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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보수'가 사라졌다

[이관후 칼럼] "R&D를 줄이면 그게 보숩니까?"

이관후 정치학자  |  기사입력 2023.08.25. 05:13:01

 

지난 대통령선거를 앞둔 2021년 겨울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윤석열 후보의 공약 중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 정치권에서 경험이 많은 한 선배에게 물었다.

 

"윤석열 후보가 감세를 저렇게 많이 하겠다고 하면서 지출을 줄이겠다는 내용은 없어요. 현실적으로 감세를 못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부자 감세는 무조건 해주겠지. 그래야 정권 내내 지지율이 유지될 테니까."

 

"그럼, 도대체 어디서 예산을 깎을 수 있습니까? 지금 대한민국 예산안에서 그렇게 몇 조씩 깎을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여야를 떠나서 국회에서 예산심사를 해보면, 어디서든 그렇게 사업을 훌쩍 줄일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크게 자를 수 있는 게 있지. 아마 R&D 예산을 대폭삭감 할거야. 복지는 못 잘라. 받던 걸 못 받으면 사람들이 화내니까. SOC도 어려워. 그건 GDP나 실업률하고 관계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국방비를 줄이겠어? 반북 보수정서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크게 줄이진 못해. 그럼 어디겠어? 줄여도 당장은 표가 안 나는 곳, 국가가 직접 통제 가능한 곳, 이익단체가 힘이 약해서 찍소리 못하는 곳, R&D야." 

 

"에이 설마요. R&D는 국가의 미래에요. 보수는요, 아무리 당장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도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는 해요. 박정희도 중공업에 투자하고, 대관령에 목장을 만들어서 아이들 우유를 먹였어요. 이승만, 박정희도 그 어려운 시절에 국책연구소들을 만들고 예산을 지원했습니다. 형님이 보수를 너무 우습게보시는 것 아닙니까. R&D를 줄이면 그게 보숩니까?" 

 

"두고 봐라. 이 이야기 할 때 온다~" 

 

그날의 술자리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부자들이 내야 할 세금을 걷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7월, 대규모 감세 정책을 발표했다. 개인별 소득세 과표구간을 조정해서 세금을 깎아줬다. 소득세 감세는 면세점 이하 근로소득자 하위 35%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금액상 큰 이익을 보는 것은 고소득자들이다.

 

가업승계 목적으로 60억 원 초과 300억 원 이하 규모의 주식 등을 증여받을 때의 세율도 20%에서 10%로 낮췄다. 가업승계가 목적이라는데, 공제혜택을 받은 가업의 업종과 고용 등 사후관리 의무기간은 기존 7년에서 5년으로 오히려 줄였다. 결국 그냥 상속세를 깎아준 셈이다. 결혼할 때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증여재산도 5000만 원에서 1억 5000만 원으로 세 배나 늘어났다. 모두 돈 있는 사람들이 낼 세금들이다. 

 

공약했던 부동산 세제 완화는 바로 적용되었다. 2022년 1인당 주택분 종부세는 1년 전에 비해 473만 원에서 276만 원으로 42% 줄었다. 여기서만 1조 원 이상의 과세결정세액이 줄었다. 

 

2022년의 세수를 세목별로 전년도와 비교해 보면 하나의 특정이 있다. 근로소득세수는 21.6%가 늘었는데, 양도소득세, 상속증여세, 증권거래세는 줄었다. 노동을 해서 얻는 세금은 늘어났고, 자산에 대한 세금은 증가하지 않았다. 이런 세제 개편으로 줄어드는 세수는 얼마나 될까? 나라정책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에서 2028년까지 감세효과가 있는 금액은 총 89조 원 규모다. 

 

이렇게 세금이 줄어들면, 나라살림을 어떻게 해야할까? 줄이는 수밖에 없다. 정부와 여당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8월 23일 열린 '2024년도 예산안 관련 당정협의회'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년도 예산안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한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과연 어디서 허리띠를 졸라맬까? 

