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에 대한 '야만의 세월'에 책임이 적다고 할 수 없는 언론이지만 이관술의 너무도 뒤늦은 해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뿐이다.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적잖은 글들이 있었겠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오랜 기간 지하생활을 해야 했으니 스스로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실명으로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였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박현주)
한국 사회 전체가 이관술에게 '감옥'이 되게 한 것에서 언론은 이제라도 그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야 마땅하지만 한국의 언론들은 아직도 그를 79년간의 감옥 안에 그대로 가두고 있다.
언론의 이관술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는 이관술의 가족들의 삶에 대한 도리이기도 하다.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관술에 대한 연구를 해 온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성욱 한국외국어대 교수,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등이 증언하는 이관술의 가족들의 삶의 일부다.
이는 대전 골령골 학살사건의 주범 심용현의 삶과 대조적이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헌병 소위였던 심용현은 이관술 등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을 골령골로 끌고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리는 등 소위 1, 2차 골령골 학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 재소자 1800여 명을 합쳐 모두 3200여 명이 학살됐다. 결론적으로 그의 손에서 3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심용현은 군에서 초고속 승진했고 중령으로 예편한 후 성신여대 등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성신학원의 이사장까지 지냈다.
소설 <만다라>와 <국수>의 작가 김성동이 2014년에 내놓은 책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은 혁명가 71명 중 한 명으로 이관술을 다룬다. 김성동 작가의 아버지 김봉한도 골령골에서 이관술과 함께 학살당했다.
언론이 이관술을 위해 '꽃'을 바칠 것은 없다. 다만 79년 만에 이뤄지고 있는 정정과 해원에 대해 그 자신들이 맡아야 할 최소한의 책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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