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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리고 피 흘리는 추한 진보 vs. '안철수 우파' 등장!

목 잘리고 피 흘리는 추한 진보 vs. '안철수 우파' 등장!

[정치 몰입, 2012] <지금 여기의 진보>·<우파의 불만>

홍명교 영화 노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09-14 오후 6:42:32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신해욱,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중


그 놈의 장례 행렬 참 길기도 하다. 한참 전에 죽은 것을 믿지 못하고 안고 업어 달려오다 보니 죽어 있어서, "이 놈은 죽었습니다!" 선언했지만, 누구는 그것을 죽어도 믿지 않고 또 누군가는 죽어도 내 자식 아니겠느냐고 끌어안아서, 장례 행렬은 아직 끊이지 않고 있다. 나 역시 그를 만나고 온몸에 이고 달려온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작 1년 만에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2003년 11월 노동자대회 즈음에 말이다.

배달호, 이현중, 이해남, 이용석, 김주익, 곽재규 열사. 그 해에만 여섯 명의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부와 자본에 맞선 저항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불 붙었지만 어떤 노동 운동 관료들의 선택은 투쟁을 전면화하는 것보다 '이듬해 총선'에 있었다. 총선에서 노동자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들의 한을 풀자는 것이었다. 투쟁은 급격히 소강기로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듬해인 2004년 4월. 민주노동당은 열 명의 국회의원을 원내로 진출시켰다. 그것은 '정치'의 시작인가? 정치라는 것을 '사회 운동'과 철저하게 분리시켜 사고하는 '정치학 박사' 박상훈은 바로 그 점에 역점을 두어 '진보 정치'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는다. 그는 정치를 '정당 정치' 혹은 '의회 정치'라는 협의 안에 가둠으로써 현실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이며 여러 가지 차악을 선택하는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인지 훈계한다.

좌파는 '운동'은 참 열심히 하고 잘 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너무 아마추어적인데다 몽매하고 정파 정치의 패권으로 인해서 오늘날 '진보'가 이 모양 이 꼴이 난 것이라는 얘기다. 진보 정당의 정치인들이 아마추어적이라는 지적은 일면적 차원에서는 일리 있는 말일 것이다. 또한 특정 정파의 패권주의가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큰 해악으로 작용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통합진보당 사태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며칠 전 통합진보당 탈당을 선언하고 '혁신 모임' 구성을 통해 "새로운 대중적 진보 정당을 건설할 것"임을 밝힌 심상정-유시민-조준호 등의 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노동 운동 우파 계열의 스펙트럼에 위치한 정치 그룹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에 대한 반성적 제스처 없이 또 다시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상정은 지난날 민주 노조 운동의 성과를 끊임없이 의회 내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전형적인 의회주의 정치인이다. 의회 내 그녀의 생산적 역할 중 의미 있는 일도 없지 않았겠으나 패권주의적 정치 기획으로 진보 진영의 정치적 위신을 전국적으로 추락시킨 '경기 동부 세력'과 지난 정권 신자유주의의 첨병 노릇을 했던 국민참여당 계열과 합종연횡에 동조하고 2011년 9월 진보신당 당 대회 결정을 어기고 탈당한 장본인이다.

또 조준호는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현장에서 일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조합원들과 현장 활동가들의 울분 섞인 요구들을 무시로 일관했던 대표적인 중앙 관료 중 하나다. 비정규직-여성 노동자 중심의 노동자 운동의 변화를 도모해야할 오늘날에 있어서 그는 혁신의 주체이기는커녕 혁신되어야 할 상징적 대상 중 하나인 것이다. 박상훈이 이런 주요한 원인에 대해 침묵하는 이상 그가 말하는 진보 정당 운동 위기의 원인 진단은 엇나갈 수밖에 없다.

