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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도망자 발생…돈과 백 있으면 다 빠졌다”

등록 : 2014.07.11 18:21수정 : 2014.07.1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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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지역 베트남전 참전 병사 조사 결과에 따르면 34.4%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차출되었고, 40.3%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원 서류를 작성했다. 전체의 74.7%가 자발적 지원자가 아닌 셈이었다. 냐짱(나트랑)만에 도착하는 백마부대 교체병력. <김용택 보도사진집-역사의 찰나>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4) 누가 갔는가

“대대 안의 장병이 그대로 갔습니다. 중대장이 지원서를 먼저 작성해서 부대원들에게 사인을 하도록 설득했다.”(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77회(2004년 3월28일)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병장’)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당시 국회에 출석해서 야당의 질문에 대해 베트남에 파병될 군인들은 전원 지원서를 받아서 보낼 것이라고 답변했다. 맹호부대 제6중대장과 제9중대장에 따르면 파병 초기 지원자는 98%에 달했으며, 2%만이 지원하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2%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불응하였지만 나중에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설득을 해 결국 자신들이 가겠다고 해서 충원을 했고, 결국은 100% 지원하는 형식이 되었다.

 

해병대의 경우도 “지원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다음에는 지원하지 않았지만, 신체검사에 합격하고, 근무성적이 아주 우수한 사병들을 선발하여 지원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제2대대장에 따르면 장교들은 전원 지원에 의해 선발했지만, 사병의 경우는 약 70% 정도가 지원자였다. 맹호부대에서도 물론 전방부대의 경우 지원자가 없어서 사단별로 지원자를 할당하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훈련 중) 매일 도망자가 나왔다.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은 다 빠졌다. 어쩌다가 고졸 있고, 전문대 다니는 사람도 (우리 소대에) 없었다.” “한 소대에 고등학교 졸업자가 한 명 정도 있었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은 월남을 가면 돈을 벌어 온다는 얘길 듣고 갔다.”(이상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병장’)

 

 

전원 지원서 받았다고 했지만 
74.7%가 비자발적 지원자였다 
상관 명령 따른다는 것과 함께 
금전적 요소가 가장 컸다 
전투수당은 그나마 짭짤했다

 

“전부터 근무태도 불량으로 
지적받던 초병은 취해 있었다 
‘나 여기서 죽으면 그뿐이야’ 
초병이 갑자기 가슴에 달린 
수류탄을 뽑아 안전핀을 빼…”

 

 

가족과 면회하고 나면 탈영률 급증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이 2004년 광주·전남 지역에서 참전한 사병들(308명)을 조사한 결과 65.6%가 지원, 34.4%가 차출에 의해서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지원해서 간 사병들 중에서 27%는 지원이 아닌데도 지원서를 썼고, 34.5%는 지원서를 강제로 썼다. 이를 통해 다시 분류를 해 보면 전체 지원자 중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34.4%가 차출되었고, 40.3%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원 서류를 작성했고, 나머지 25.3%가 자발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전체의 74.7%가 자발적 지원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함평 지역의 참전 사병들을 조사한 결과는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인터뷰에 응한 28명 중 18명이 자의에 의하지 않고 베트남에 갔다는 응답이 나왔다. 물론 이 결과가 특정한 지역에서의 조사 결과이기 때문에 베트남에 참여한 전체사병들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이들은 왜 베트남에 갔는가?

