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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지음님의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관련된 글.

지난해 읽고 나서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다. 게시판에 "용감하게 책 읽기"를 만들고 첫 정리로 생각했는데 지음의 글을 보고야 한번 진짜 용감하게 고민을 정리해 본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읽기도 어렵게 읽고 시간도 3개월이상 이나 지났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맑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도 흥미 있는 책일 것이다.

트랜스 크리틱을 읽고 나서 칸트와 맑스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 누군가 읽오보라고 권해준 책이다. 고진의 사상적 괘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참 요원하다.



일단 칸트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칸트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도 어렵다. 이런 류의 지식이 더욱 부족한 것은 맑스주의 철학도 마찬가지지만 관념주의 철학이라고 치부되던 많은 철학들이 대중적인 언어로 이해되기 쉽게 나온 것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책에서 칸트에 대한 부분이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반면 맑스는 여전히 어려운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맑스 이야기는 들어 봤다는 정도다. 그리고 결론에 대해서는 그 이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책을 부정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굉장히 흥미진지하게 읽고 생각할 지점도 많았다. 다만 내가 정리할 능력이 안되고 책을 읽고 바로 정리하지 않아서 이미 책에 대한 내용이 다 날아가 버렸을 뿐이다.

 

오히려 이전에 해왔던 현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운동의 전화와 혁신을 고민하면서 토론했던 느낌이 담겨 있기도 하다.물론 여러 수준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 수준이라는 것은 누구(고진과 "우리")의 지적수준이 우세하느냐가 아니다. 체제변혁적인 중심인가 관계변화적인 중심인가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점도 단순하게 내가 생각하는 문제일뿐 고진의 사상을 내 맘대로 "개랑"이리 이런 언어로 평가절하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럴 문제도 아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다시 정리해보아야 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적인 문제는-이 지점은 이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발생인지 고진이 다른 곳에서 차용한 것인지 몰라도-코페리니쿠스적 "전회"라는 부분이다. 전회(회전, 자리바꿈)이라는 이 어렵게 쓴 쉬운 말은 칸트가 차용가능느냐, 맑스를 올바르게 해석했느냐 이전의 문제설정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지점은 천동설 수준의 과학의 발전에서, 즉 양적전화에서 지동설이라는 질적전화로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상자체와 과학의 입장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고전적으로 양질전화의 법칙을 사회와 역사의 발전경향에 대한 대입으로인류 역사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목적론-경제결정론의 시각을 다시한번 교정시켜 준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안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활하고 움직이면 공산주의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코페리니쿠스의 전회처럼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로 "자리바꿈"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다른 시각으로 칸드를 돌아보고 새롭게 해석할 부분을 새롭게 해석해서 맑스와 연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제목 trans와 <cri·tique

 n(문예·미술 작품 ) 비평, 평론>의 합성어인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그런 전회를 위해서 칸트가 기존 사상에서 뛰어 넘으려 했던 지점을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도덕성을 찾아 새롭게 해석하고 맑스의 상품과 자본 잉여가치에 대한 과학과 연결시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근대 최고 과학적 성과이자 혁명적 사상을 살리는 것은 그 과학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이 확장되고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방편 즉, 고진이 칸트와 맑스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얻은 결론,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 넘어서는 새로운 혁명적 자리 바꿈을 가져가는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이 대안화폐운동과 노동(자)소비자 운동이다.

이것을 가능성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본다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문제라고 본다. 자본의 축적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거치면서 형성이 되는데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이 축적되는 그리고 잉여가치가 착취되는 공간이 있다면 이런 것이 가능한 순환구조라는 시간 흐름이 있다.

우리 사회를 아주 단순한 사회구조라고 보았을 때 이런 흐름은 착취가 없는 공동체 경제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며 상품과 자본의 시간적 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비자 운동, 고진이 이야기하는 노동자로서 소비자운동이 무엇인지 이전에 대중적 반감과 거부감이 심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 가능성도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고 본다. 이와 함께 생태운동이나 다른 사회운동과 결합되면서 그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고 고진은 보는 듯 하다.

소비자라는 언급은 여러 논쟁의 여지가 있고 나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다. 나는 혁명, 혁사, 사회주의 이런 언어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과는 좀 다른 거부감이 있다. 그것은 고진이 말하려고 했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체제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소비관계만의 문제로 구축이 가능한가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축적체제)가 근본적으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속에서 금융부문의 확장을 통해서 그것을 상쇄(왜곡 위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즉 고진의 말대로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순간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그 상품을 소비(구입)하는 순간 생긴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재생산할 이윤을 상품관계에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되면서 생산부문(물질적확장)을 통한 이윤추구는 사실상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을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검소하고 청빈한 삶, 자본주의 관계 밖으로 과감하게 탈출해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살고자하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 붕괴시키는 혁명적 운동을 생활 속에서 진행할 노동자가 얼마 나 존재하지에 대한 의문도 고진의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지점 중 하나다. 그것은 노동자의 지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운동 또한 문화적 감수성이 필요한데 노동자계급에게는 이런 문화적 감수성마저 빼앗겨서 표출하기 어려운(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점이 있다. 그래서 소수의 운동으로 제안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노동자 민중이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다.

 

아무튼 공산주의가 미래의 도달할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나로서는 여러가지 경우의 수와 비판적인 지점이 있지만 고진의 주장은 새겨볼 만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성을 주장한 댓가로 단계론을 폐기하고 단계로서의 피티독재를 폐기했지만 피티독재 자체를 폐기한 것으로 오해 받아온 시간이 있었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내가 인정받느냐 오해를 푸느냐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운동하고 새로운 시스템-그것이 안되면 관계라도-을 구축하려고 하느냐이다. 그것을 위해서 고진을 받들지는 않아도, 고진의 이야기에 재미를 붙여 보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유의미 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하는데 역사발전 5단계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의 역사해석 소위 "문명사"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전혀 딴 소리 같고 생소하겠지만 내 기준으로 고진의 문제의식 속에는 고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5단계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의 현실운동, 현실 가능성에 주목이 있다.

이것은 맑스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고 했으면서도 5단계론을 펼친 것에 대한 고민(그 조건)에서 우리 안에 있는 서구 중심 사고를 벗어나야 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런 지점은 문명사와 관련한 책, "총, 균, 쇠" 가 읽을만 하다고 한다. 또 유목민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목민의 역사는 여러 해석의 차이가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문명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변방에 동시대 적으로 존재하고 상호 경쟁, 투쟁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회가 발전하는 지 역사가 흐르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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