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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관술의 죽음에 대한 언론의 책임



이명재 에디터

promes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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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비평

  • 입력 2025.12.16 17:50

  • 수정 2025.12.16 21:46

  • 댓글 2

'정판사 위폐' 이관술 무죄구형에 대한 무관심

 

'79년 야만의 세월'에 최소한의 책무 보여줘야

해방 직후 이른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독립운동가 고(故) 이관술이 79년 만의 재심에서 누명을 벗게 됐다. 서울중앙지검이 15일 이관술의 통화위조 등 혐의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이로써 미군정청에 의해 위조지폐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중 이승만 정부에 의해 어느 산골짜기에서 학살된 이 불굴의 독립운동가의 위폐범 혐의는 다음 주 법원의 최종 판결(22일)로써 해소될 전망이다. 이관술은 1946년 11월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첫 번째로 처형당했다.

 

이관술은 단지 한 명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광복 후 여운형ㆍ이승만ㆍ김구ㆍ박헌영에 이어 지지도 5위의 정치인에 꼽혔을 만큼 조선 민중들로부터 큰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조직한 '경성콤 그룹'만 해도 일제강점기 말기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으로서 일제에 꺾이지 않고 버틴 활동가들이 대부분 합류한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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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 11일 경성 반제동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당시 촬영된 이관술의 사진. 모진 고문을 받으며 갇혀있으면서도 사진기 앞에서 엷은 미소를 지은 것이 인상적이라는 평이다. 출처 나무위키

“이재유와 함께 지도부로 나섰던 경성트로이카와 박헌영과 함께 활동한 경성콤그룹은 모두 일제 경찰의 검거대상 중 맨 첫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관술은 일제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조직도에서 맨 꼭대기에 놓였었다”.(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등)

 

이번 무죄 구형은 대법원이 2015년 3월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고 판결해 국가가 이관술의 죽음에 대해 잘못을 인정한 것에 이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에 대해 검찰이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관술에 대한 명예회복 작업에서 누명 혐의를 벗기는 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아직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흔한 서훈조차 되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 유족과 기념회 측에서 쪽에서 보훈처 심사를 요청했었지만 유공자 심사를 보류한다는 결정서가 나왔다. 그때 제시된 이유는 1948년 8월 남북한에서 동시에 선거를 통해 뽑은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이관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관술이 정판사 사건으로 남쪽의 감옥에 있었기에 그 어떤 정치적 행동도 취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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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폐 사건에 대한 동아일보의 1946년 7월 20일자 보도.

이관술의 비운의 삶은 독립운동의 역사,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과연 그 헌신과 공적만큼 제대로 평가되고 '보훈'되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특히 언론 보도에 대해 말하자면, 이관술 무죄 구형에 대해 대다수의 언론들은 전하지 않고 있다. 1946년 정판사 사건 미군정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 사건을 '사실'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언론들이지만 그의 무죄 구형에 대해선 몇몇 매체들만, 그조차 짤막하게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최후의 순간에 대해 임경석 교수는 <독립운동 열전>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구덩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이관술이 큰 목소리로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 심용현의 ‘사격 개시’ 구호가 엇갈렸다. 이관술은 난사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바로 쓰려져 구덩이에 몸이 빠졌다. 이관술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담담했으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은 결국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맘을 먹고 민족혁명운동의 맨 앞에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제 경찰 대신 미군정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힌 채 보낸 4년. 이관술이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된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높은 감옥의 담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산골짜기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차디찬 주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야만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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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유골 구덩이. 출처 나무위키

이관술에 대한 '야만의 세월'에 책임이 적다고 할 수 없는 언론이지만 이관술의 너무도 뒤늦은 해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이다.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적잖은 글들이 있었겠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오랜 기간 지하생활을 해야 했으니 스스로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실명으로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였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박현주)

 

한국 사회 전체가 이관술에게 '감옥'이 되게 한 것에서 언론은 이제라도 그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야 마땅하지만 한국의 언론들은 아직도 그를 79년간의 감옥 안에 그대로 가두고 있다.  

 

언론의 이관술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는 이관술의 가족들의 삶에 대한 도리이기도 하다.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관술에 대한 연구를 해 온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성욱 한국외국어대 교수,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등이 증언하는 이관술의 가족들의 삶의 일부다.

 

이는 대전 골령골 학살사건의 주범 심용현의 삶과 대조적이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헌병 소위였던 심용현은 이관술 등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을 골령골로 끌고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리는 등 소위 1, 2차 골령골 학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 재소자 1800여 명을 합쳐 모두 3200여 명이 학살됐다. 결론적으로 그의 손에서 3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용현은 군에서 초고속 승진했고 중령으로 예편한 후 성신여대 등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성신학원의 이사장까지 지냈다.

 

소설 <만다라>와 <국수>의 작가 김성동이 2014년에 내놓은 책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은 혁명가 71명 중 한 명으로 이관술을 다룬다. 김성동 작가의 아버지 김봉한도 골령골에서 이관술과 함께 학살당했다.

 

언론이 이관술을 위해 '꽃'을 바칠 것은 없다. 다만 79년 만에 이뤄지고 있는 정정과 해원에 대해 그 자신들이 맡아야 할 최소한의 책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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