물론 소위 "'운동권'들이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식의 비판이 합당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부르주아 정치 질서에서의 온갖 장황한 술책들을 늘어놓는 것으로서의 '전문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진단은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다. 오히려 '운동'에 있어서 원칙을 끈기 있게 지켜왔다면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이런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진보 정치의 실패는 1987년 이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민주노총으로 이어온 민주 노조 운동의 기반 자체를 모조리 의회 정치의 성과로 수렴시키고자 했던 것에 더 가까이 있다. 이른바 진보 정치의 스타 정치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볼멘소릴 하는 것처럼 노동자 운동에 휘둘리기보다 끊임없이 노동자 운동의 체제 내로의 수렴과 '타협'을 선도했다.

이쯤이면 모두 눈치 챘겠지만 우리가 아직도 끌어안은 채 놓지 못하는 그 죽은 아이는 바로 '진보'다. 언젠가 배우 고수가 영화 <고지전>에서 전우인 신하균에게 비틀거리며 이미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했듯, 나는 진보가 아주 오래 전에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새로운 것을 도래시키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도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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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의 진보>(박상훈·심보선·장석준·홍기빈·이택광·하종강·서동진·엄기호·박경신·홍세화 지음, 이음 펴냄) ⓒ이음
<지금 여기의 진보>(이음 펴냄)는 정치학 박사 박상훈을 비롯해 심보선, 장석준, 홍기빈, 이택광, 하종강, 서동진, 엄기호, 박경신, 홍세화 등 예술, 경제, 정치, 노동, 교육,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진보 진영의 명사 혹은 이론가들이 저마다의 입장에서 진보의 현재에 대해 늘어놓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전문적인 분석과 입장들이지만 이중 어떤 글들에 대한 인상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다른 영역이지만 저마다 전제로 하는 이념과 역사적 평가가 조금씩 다르고 종종 상충되는 견해들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각각 경제, 예술, 생태, 정치 등 다른 영역의 코드를 논제로 삼고 있기에 논쟁의 핀트를 맞추기 쉽지 않다.

기획에 있어서 실패가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리 다양하게 끌어안는다고 하더라도 아귀는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독자들은 '지금 여기의 진보'의 의제들이 다종다기하게 늘어진 채 어떤 정치적 헤게모니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를테면 홍세화는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다름 아닌 그 자유주의자들이 오늘날 소위 '배제된 노동'을 더욱더 배제하면서 동시에 노동 운동 상층부의 관료들과는 밀착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지적한다. 이와는 다르게 박상훈은 정당 정치 중에서도 전문가적인 전술 구가의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역설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 정치를 옹호한다. 위기의 원인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 변호사 박경신은 진보 진영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갖고 있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기 위해 그가 요청하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근원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주의다.

이처럼 각자가 소환하는 '자유주의'가 상이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고 진보의 위기로 짚는 원인들도 다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것의 맥락적 차이들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데 그것이 개별 영역의 논의로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논쟁을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논의의 폭이 너무나 엷기에 대체 어디서부터 맞춰 이야기해야 할지 맥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 이 책에 실릴 글들이 강연문으로 나왔던 일련의 강연들을 청취했던 사람들에겐 그것이 아주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여기의 진보'의 잔해들이 이토록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는 걸 확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홍세화가 끊임없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노동 운동 상층 관료들을 향해 일갈하는 것은 자못 '홍세화다운' 태도다. 그는 몇 주 전 국회 앞 기자 회견을 통해 발표한 진보신당의 대선 사회 연대 후보에 대한 회견문에서도 지난 시절의 '노동 운동'을 비판하며 그것을 '조직노동'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한 바 있다. 나는 당원 게시판, SNS 등 온라인상에서 그런 식의 수사로 가하는 비판이 별로 맞지 않다고 비판한 적 있다.

그리고 홍세화가 계몽주의적 태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운동의 경향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분석과 아래로부터의 실천을 통해 가능한 것일 텐데, 그는 각기 다른 운동들에 대한 시차적 관점을 가지려 노력하기보다 '선생님'의 자리에 머무르려 한다. 실제 진보 정당 정치인들이나 우경화된 노동 운동의 상층 관료들이 홍세화가 지적한 관료주의적이고 우경화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조직 노동'이라고 애매하게 설정했을 때에는 아예 엉뚱한 층위에서 불필요한 오해와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 우경화된 노동 운동의 흐름은 충분히 조직적이지 못해 항상 문제였지 '조직 노동'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한 바 없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한진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 파업,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에서부터 자본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금속 사업장 파괴 공작에 조직적으로 맞섰다면 우리는 노동자 운동의 추락에 대해 이토록 한탄할 일 없었을 것이다.

