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7/06/17 10:33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일중독자의 고백

 

고백하건데, 나는 일중독자다. 점심 먹으며 모니터 들여다보기 일쑤이고 지하철에서 자료보기, 하루에 전화 수십통 하기, 주말에도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기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다. 입에서는 버릇처럼 ‘바쁘다’는 이야기가 붙어 다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게 더 힘들다. 같이 사는 가족들과 일주일에 한번 같은 밥상에 앉아 밥 먹기도 어렵다. 물론, 이런 일상들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괴로움 속에서도 즐거운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즐거워서 자율적으로 하는 일이기도 하고 일을 하면서 얻는 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강수돌 교수의 ‘일중독 벗어나기’는 이런 나를 어찌 보면 꾸짖는 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나는 공부를 잘 하면 예쁨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고,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모범생으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일중독자로 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일중독의 근원은 사실 자본주의의 원리를 어려서부터 일찍 ‘체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은 ‘경쟁력’을 얻기 위해 ‘성실’해야 하고 공부라도 잘 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교적 어렸을 때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문제는 이러한 일중독이 나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전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일중독자들의 현실

 

내가 만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회사의 경쟁력’을 자신의 경쟁력으로 생각하고 잔업과 특근의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감내한다. IMF 경제 위기 이후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어진 상황에서 물량은 자신의 고용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고, 물량이 많다는 것은 회사가 잘 나간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의 경쟁력과 동일시된다. 물량이 많아서 잘 나갈 때 잔업·특근을 열심히 해야 애들 학원비를 내고 각종 보험료를 낼 수 있다. 회사가 경쟁력이 떨어져서 물량이 줄어들게 되면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학원비와 보험료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이는 결국 자신의 고용문제로까지 연결된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현장에서는 ‘(물량이) 있을 때 최대한 벌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러다 보니 현장의 노동자들의 입에서는 비명과 절규가 흘러나오고 있다. 2005년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노동귀족이라고 전 국민에게 비판받는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 내용은 끔찍한 일중독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지금도 한 달에 일하는 시간이 450시간이거든요. 한 달에 쉬는 시간이 3, 4일밖에 안 쉬니까요. (H자동차, 조합원 인터뷰 중)

 

쉬는 날 되면 쉴 줄도 모르고, 놀러갈 줄도 모르고, 어디가 맛있는 곳이 있는지 안 가보니까 모르지요. 있을 때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벌어놓자. 그러다 보니 어느새 청춘이 다 지나가고 돌이켜 보면 벌써 40-50세, 정년까지는 많이 남았지만 그것도 잠깐이거든요. 나중에 좋은날이 오면 즐겁게 재미있게 살겠지 그랬는데 그날이 없네요. 항상 부족하고 힘들고 살아가는 게 너무 재미없이 살아가요. 매일 특근, 잔업, 야간근무 이렇게 살다보니 언제 봄이 오는지 언제 여름이 가는지 몰라요. (H자동차, 조합원 인터뷰 중)

 

모친 같은 경우 연세가 많이 들고 작년 같은 경우는 암수술도 하고 그쪽에는 비급여가 많이 되고 회사에서 혜택이 안 되니까 그쪽으로 많이 지출이 되고, 다른 여유생활 취미생활은 전혀 못하고 지내고 있다. 여행, 외식은 시간이 없을뿐더러 그렇게 일을 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생활을 못한다. 지금 단칸방에 살고 있는데, 옛날에 무급휴직 때 돈이 없어서 대출을 내었는데, 지금 한 달 급여가 300만원인데도 대출이자내고 단칸방에 월세주고 생활하면 딱 맞아요. 정말 너무 변화가 없는 거야.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잖아요. 없는 사람은 병도 걸리면 안 돼요. (H자동차, 조합원 인터뷰 중)

 

그러니까 우리 애가 중학생인데 과외를 하거든요. 만약에 특근을 줄이면 과외를 못 받아요. 이게 임금 인상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임금, 지출 이거를 줄여줘야만 어느 정도 임금이 감해도 생활이 가능하죠. (H자동차, 조합원 인터뷰 중)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 보면 끔직하고 나도 언제 저렇게 될 것 같아 겁납니다. (H자동차, 조합원 인터뷰 중)

 

이러다 보니 그저 술 먹고, 자고, TV 보는 것 외에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여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여가 시간은 ‘노동을 위한 준비’에도 부족하다. 건강관리나 자기개발, 문화생활이나 지역사회 활동 참여 등은 불가능한 일이다. 너무 지치다 보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희귀한 질병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걸리는 ‘전염병’ 같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준하는 상태에 처해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체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저자는 이 책에서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노동자들의 상황을 일중독이라고 정의한다. 프리랜서나 전문가는 전문가대로 블루칼라는 블루칼라대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한국사회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경제학적으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저자는 일중독(work addiction)이란, ‘일이 사람들의 삶에서 지배적 비중을 차지하면서 자기 일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도 병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또 갈수록 더 많은 일이나 더 높은 성과를 내야 만족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일을 중단하는 경우엔 견디기 어려운 불안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병적 상황’으로 정의한다. 저자의 일관된 견해는 일중독을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과 같은 일종의 정신 병리로 본다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 병리의 원인으로서의 한국사회의 집단적 상흔과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강자와의 동일시’ 과정을 통한 ‘내적 자율성’의 상실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본적인 ‘레드 콤플렉스’위에 공고한 일류주의(학벌) 콤플렉스(경쟁 이데올로기), 남성(가부장) 콤플렉스 등이 일중독의 근원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산업 역군’이라고 추켜세우고, 개천에서 용 나서 일류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의 성공기를 방송으로 내보내고, 군대를 통해 규율과 체계에 복종하는 법을 인입시키면서, 그렇게 근면과 성실은 한국인 최대의 덕목이 되어온 것이다.