 

“첫번째로 드는 것이 애국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가는 것이 유리하냐, 그렇지 않으냐 이런 것도 따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래서 외국에 가 보겠다. 그리고 한국에서야 보급도 나쁘고 내무생활이 힘든 것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월남에 가면 정신적으로 편하지 않겠느냐 그런 것이고, 그 외에 금전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도 하나의 요소가 되겠지요. 대부분의 병사가 다 그렇습니다. 병사들에게 물어보면 젊은 놈이 좁은 땅에서 땅만 파다가 죽는 것보다도 외국 맛을 보겠다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제1연대 제9중대장 용○○ 증언)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군인이기 때문에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과 함께 금전적인 요소가 가장 컸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사병의 전투수당(이병의 경우 51.11달러)이 남베트남 사병(55.79달러, 미군 이병 235.15달러)보다 낮았음에도 한국에서 받는 월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기왕 군에 온 이상 군 복무 기간 중 돈을 벌 수 있다면 더 좋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에는 전투부대로서는 최초의 파월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가면 모두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일 곤란한 것이 중대원 편성이었습니다. 감시하는 식으로 우리 안에 집어넣고 편성했습니다. 그래도 도망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편성 당시에 각 중대에서는 평균 2명씩의 탈영자가 생겼는데, 출발하기 전에 가족들이 찾아와 아우성입니다. 가족들의 면회 요구가 격렬해지다 보니 재구 중대장 그 사람은 중대원들에게 면회를 시켜 주었는데, 그다음에 탈영률이 격증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려고 마음먹었다가도 가족들을 면회하고 나면 안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전부 모아 정신교육을 했습니다.”(제1연대 제12중대장 방○○ 증언)

 

채명신 사령관도 훈련 과정에서의 탈영을 걱정했다. 많은 날은 하루에 50명 정도가 탈영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대부분 훈련 중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들과 면회를 하거나 휴가를 간 후에 귀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에 간 한국군 사병들은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적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한국과 다른 상황도 문제였다.

 

“모기, 지네, 산게, 산거머리, 불개미들도 우리 포 반원들의 적이며, 전 대원들은 매일 이들과 일전을 치르는 것이 일과의 일부분으로 이어진다.”(www.vietnamwar.co.kr 수기 중에서)

 

 

“선탠하는 미군들과 달리 온종일 물놀이만”

 

더 무서운 것은 ‘황폐해 가는 정신세계 속의 갈등과 노이로제 현상’이었다. 영화 <알포인트>는 이를 과장해서 보여줬지만, 언제 저격병이나 로켓포와 부비트랩에 의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만큼 이들의 전투는 치열했고, 베트콩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11중대 3소대 1분대장 배장춘 하사는 총과 무전기를 버리고 곡괭이를 집어 들고 백병전에 뛰어들었다. 1분대 이학현 상병은 적병 5명이 참호로 돌입한 후 어둠 속을 헤매다가 중대 대변수집통으로 빠져버리자 대변수집통에 수류탄을 던져 적 5명을 대변통 속에서 폭사시켰다. 이학현 상병은 배장춘 하사에게 달려드는 적을 죽인 후 오른쪽 발목과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개인호에 뛰어든 적병과 싸우던 조정남 일병은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수류탄을 터뜨려 적들과 함께 자폭해 버렸다. 김명덕 일병은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상태에서 수류탄을 모아 적들에게 계속 투척했다. 이영복 일병은 부상당한 배장춘 하사를 부축하여 2소대 진지로 후퇴했다. 이영복 일병을 제외하면 나머지 1분대원 전원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www.vietnamwar.co.kr 수기 중에서)

 

치열한 전투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닷가에 휴양소가 있었고, 장교뿐만 아니라 사병들도 휴양소에 갈 수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다. 돈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을 비롯한 다른 외국군에 비해서 휴양소에서의 생활 역시 풍부하지 않았다. 모래사장에서 하루 종일 선탠을 하는 미군들과 달리 한국군은 온종일 물놀이만 했다고 한다. 음료수도 마음껏 못 사먹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당시 ‘한국군이 불쌍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위문단이 심심찮게 방문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여자 속옷을 갖고 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에 위문단의 속옷이 없어지는 해프닝이 있을 뿐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예기치 않은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전부터 근무 태도가 불량해서 늘 지적을 받던 초병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태로 취해 있었다. “필요 없어. 나 여기서 죽으면 그뿐이야” 초병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중략)

 

초병이 갑자기 가슴에 달린 수류탄을 뽑아 안전핀을 빼버리고 “이봐, 최 하사관 잘됐네. 우리 여기서 같이 가면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최 하사는 그 초병의 손을 잡고 수류탄을 빼앗으려 했다. 그 순간 수류탄은 초병의 손에서 벗어나 땅에 떨어지고,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두 사람은 만신창이 되어 쓰러졌다.”(www.vietnamwar.co.kr 수기 중에서)

 

최근 탈영병 검거 과정에서도 발생했던 오인사격도 발생했다.