지난 시기 진보 정당이 노동 운동의 성과로서 모조리 수렴되면서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현장의 강화를 통해 조직적으로 유지되고 쇄신되어야 할 노동조합 운동이 그 힘을 상실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홍세화가 '배제된 노동'이라고 칭하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의 전략을 강조하고 싶다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피력했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모든 공력을 가하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은, 대선 정국에서 '선거 연합'을 도모해야 하는, '조직 노동'의 전망에서 활동하는 일련의 좌파 정치 조직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하종강이 끊임없이 피력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중대성은 누차 강조해도 모자란 이야기다. 어떤 면에선 그의 우직한 일관성과 어렵지 않은 해설이 가장 현명해 보이기까지 하다.

한편, 장석준이 던지는 '녹색 사회주의'의 의제는 흥미로울뿐만 아니라 논쟁적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좌파가 선택해야 할 전략은 녹색 사회주의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유럽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그리고 전술적으로 무엇이 강조되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글들과 접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따로 또 존재하는 듯한 인상이 든다.

충돌 지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홍기빈의 몽매하고도 정념적인 비판들일 것이다. 홍기빈은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성에 빠진 진보 세력이 다시금 경제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이른바 '살림살이 경제학'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가 가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항목들은 대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내용 안에 갇혀 있다.

생산력주의와 역사적 진화주의의 한계에 갇힌 현실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 곤경에 쳐했던 것을 거론하며 반복적으로 그것의 비실용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일정한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피력하는 '교조성'에 대한 우려를 아예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오류의 신화라는 환상은 지난날 사회주의 운동이 빠진 곤경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화의 문제의식을 견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홍기빈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완전한 기각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비판은 생략하고 그것이 변증법적 무오류의 논리성 안에 갇혀 결국 교조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만 주장한다. 그가 삶에서 만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말 그렇게 우격다짐으로만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진화주의적 역사 발전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힌 사회민주의자들이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역사유물론자보다 훨씬 많듯이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실천에 있어서 세상을 일거에 혁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몽매하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지독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오늘날 좌파들은 도시 공동체에서, 노동조합에서, 학교와 미디어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도모해왔다고 말하는 게 훨씬 정확하다.

반면 홍기빈이 예로 드는 스웨덴이나 영국의 비마르크스주의 제도주의 좌파들이 오늘날의 체제의 기로 앞에 선 세계 좌파들에게 별다른 귀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페이비어니즘이 득세했던 영국에서는 왜 노동당 스스로 변질되어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했었는지, 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복지 국가 시대의 명성을 구가했던 스웨덴은 왜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오늘날 추락하고 있는가?

조만간 방한하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주창하는 세계 체계론의 시각에서 이런 '기적'은 스웨덴의 배후에 경제 식민지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가능케 하는데, 홍기빈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하다. 이 지면에서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물론 나는 오늘날 좌파들이 새롭게 도전해야할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자본의 음모로 돌리며 전위 정당 중심의 국가 전복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피력하는 것은 전통적 '전략'이 될 순 있을지언정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적 공백을 뒤엎을 만큼 구체적 실천의 지표를 던져주진 못한다.

그러나 유럽의 지나간 역사와 비교해 이런 특수한 정세에서 시도되었던 이론을 현실의 간극에 대한 고려 없이 들이대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못하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대중 운동과 정치 그 자체가 파괴되고 진보적 이념이 대중화되지 못한 채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홍기빈이 제시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실천의 가능성을 십분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협동조합 같은 제3섹터의 조직 역시도 신자유주의적 '협치(governance)'의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홍기빈이 말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이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고 독립적이며 변혁적인 전망 속에서 어떤 활력을 제공할 수 있으려면 세계 체계의 변동과 국민 국가 내의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사회 운동 정치 전략 역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때 현재에 걸 맞는 얼굴을 찾은 마르크스주의는 '몫 없는 자들' 노동자 계급에게 여전히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미래에 어떻게 '새로운 길'을 물을 것인가? 심보선은 지난 희망 버스 운동에서 '신신좌파'의 탄생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가 회고하기에 그것은 '지도자 없는 리더십', '조직 없는 조직화'의 과정이었다. 희망 버스의 주체들은 자율성의 장소를 분쟁적인 공공 영역의 형태로 발견하고 또 발명했다.

