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10/08 13:51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지난 수요일인가? 모 대학의 기자가 농성장을 찾았었다. 하이텍 투쟁을 계기로한 노동보건운동에 대한 기사를 이번달 특집으로 해서 가겠다고 하길래 한~~참 설레발을 풀었드랬다.

 

기획을 우찌가면 좋을지도 이야기해주고.... 나름 유쾌하게 해주려고 했었다.

 

그리하여 노동보건운동 일반/근로복지공단 비판/ 하이텍 사례로 가기로 하여 첫 꼭지를 쓰기로 했다. 마감은 일요일이었으나 주말에 워~~낙에 정신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어제 하이텍 문화제도 안 가고 글을 썼었드랬다.

 

그리고 몸이 매우 좋지 않아 감기약을 줏어 먹고 10시 반이 넘어 잠이 들었는디... 떡하니 전화가 왔다. 기획이 바뀌었단다. ㅠㅠ  마감 이틀 전에 기획이 바뀌다니... ㅠㅠ

 

그리하여 이 글을 못 쓰는 글이 되어 버렸고, 난 다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번 일로 깨달은 교훈!

 

첫째, 글은 절대 미리미리 쓰지 말 것이며...

둘째, 쉬고 싶을때는 핸드폰을 끄고 잘것!

 

 

암튼 그리하여 못 쓰게 된글... 블로그에라두 올려본다. 그나마 블로그라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ㅠㅠ

 

 



 

감시와 차별로 인한 집단 정신질환을 인정받기 위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13명의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 앞에 천막농성을 시작한지 140여일이 넘어가고 있다. 서울대 병원의 수술실 간호사들은 근골격계 직업병을 인정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고 있고, 이천에서는 공사장에서 무너진 콘크리트에 건설 일용직 노동자가 떼죽음을 당했다. 노동부에서 ‘인정’하는 산재 통계는 줄고 있다는데 왠지 ‘인정받지 못한’ 노동재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왜 노동자들은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을까?


신자유주의의 폭풍


제2차 세계대전이후 급격한 성장을 계속하던 자본주의는 1970년대 만성적인 장기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 장기불황은 전후 호황 속에서 생산수단이 급속하게 팽창했고 이로 인해 자본의 무한경쟁 속에서 이윤율이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황을 겪으면서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자본을 위한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는 개방화․탈규제․유연화․민영화․복지축소․노조무력화를 핵심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90년대 초 신경영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96년말 노동법 개악으로 대표되는 노동유연화에 대한 정책적 뒷받침과 함께 공기업 구조조정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대한 용인과 지지로 이어졌다. 한편에서는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통해 노동운동세력를 포섭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으며, ‘경제 살리기’와 ‘고통분담’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본의 위기를 민중의 위기로 전환시키고 사회적 통제 시스템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IMF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의 정리해고와 이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 달성과 현장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 극대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팀제의 도입, 인원감축과 전환배치, 근무형태 변경을 통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열심히’ ‘죽도록’ 일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의 현장이 ‘병영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제 방식에 의해 움직여 왔다면 신자유주의의 현장은 ‘합리’와 ‘협조’라는 미명하에 자발적으로 경쟁하며 ‘죽도록’ 일하게 만든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점점 더 병들고 죽어갔다.


망가지는 몸, 빼앗긴 일상, 사라지는 목숨


1992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의 자살증가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수는 92년 9.7명에서 2002년 19.1명으로 연평균 1명씩 증가해 2위 멕시코(0.61명), 3위 일본(0.44명)과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자살율의 급격한 증가에 대해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던 경제성장세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추락하면서 국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IMF 이후 신용불량자가 늘어나고 빈곤이 확대되면서 소위 ‘생계형 자살’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극단적인 자살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정부의 산재통계를 살펴보자. 2004년 한 해 약 9만여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했다. 공상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그런 공식적인 이름도 없이 은폐되는 산재까지 고려하면 노동부의 9만이라는 숫자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또 작년 한해동안 사고로 인해 1,537명의 노동자가 그리고 102명의 노동자가 질병으로 인해 현장에서 일하다가 사망했다. 사망의 원인을 살펴보면 약 800명이 소위 ‘과로사’라고 불리는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사망하였고, 추락으로 인한 사망이 570명이었다. 작업관련성 질환 중 뇌심혈관계 질환이 2,285명이었으며 근골격계 질환자가 4,112명이었다.


