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핵보유국이다. 오래된 ‘핵 가질 결심’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이 아니다. 미국의 전술핵은 1958년부터 한국에 배치되어 있었다. 조선의 핵은 미국의 핵위협, 적대정책, 체제전환 압박, 군사계획, 금융봉쇄가 장기간 누적된 결과물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6자회담에 일말의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은 작계 5029에 따른 주한미군의 대북 압박 강화, 전략적 유연성에 기초한 한국의 전초기지화, BDA 자금동결 등을 보면서 기대를 접었다.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함으로써 판을 바꾸는 것만이 조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었다.

 

조선은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팀스피리트 훈련과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탈퇴 이유로 들었다. 6월에는 미국과의 협상 끝에 탈퇴 ‘효력 발생’을 유보했다. 1994년 봄 조선이 영변 원자로에서 사용후 연료봉을 꺼내 재처리할 가능성이 커지자 펜타곤은 군사옵션을 검토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미국은 10월 조선은 제네바합의를 체결한다. 조선은 영변 5MW 원자로, 재처리시설, 50MW, 200MW 흑연감속로 건설을 동결한 다음 최종 해체하기로 했고 미국 측은 KEDO를 통해 경수로 2기와 연간 중유 50만 톤을 제공하기로 했다.

2001년 부시 행정부는 대북정책 재검토에 들어갔고 2002년 조선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미국의 핵태세 검토와 선제공격 분위기로 조선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해 경계심을 높였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한 후 조선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를 조선이 시인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선은 부인했다. 11월 KEDO는 중유 제공을 중단했고, 12월 조선은 제네바합의로 동결됐던 원자로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고 IAEA 봉인과 감시 장비를 제거했다. 제네바합의의 붕괴다.

조선은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했고, 2월에는 영변 5MW 원자로를 재가동했다. 7월에 조선은 8,000개 폐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미국 측에 통보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핵 억제력’을 공공연히 거론하기 시작했다. 제네바합의가 막고 있던 플루토늄 경로가 다시 열렸고, 북핵은 협상 카드에서 실제 무기화 단계로 더 가까이 이동했다. 2003년 8월 중국 주재로 첫 6자회담이 열렸다. 조선은 불가침조약, 관계정상화, 경수로·중유·식량 지원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핵시설 폐기와 미사일 시험, 수출 중단을 제안했다.

이 무렵 한국이 대북정책에서 지렛대를 행사하려 하다가 미국의 동맹 교육에 압살당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03년 9월 25일 유엔총회 계기에 윤영관 외무장관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회담한다. 언론 폭로에 따르면 윤 장관은 파월 장관에게 “미국이 북핵문제에서 양보하지 않는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검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한다. 파월은 “그것은 동맹국 간에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설픈 전략으로 개망신한 사례다. 이라크 파병 거부 따로, 대북 입장 완화 요구 따로 했어야 했다.

한미연합사는 한반도 전쟁 발발시 미국이 병력 약 69만 명까지 증원한다는 작계 5027에 이어 2004-5년 당시 조선 정권 붕괴, 쿠데타·내전, 대규모 탈북 등 급변사태에 대응한다는 차원의 작계 5029를 작성하려고 시도했다. 아울러 미국은 주한미군의 증원과 역내 출동을 자유롭게 하겠다는 ‘전략적 유연성’을 한국에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중국은 반발했고 2004년 11월 라오스 개최 ASEAN+3 때 노 대통령은 원자바오 총리에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동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생각은 전혀 달랐다.

조선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단순한 병력 조정으로 보지 않았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주한미군을 한반도와 동북아 어디에나 투입할 수 있는 기동군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보았다. 2005년 5월 조선중앙통신은 미국 고위관리들의 발언을 들어 전략적 유연성이 한반도 비상사태 때 세계 각지의 미군을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게 하는 구상이라고 비난했다. 조선에게 그것은 감군이 아니라 압박의 방식 변경이었다. 병력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더 넓은 전장과 더 큰 규모로 들어올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정확한 평가였다.

조선은 2005년 2월 “핵무기를 제조했다”고 공개 선언한다. 5월에는 영변 원자로에서 8,000개 폐연료봉 인출을 완료했다고 발표했고, 6월에는 재처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은 협상 입지를 높였다. 핵무기 보유 선언은 단순한 협상 카드가 아니라 향후 핵실험의 예고였다. 그 후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고, 조선은 모든 핵무기와 기존 핵프로그램 포기, NPT와 IAEA 안전조치 복귀를 약속했다. 미국은 한국에 핵무기가 없으며 조선을 핵무기로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확인했다. 또 에너지 지원, 북미·북일 관계정상화, 평화체제 논의 원칙이 들어갔다.