그러나 희망 버스 운동을 무언가 자생적이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무엇으로 평가했을 때 놓치게 되는 역사적 기인도 있다. 한진중공업 정리 해고 철폐 투쟁의 기원이 지난 시기 민주 노조 운동의 역사 속에 놓여있다는 사실 말이다. 김진숙이라는 투사를 낳은 것도 85호 크레인이라는 상징과 열사들의 목소리를 남긴 것도 모두 민주 노조 운동이라고 명명된 노동자 운동의 바람직한 지향 속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쉽게 넘겨선 안 된다.

더불어 희망 버스 운동에 대한 요청이 그간의 사회 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일었던 것 역시 민주노총이라는 기제가 더 이상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가운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면서 이루어졌음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이 거세된 채 어떤 새로운 현상을 평가할 경우 '기적'에 대해 단순한 자생성과 어떤 아나키하고 포스트모던한 흐름에 기인한 것으로 오판하기가 쉽다. 이데올로기와 정세에 대한 면밀하고 정확한 역사적 평가가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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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인 서동진의 '전진하는 미학 : 사회와 정치 그리고 예술의 동요'는 위와 같은 낭만주의적 인식을 겨냥하면서 비판적 미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글은 신자유주의 금융화 시대의 예술이 빠진 곤경과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의 오류를 비판하며 예술에서 우리가 아직 새로운 정치를 발굴할 수 없다면 "잠시 예술을 잊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예술은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과 해후할 때 다시 재림하고 또 부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배적인 질서에 파묻히고 싶지 않다면, 더디더라도 지난한 관계 속에서 '정치'를 굴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예술이 그 자체로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없듯, 또한 정치가 어떤 새로운 상상력과 모험 없이는 결코 구제될 수 없듯, 오늘날 예술과 정치의 분리 속에서 어떤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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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파의 불만>(김민하·김진호·최태섭·박연·박권일·이택광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이 글이 현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선 비판에 충실하듯이 이택광과 박권일을 비롯해 여섯 명의 필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우파의 불만>(글항아리 펴냄)은 한국 사회에 새롭게 출현한 우파들과 그 주위의 불안한 징후들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택광은 그간 꾸준하게 지적해왔던 것처럼 영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을 통해 중산층이 아닌 '중간 계급'이라는 새로운 우파의 등장과 그들의 불만을 차근차근 분석한다. 두 영화에 대한 예상치 못한 환호를 통해 중간 계급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를 인식한다. 즉 "아무도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히스테리적 인식을 통해 사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택광은 오늘날 진보의 문제가 더 이상 정당 정치 안에서 작동되지 않고 축출당했다고 말하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진보의 재구성이란 당연하게도 정당 정치 바깥의 정치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 여기의 진보>에 실린 서동진의 견해와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그밖에 다른 다섯 명의 필자들은 이런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가운데 경제 개혁에 있어서의 신자유주의적 흐름, 기독교 우파, 인문 우파, 멘토로 명명되는 우파 이데올로그, 반이주민 정서의 확산 속에서 드러나는 '네오-라이트(neo-right)' 노동 담론을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역사적 배경이나 인문학에 대한 기이한 환호 현상, 멘토로 대변되는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반이주민 정서를 둘러싼 노동 담론에 대해 분석한 박권일의 글이 가장 흥미로웠다.