망가져 가는 노동자의 삶


이렇게 죽거나 병들지 않아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OECD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2390시간에 이르러 회원국들 중 1위였다. 이는 독일의 1300시간 미국의 1800시간 등 선진국뿐만이 아니라 멕시코, 폴란드보다도 월등히 많은 수준이다. 이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노동력을 재생산하기위한 휴식조차 부족한 것이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인 것이다. 게다가 사교육비 비중 역시 당당하게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잔업·특근 안 하면 애들 학원비를 낼 수 없다”는 노동자들의 푸념은 전체 사회의 경제지표를 놓고 보아도 당연한 것이다. 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지출 비중은 OECD 국가 중 맨 꼴찌이다. 복지에 지출되는 돈은 최저수준이고 경제규모에 비해서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평균수명은 76.4살로 24위에 머물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마다 수십만명씩 늘어나면서 그 비율이 50%를 넘어선 지 오래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기저에는 고용불안과 저임금으로 인해 “벌 수 있을 때 벌자”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2004년 167만원으로 2003년보다 소폭감소 했으며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보다 10만원정도 증가한 것에 불과하다. 통계청 도시가계조사에서 도시근로자 가구당 가계수지[가처분소득-소비지출(전세 및 자가 평가액 포함)] 추이를 살펴보면, 1988~97년에는 10만원 안팎이던 가계수지 흑자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9~2001년에는 적자로 돌아서는 등 생활상태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2002년부터 흑자로 돌아섰지만 아직까지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고 있지 못 하다. 1998년 이후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은 1970년대 이후 최하를 기록하고 있으며 실질임금상승률은 2001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생산 증가율에 크게 못 미친다. 이렇게 임금상승률이 저조하고 실질적 생활임금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잔업·특근으로 부족한 것을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IMF 경제위기 당시 자본은 일단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고 했고, 노동자들은 금반지도 빼주고 애들 돌반지까지 내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국민소득 2만불을 외치고, 연일 주가는 최고치를 경신하고, 자본의 생산성은 급격하게 증가해 왔다. 그러나 빈곤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계속 병들고 있다. 파이가 커졌건만 노동자들의 삶은 더 힘들어지기만 했다. 그 파이는 누가 다 먹었을까?


신자유주의에 균열 내기, 노동건강권 투쟁


아마도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003년 온갖 경제신문을 장식하던 근골격계 직업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2002년 대우조선을 필두로 노동강도 강화로 너무 몸을 많이 움직여서 몸의 곳곳이 닳아서 생기는 근골격계 직업병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숟가락을 들지도 못해 고통 받던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집단으로 산재승인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경제 신문들은 너나 할것없이 노동자들이 근골격계 직업병을 가지고 파업을 하고 집단적 저항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다.


경총은 자신들의 내부문건에서 ‘근골격계 직업병 집단요양투쟁은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 투쟁’이라고 정의하면서 발빠른 대응을 했다. 한국에서 소위 잘 나간다는 대기업의 부사장급 이상이 모여 경총내에 ‘기업안전보건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이 위원회는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하든 아니면 다양한 자신들만의(!) 방식을 통하든 노동자들이 ‘건강’의 문제로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건강의 문제가 조직화·집단화 되어 ‘투쟁’이 되지만 않는다면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었다. 회사안에 수영장을 만들고 헬스클럽을 만들고 최첨단의 물리치료 기기들을 도입하고 의사도 고용했다. 개인적으로 ‘치료’를 해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 건강권’에 즉, 질병의 원인인 ‘신자유주의에 의한 노동강도 강화’에 접근하지 못하게 사전에 막은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근로복지공단이 적극적으로 거들고 나섰다.