 

그러나 9·19 공동성명 나흘 전 미 재무부는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를 애국법 311조에 따른 ‘주요 자금세탁 우려기관’으로 지정했다. 미국은 BDA가 조선 정부기관과 전위회사에 금융서비스를 제공했고, 위조 달러·마약·위조 담배 등 불법 활동을 용이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약 2,500만 달러의 조선 자금이 동결됐다. 미국 입장에서는 핵 협상과 별개의 불법금융 차단 조치였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체제의 해외 결제망을 겨냥한 금융 봉쇄로 받아들였다. 이 조치가 9·19 합의의 이행 동력을 빠르게 잠식했다.

2005년 11월 5차 6자회담이 열렸지만, 조선은 BDA 동결자금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고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2006년 4월 김계관 부상은 미국이 BDA 동결을 풀면 회담에 복귀하겠다고 밝혔다. BDA는 단순한 돈 2,500만 달러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이 보기에 이는 미국이 9·19 합의로 관계정상화, 상호존중 약속을 하면서 그 배후에서는 조선을 타격하기 위한 덫을 놓고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니 조선이 얻은 결론은 분명했다. 핵을 포기하면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핵을 포기하는 순간 협박당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2006년 10월 3일 조선 외무성은 “앞으로 안전성이 확고히 담보된 조건에서 핵시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한다. 동시에 선제 핵사용 금지, 핵이전 금지, 한반도 비핵화 노력도 언급했다. 조선은 핵실험을 단순 군사행동이 아니라 “억제력 입증”이자 “협상 지위 상승”의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드디어 10월 9일 조선은 풍계리 인근에서 1차 지하 핵실험을 실시한다. 조선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과시한 것이다. 6자회담은 이후 재개되지만, 이제 협상은 “핵개발 방지”가 아니라 “이미 핵실험을 한 조선의 핵능력 동결·폐기” 문제로 성격이 바뀐다.

2007년 9월 말 다시 6자 회담이 열렸다. 10월 3일 채택된 6자회담 합의서는 조선의 일반적인 핵 비확산 약속을 문서화했다. 10월 3일 김정일 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은 하루 종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회의 중간에 김계관이 노무현에게 최근 6자회담의 결과를 브리핑했다. 최종 선언문에는 2007년 12월 31일까지 조선과 미국이 해야 할 의무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이 폭파되었고 북조선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해제한다는 발표도 있었지만 6자회담의 합의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결국 조선은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으로 전 세계에 자신이 핵보유국임을 선포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조선은 2017년 9월 3일 ICBM 장착용 수소탄 실험을 마침으로써 총 여섯 차례의 핵실험을 완료했다. 할 때마다 핵 능력의 고도화를 선보였다.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1974년과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총 6기의 핵장치를 폭발시킴으로써 전 세계에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조선이 몇 번의 ‘핵 콘서트’를 더 해야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인가.

이런 형국에 조선의 비핵화라는 어휘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대화의 ‘문턱’에 올리든 먼 훗날의 ‘출구’라면서 지금 올리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먼 훗날’의 일이라면 그 때 가서 말할 일이다. 지금 누가 미국, 러시아, 중국의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는가. ‘먼 훗날’의 일이라면 그 때 가서 모든 핵보유국들의 비핵화를 말하면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트락타투스』 마지막 명제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지금의 의제는 핵전쟁 방지, 군비통제, 그리고 평화체제일 뿐이다. 끝.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에서의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의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의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의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마침내 자유인이 되어 지금은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판타스틱 폴란드: 아흔아홉 개 이야기 더하기 하나』(2023. 12, 지만지)의 저자이고,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명품외교의 길: 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외교』(2025. 3, 진인진), 『브라보 한미동맹: 숭미동맹의 그늘 벗어나기』(2025. 8, 진인진), 『하늘과 사람과 촛불과 시네마: 청춘 너머의 독서와 영화 읽기』(2026. 1, 진인진)를 출간했다.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에서의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의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의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의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마침내 자유인이 되어 지금은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판타스틱 폴란드: 아흔아홉 개 이야기 더하기 하나』(2023. 12, 지만지)의 저자이고,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명품외교의 길: 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외교』(2025. 3, 진인진), 『브라보 한미동맹: 숭미동맹의 그늘 벗어나기』(2025. 8, 진인진), 『하늘과 사람과 촛불과 시네마: 청춘 너머의 독서와 영화 읽기』(2026. 1, 진인진)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