얼마 전 광화문역 인근을 지나가다가 다문화 정책 반대 시민 단체의 소규모 시위 현장을 보았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었다. 박권일이 말하는 것처럼 반이주민 정서는 애국주의자로서의 자기규정을 기본으로 해 민족주의 담론, 경제 담론과 결합되어 복잡한 사회적 적대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네오-라이트'들의 불만이 끊임없이 사회적 적대로 재생산되고 일자리 부족과 계급 내 경쟁에 대한 피로감으로 노동자 계급 내의 단결을 저해할 경우 우리는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몇 년 전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정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는데 이에 대한 민주노총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모 상층 활동가가 했다는 악명 높은 망언이 있다.

"그렇습니다. 정말 심각하죠.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이 굉장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런 곤경을 극복하고 인종주의적인 반이주민 정서를 돌파하려면 노동자 운동의 확장과 인종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적 대응과 더불어 그것이 이주 노동자 운동과 조우해야만 한다. 최근 이주 노동자들의 사업장 이동에 대한 제한이 주어져 이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할 때 고용주들에게만 명단이 돌아가고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주들의 명단이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사업장 선택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브로커 개입 방지를 위한 사업장 변경 제도 운영 개선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이런 사안에 대한 국제주의적 시야에 입각한 국내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의 연대가 절실하다.

얼마 전 용역깡패들에 의해 침탈되어 폭력을 당했던 SJM 안산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녀들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었을 때 SJM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견되어 대체 인력으로 투입하게 된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때 남아공의 금속노조가 보인 연대가 바로 국제주의적 연대의 모범이 아닐까 생각한다. SJM 자본이 한국으로 보낸 남아공 노동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경우 남아공 금속 노동자 총파업을 벌이고 거래처인 현대자동차를 압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연대의 경험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갖고 있는 인종주의, 반이주민 정서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의 양상, 우파의 불만을 통해 재현되는 불안의 징후들은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들인 노동자들이 모종의 대안 이념과 사회를 재구성해나갈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이택광은 사회 체제의 모순은 존재하는데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로운 우파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제하는 것에 그 가능성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를 통해 간극 자체를 다시 응시하고 질서 재편을 도모하고자 하는 좌파적 도전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런 도전이 성공하려면 좌파에게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에게나 각자도생의 길이 열려야 한다. 불만의 주체로 등장한 '새로운 우파'에겐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장이 열려야 하고, 노동자 계급에겐 불안정한 노동과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급적 단결과 정치적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이런 노정 속에 대선이 놓여 있다. 이 두 권의 책을 덮은 후 우리는 무엇을 도모할 것인가? 그때 저마다 진보라는 기표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서 말이다. 차라리 그때 우리는 '진보' 대신 다른 이름을 필요로 할는지도 모른다. 장석준은 그것이 '녹색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용에 있어서 좌파가 '생태주의'와 결합을 이뤄내는 것은 필연적인 과제일 게다. 그러나 당면한 정세에서 이름을 짓는 것에 앞서 중요한 것은 흩어져 있는 제 좌파가 우경화된 노선에 빠져 있던 대중 조직과 함께 힘을 모으고 2013년 이후 계급 투쟁의 비전이 있는 길로 '진보 진영'을 견인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 대선 후보 전술에 대한 좌파 단위들의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공동선'을 찾는 것에 주력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조 조직률 10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노동조합도 없는,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통합당의 두 자유주의적 경향의 대선 후보 가 "저녁이 있는 삶"(손학규)이나 "사람이 먼저다"(문재인)라는 다소 모순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제스처를 내밀었던 것의 모순성을 있는 그대로 폭로할 수 있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위기와 생존 불안의 위기에서 좌파적인 대안이란 어떤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는 슬로건을 말이다.

바로 그 '공동선'을 찾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지금 여기'의 진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얼굴은 끔찍한 형상이었다. 2013년 이후 세계의 경제 상황과 급변하는 정세는 '진보'의 새로운 얼굴과 아래로부터의 꾸준한 실천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최근에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노동자 운동의 혁신'에 대한 과제와 '민중의집', '태일이네', '노동자회관' 등의 이름을 한 사회 운동들이 그 양 날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홍명교 영화 노동자 메일보내기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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