신자유주의 관리 전략의 첨병, 근로복지공단


이는 인정은 엄격하게 해주고, 치료기간을 최대한 짧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들이 집단화되는 것을 막기위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근골격계 직업병 인정 기준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 2003년 말 ‘자본’의 관리를 거부하고 집단요양을 신청한 노동자들은 10명 이상이라는 이유로 해당 지사인 안양지사가 아닌 본부로 이관되었고  38명중 12명만이 원래의 요양신청서 그대로 승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변경승인, 부분승인, 불승인으로 철퇴를 맞았다. 반면에 사측 도장이 찍힌 신청서를 몇 번에 나누어 낸 한 사업장은 아무런 문제없이 지사에서 전원 승인이 났다. 또 노사공동프로그램을 통해 발굴된 환자들을 10명이상 요양신청한 한 사업장은 ‘본부로 이관되냐?’는 질문에 ‘검진한 병원이 다르니 10명이상이라 할 수 없다. 그냥 지사에서 처리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최근에 근로복지공단은 ‘노조를 끼고 하면 절대 승인 안 내준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노조탄압으로 정신질환을 앓던 청구성심병원은 산재승인을 해주었던 공단이 1년만에 마찬가지로 집단 감시와 노조탄압으로 정신질환을 얻은 하이텍노동자들은 전원 불승인을 내었다. 서울대 병원 수술실 간호사들의 경우 2명임에도 불구하고 불승인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의 자문의는 ‘조합이랑 같이 안 했으면 다 승인나는건데...’라며 말을 흐렸다고 한다.


근로복지공단의 어처구니없는 작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요양처리지침이라는 것을 만들어 산재환자들이 더 나은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옮기는 것조차 사전에 근로복지공단의 허락을 받도록 하고 있으며 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요양연기를 할 때도 온갖 복잡한 서류와 함께 7일이전에 미리 승인받도록 하고 있다. 또한 한편에서는 ‘고객 100번 기절시키기’라는 친절 가이드북을 발행하면서 한편에서는 ‘민원인 100번 때려잡기’ 라는 집단과격민원대응 지침(올해 5월 9일에 공단 이사장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을 만드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남발하고 있다. 공단은 자본의 이해를 중심으로 재정안정화라는 미명 하에 투쟁하는 노동자에게는 단호한 칼날을 휘두르고, 순응하는 자에게는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공단은 스스로 이러한 태도를 교정할 이유도 의사도 없다.

 

자본이 두려워하는 것, 이윤 공격하기


1990년대 초반이후 한국의 자본들은 ‘신경영전략’이란 이름으로, 98년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현재 ‘유연생산체제와 협조적 노사관계’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을 일하게 만들고 있다. 기본급만 가지고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없어 잔업·특근을 할 수밖에 없는 임금체계를 만들고, 상시적 고용불안과 위기를 조장하며 ‘열심히’ 일하게 만든다. 유연화된 노동시장을 바탕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강조하고 물량을 ‘장난질’을 치면서 내부경쟁을 유발시켜 노동자들이 미친듯이 일을 하게 만든다. 이런 내부경쟁은 국가를 초월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해외공장을 빌미로 국내의 노동자들에게 노동강도의 강화를 감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해외공장을 열지 않는 조건으로 노동시간의 연장에 합의한 독일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거기에 ‘합리적 노사관계’, ‘협조적 노사관계’ 또는 ‘상생’을 외치며 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의 계기들을 ‘관리’, ‘통제’하고 있다.


지금 자본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이윤’이 공격받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살기를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노동강도 강화를 통한 자본의 이윤율 극대화 구조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명확하면 그것에서부터 세상 바꾸기의 균열점을 찾으면 된다. 집단적으로 요양투쟁을 전개해서 구조조정의 폐해를 계속 만천하에 드러내고 우리의 ‘몸’을 중심으로 노동과정을 재편함으로써 자본의 이윤창출 구조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된다. 이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파이는 커지지만 우리는 결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일상적인 고용불안과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기만 한 임금구조, 그리고 내부 경쟁 속에서 높아져 가는 노동강도를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완화’ 시키겠다는 우리의 요구는 자본의 ‘이윤 생산 구조’, 즉 노동의 ‘착취 구조’에 대해 맞서기 위한 대장정의 출발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외치는 건강하게 일할 세상과 일터는 바로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의 다른 이름이고 노동강도 완화 투쟁은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을 위한 투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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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8 13:51 2005/10/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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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오리 2005/10/08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학신문에 실렸으면 못볼 수도 있었던 글인데..
    여기서 볼수 있어서 좋군요..
    고생 많으십니다.

  2. 해미 2005/10/09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산오리/ ㅋㅋ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동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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