 

이렇게 개별의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시기를 지나 경제위기라는 정신적 충격을 겪고 난 후 한국사회는 이상한 일중독을 조장할 수밖에 없는 ‘경쟁력’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많은 국민들이 반대를 했고, 심지어 한 명의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극단적 선택을 한 한-미FTA만 해도 그렇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경쟁력’을 키우려면 개방이 필수적이고 일부(!)의 손해는 적절히 보완해주는 것이 국가 전체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찬성론자들의 논리 아니던가?

 

한편 “오늘날은 일중독과 함께 소비중독이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일중독의 해독을 소비로 풀려 하고, 소비중독 때문에 일중독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일에 파묻힌다. 일중독과 소비중독의 도수가 높아질수록 자본주의의 파괴성은 고양되는 한편, 같은 조건이라면 자본가 이윤은 증가한다. 따라서 오늘날은 일중독과 함께 항상 소비중독 또한 극복의 대상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빠져가는 동안 자본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듯하다. 자본의 이윤 중심의 시간 기획이라는 노동자들이 ‘내적 자율성’을 상실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중재요인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빠져 사선을 넘나드는 동안 자본은 다양한 공학적 또는 과학적 원리를 내세우면 시간을 자본 중심에서 기획하는데 성공해 왔다. 흔히 이야기 듣는 모답스, 여유율, 공수나 맨아워, 시간당 노동생산성 등의 용어로 다양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의 시간은 자본의 것이다.

 

일중독의 극복, 세상을 바꾸기

 

이렇게 일중독의 원인을 살펴보면 결국 일중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자본 중심의 세상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매개로 그 세력 확장을 꾀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그대로 둔 채 과연 그러한 개인적, 소집단적 실천만으로 ‘일중독으로부터의 해방’ 내지 ‘노동 해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도 그 대답은 ‘불가능하다’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광풍 앞에서 개인이나 소집단의 작은 실험은 마치 종이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집단적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전복을 목표로 다수가 몰입할 수 있을까? 이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불행히도 다수가 일중독에 빠진 만큼 자본의 원리를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첫째, 하루 4시간 생계노동, 4시간 사회활동, 4시간 친교활동, 둘째, 주거, 교육, 의료 문제의 공동체적 해결, 셋째, 세제 개혁 및 행정 개혁을 통한 자원의 재분배, 넷째,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노동의 축소 내지 폐지”를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사회학적이거나 경제학적 소양이 부족한 의사인 나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일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이 의사들의 전통적인 접근처럼 일중독이라는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근본 원인을 고치기는 어려우니 ‘대증요법’으로 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책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일중독이라는 현상은 이러저러한 배경과 맥락이 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대증요법이 중요한 치료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들을 과로사로 죽을 정도의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내모는 경쟁력(=이윤) 중심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일중독으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구조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어떠한 보완책도 결국 보기 좋은 떡에 불과할 뿐인 것 아닐까? 과거, 주 5일제를 도입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내세우면서 전체 노동자들이 싸웠지만 이는 결국 노동자들의 수당으로 귀결되었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1위의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보완책으로 해결될 수없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그리고 사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어려움과 현실이 개별의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스스로의 노동과 삶에 대한 입 열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일중독에 대한 불만과 요구를 조직하고 이에 기반을 둔 현장 활동들 속에서 현장을 잠식한 이데올로기들부터 하나하나 깨어나가야 한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힘든 것은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쉬고 싶은 것을 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 속에서 우리 일상을 되돌아보고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집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강수돌 교수의 ‘일중독 벗어나기’는 사회적 전염병이 되어 버린 노동의 현실을 꼼꼼히 살펴보고 원인을 진단하는 의미 있는 텍스트이다. 그리고 일중독을 ‘미덕’으로 여기는 잘못된 가치체계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그 대안을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노동자들의 몸과 삶을 기준으로 그리고 생활의 즐거움을 기준으로 가치 판단의 체계가 확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전염병의 발현은 줄 수 있겠지만 일중독을 일으키는 병원균은 곧 자본주의에 적응을 해서 우리가 처방한 대증요법에 대한 내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이는 다시 노동자들의 몸과 삶을 병들게 할 것이다. 이제 경쟁력이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과 삶, 그리고 일상의 즐거움을 이야기하자. 이것이 일중독을 벗어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진보평론,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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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7 10:33 2007/06/1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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