정되고 확인된 방침이 더 이상 흐지부지되는 일이 없도록 민투위의 입장을 다시 통일시키고 집행에 책임을 분명히 지는 것이다.

  '참여-협조적 노사관계'와 뚜렷하게 선을 긋고, 현자 민주세력의 하나된 '투쟁-참여적 노사관계'론을 재정립하는 과정은 현자 민주세력의 새로운 단결을 위한 하나의 계기로 조직되어야 한다. 관건은 이 과정 전체를 현자 민주노조운동의 총노선과 기조를 잡아가는 활발한 토론과 논쟁으로 얼마나 발전시켜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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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55 2005/02/14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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