 

설마 했던, 그 선배의 말이 맞았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주요 R&D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삭감 규모만 무려 3.4조 원 규모다. 이대로 정부예산안이 확정되면 일반 R&D 예산은 33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들게 된다. 과기정통부는 '연구개발 생태계 전반의 기반으로서 역할을 고려해 감축을 최소화했다'고 강조했는데, 애초에 왜 지금같은 기술패권 경쟁의 시기에 R&D에 대한 투자를 감축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초연구와 정부출연연구원 예산도 줄어들었다. 정부는 'R&D 비효율 혁신을 목표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했다고 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냥 일괄 삭감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1500억 원, 한국전자통시연구원 1000억 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1100억 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1300억 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2200억 원, 출연연구원 상위 5개 기관에서만 이렇게 일괄 삭감했다. 국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는 '출연금을 20% 삭감하라는 일방적 지침에 따라 각 기관들이 2, 3일 만에 내년 예산을 졸속으로 재조정하게 됐다'는 말이 나왔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원천기술을 연구하던 부서 하나를 통째로 날릴 위기에 처했고,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태양광 무인기 개발을 2대에서 1대로 줄였다. 처음 해보는 연구라 기체결함을 예상해 2대를 만드는 것인데, 이제 1대가 망가지면 실험 전체가 실패하게 된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조차 '예산 삭감의 방향은 맞지만 방식은 잘못됐다. 현장과 소통하면서 합리적으로 조정해야지 일괄적으로 깎으면 혼란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미래를 포기한 나라

아찔하다. 이 정부가 검찰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때려잡는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경제에 대해 사실상 1년 넘게 손을 놓고 있었지만, 오히려 다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위기감은 좀 다르다. 1997년 외환위기로 나라가 부도를 맞았을 때도 R&D 예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건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으로 온 나라를 '공구리' 칠 때도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투입되는 예산이야 결국은 한국 땅에 떨어지는 것이고, 환경 파괴의 후과가 남겠지만 서서히 개선해 나가면 결국 회복이 되리라고 봤다.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겠다고 했을 때도 그렇게 큰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몇 줄을 바꾼다고 역사가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나라의 미래를 통째로 삭제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의 한마디로 국가의 미래가 날아갈 판이다. 

 

외교가 잘못되면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 경제가 어려우면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도둑맞으면 회복할 길이 없다. 아무리 전쟁이 급한 나라도 국가의 인재들을 모조리 전선으로 내보내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하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라의 앞길이 풍전등화다. 

 

'밥은 굶어도 학교는 보내자'던 보수는 어디에 있나? 

 

진보는 인간의 힘으로 단기간에 무엇인가 큰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을 부정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미래를 더 낫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선대들이 만들어 온 전통과 관습, 제도를 가능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보수는 당장의 성과보다는 먼 미래를 생각한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야말로 보수가 붙들어야 할 가치다. 이 세대의 사람들이 희생을 치러서라도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밝힐 수만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애국 보수'다. 보수에게 조국과 민족은 유기체와 같아서 생각없는 진보들처럼 당장 눈앞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남발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워서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만은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땅의 보수는 말해왔다. '밥은 굶어도 학교를 가야 미래가 있다.'

 

그 '애국 보수'가 사라졌다. 보수의 마지노선이 무너진 셈이다. 국가와 민족의 장차 먼 미래를 생각하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던 보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이 위기를 막아야 할까.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이제 '애국 진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야당은 어디서 싸워야 하는가 

 

지난해 민주당이 대선평가를 하면서 펴낸 '새로고침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중도층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그룹은 국가가 '미래를 위한 혁신'에 투자하기를 바랐다. 국민들이 원하는 정당의 모습에서는 '미래를 위한 정책을 펴는 정당'이 앞 순위에 있었다. 

 

야당은 여기서 싸워야 한다. 나라의 미래를 건 싸움이다. 방향은 명확하다. 자산에 대한 감세를 멈추고 R&D 예산 삭감을 막아야 한다. 야당이 다수당이다. 'R&D 예산을 정상화시키지 않으면, 올해 예산안 심의는 없다'는 각오를 갖고 버텨야 한다. 

 

간단한 싸움은 아니다. 검찰정부는 예산이 잘못 투입되거나 부정이 있었던 사례들을 공개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설 것이다. '사 놓고 쓰지도 않는 장비', '교수들 호주머니로 들어간 연구비', '흥청망청 새는 연구비 카드' 같은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판을 칠 것이다. 

 

믿을 것은 국민이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버텨야한다. 국내 과학계의 많은 연구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호도된 여론이 두려워 그런 싸움을 포기하면 야당이 설 자리가 없다.

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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