 

“하광덕 병장이 “서 병장 아니 매제! 오늘 매복 나를 보내 줘!” (하는 것이다.)

 

자기 조수인 송기성 상병이 나갈 차례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나가겠다고 서로 안 나가려고 하는 매복작전에 순번을 바꾸어 달라고 한 것이다. 이유인즉 꿈을 잘 꿨다나? 자기가 나가면 틀림없이 베트콩을 잡는다고 … (중략)

 

남이 나갈 때 매복작전을 바꾸어 달라고 졸라대어 나가더니 그는 시체가 되어 십자성 106 후송 병원으로 갔단다. 하 병장의 죽음은 전사가 아니라 사고사였다. 인사계의 일병 한 명이 월남 신병인 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지형의 여건에 따라 일자 매복을 쳤는데 본부 인사계 팀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고 좌우로 장비과 수송부가 각각 호를 파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중앙에 위치한 인사계 팀의 호를 너무 좁게 파 가지고 세 명이서 비비적거리다 보니 주 사격방향이 바뀌어 적이 침투할 수 있는 전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군인 장비과 팀이 있는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 이때 (장비과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상한 냄새가 나면서 머리카락이 쪼뼛하며 오싹한 기분을 느끼는데 역시 중앙에 있는 인사계 팀도 같은 냄새를 맡고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때에 꿈을 잘 꾸었다는 하광덕 병장이 전방을 관찰한다고 머리를 위로 슬그머니 내놓으니 중앙에 인사계 팀의 겁 많은 일등병 한 명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표적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던 것. 사격을 가하자 물체가 없어지니까 수류탄 두 발을 던졌는데 신병답게 안전핀만 빼고 수류탄의 몸통을 감고 있는 2의 안전핀을 풀지 않아 천만다행으로 나머지 두 명의 우리 과원은 목숨을 부지했으나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입이 열리지 않아 전화기를 들고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www.vietnamwar.co.kr 수기 중에서)

 

 

귀국선 앞 처참한 몰골의 낯선 사람들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정신적 고통을 받은 뒤 돌아가는 한국군들은 해변에서 얼굴을 태우고, 한몫 챙겨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68년 2월2일 나는 일년 전과 같이 다낭 앞바다에 와 있었다. 이번에는 귀국을 하기 위해서… 잠시 후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귀국선을 향하여 날아오더니 배 위에다 병사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는데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충격에 휩싸였다.

 

헬기에서 한 병사를 선두로 십여명씩 내리는 그들은 전에 내가 봤던 청룡부대 우리들의 전우가 아니라 처참한 몰골의 낯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찢어져 너들너들해진 전투복에 피까지 묻어 있는…! 그 모습은 전쟁터에서 살아서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개선용사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www.vietnamwar.co.kr 수기 중에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금씩 참전에 회의를 느끼는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전쟁이 그랬다. 어느 놈이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전쟁이었고, 그 이상한 전쟁에서 죽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였고, 적어도 도와줄 가치도 없는 그런 나라였다.(내 생각에는 그랬다.)”(www.vietnamwar.co.kr 수기 중에서)

 

주로 사병 출신들이 올린 수기에 달린 댓글 중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스트레스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멀어져야 베트남 생각을 안 하게 될 터인데….” “지금 생각에도 a형 가져온 놈이나, 시백 하나 메고 온 넘이나 차이나는 건 고엽제 경·중·고뿐이랍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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