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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화의 침투와 한국문화의 종속성

일그러진 한국 문화: 미국문화의 침투와 한국문화의 종속성<기고> 통일을 지향하며 4월혁명 55주년에 돌아보는 남북의 문화
이재봉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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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8  12: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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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1960년 4월혁명은 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와 항의에서 일어났지만, 그 영향으로 민족주의를 불러왔고, 이는 반외세 자주운동으로 이어졌다. 4월혁명 1주년에 맞춰 나온 <4.19 시국선언>이 지적했듯, “반혁명적 보수 야당”이 “외세와 결탁하여” 4월 혁명을 중도에서 정지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이승만이 물러나는 바람에 1960년 4월엔 주한미국대사를 포함한 미국인들이 환영 받았지만, 7개월 후인 11월엔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다짐이 나오고, 1년이 흐른 1961년 4월엔 “외세는 물러가라”는 구호까지 거침없이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2015년, ‘노예근성’에서 벗어나 민족자주를 이루자던 4월혁명이 일어난 지 55년이 지났지만 미국에 대한 의존은 더 강해지고 자주는 그만큼 멀어져간다. 분단이 굳어지며 남북 사이엔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커지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추종하는 가운데 민족이나 자주라는 말만 꺼내도 ‘종북’으로 매도당하기 쉬운 현실이다. 이 가운데서도 남북 사이에 이질성을 키우며 가장 자발적으로 미국을 닮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분야가 바로 문화 아닐까.

4월혁명에 따른 민족문화 되찾기 운동

4월혁명의 영향으로 1960년대부터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미국의 문화 침투를 거부했다. 미군들이 가져온 이른바 ‘GI 문화’나 ‘PX 문화’가 한국에 유행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식민적 미국주의’에 맞서 전통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배금주의와 물질주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폭력성과 잔인성, 문란한 섹스와 쾌락주의, 인종차별주의와 자기민족 중심주의 등에 의해 한국의 전통적 사회윤리와 관습이 파괴된다고 분노했다.

예를 들어, 국악인들은 미국 음악을 비롯한 서양 음악에 압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학교 음악교육 커리큘럼을 개선해 한국의 전통 민요를 포함한 국악 교육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부 미술학도들은 외국의 미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구적 미학 개념을 벗어나 우리 미술에서 민족미학의 근원을 찾자고 주장했다. 젊은 연극인들은 한국 연극계에서 유행하던 번역극 공연을 거부하고 한국 작가들이 쓴 창작극을 공연할 것을 주창했다. 대학생들은 1960년대부터 탈춤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1970년대엔 탈춤이나 민속극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70년대 중반 한 대학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미관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미국의 물질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에 의해 한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엔 중반엔 진보적 작가, 예술인, 교수, 언론인, 출판인들이 결성한 <민중문화협의회>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문화적 식민지화의 압도적 중압에 눌려 정상적 자기 발현을 억제당하고 있다..... 그것은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신식민주의의 문화이며, 민중의 절절한 자기표현으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내외의 지배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관제문화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노예화의 문화, 신식민주의 문화, 관제문화, 분단고착의 문화는 결단코 종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은 1980년대 말 이른바 ‘생활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미국문화에서 벗어나 한국의 전통문화를 발전시키자고 했다. 영어 사용을 될수록 자제하거나 거부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팝송을 부르지 말자고 주장했다. 코카콜라를 마시지 말고, 커피 대신 숭늉을 마시자고 호소했다. 미국 담배 불매운동을 전개하며 청바지를 입지 말자는 주장도 폈다.

1960년 4월혁명부터 약 20-30년 동안 전개되었던 민족문화 되찾기 운동의 모습을 대충 그려보았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다시 20-30년이 지난 2015년 현재 우리 문화의 모습은 어떠할까.

나는 우리의 전통과 민족문화만 고집하며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문화를 배척하는 이른바 ‘국수주의’는 반대한다. ‘국제화’나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 국경이 낮아지며 ‘지구촌’이라는 말이 귀에 익은 터에 그것은 쉽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외국문화를 분별없이 선호하며 특히 잘못 받아들이는 것은 해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남북 사이의 민족 동질성을 바탕으로 평화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두 가지만 얘기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왜곡된 개인주의와 병적인 이기주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너무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흐른다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남을 의식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풍조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런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해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비슷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둘은 크게 다르다. 개인주의는 말 그대로 ‘개인’을 중시하는 것이고 이기주의는 ‘이기’ 즉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이다. ‘개인’은 집단이나 단체와 반대되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요, ‘자기’는 다른 사람과 반대되는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집단이나 단체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중시하거나 앞세우는 것으로, 이에 반대되는 말은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남이야 어떻든 나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태도나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에 반대되는 말은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의미하는 이타주의다.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 또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혼동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크지만, 개인주의엔 매우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앞에서 개인주의를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중시하거나 앞세우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개인은 ‘나’뿐만 아니라 ‘너’와 ‘그’도 포함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점이다. 즉 나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먼저 추구하더라도, 남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러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되 남을 배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에 대한 배려와 관련하여 다수결제도의 논리도 비슷하다. 다수결제도는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원칙 또는 필수요인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에 대한 철학은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고 잘 지켜지고 있지도 않다. 건전한 다수결의 철학은 ‘다수의 통치 (majority rule)’와 ‘소수의 권리 (minority right)’가 공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수가 통치하되 소수의 권리를 배려한다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이 다수의 횡포만 보일 뿐이다. 특히 국회에서 그렇다.

우리는 서양 특히 미국의 개인주의와 다수결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이나 소수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만을 내세우는 이기주의만 키워오고 다수의 횡포만 부려온 셈이다. 세계화를 지향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탕이나 알맹이를 모른 채 껍데기만을 따라하는 짓은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주의를 모욕하지 말아야 하고, 다수결제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 미국을 들 수 있다. 개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국에서는 건물을 출입할 때 저만큼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일행이나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가 올 때까지 출입문을 잡고 서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차를 몰고 가다 길을 건너려는 사람을 발견하면,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도 차를 멈추고 보행자가 먼저 가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에서는 바로 뒤에 사람이 따라와도 그를 위해 출입문을 잡아주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뒷사람이 다치기 쉬운데도. 횡단보도에서조차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보이면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기는커녕 자신이 먼저 지나가겠다며 저 뒤에서부터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번쩍거리기 일쑤다. 보행자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이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지정된 주차공간이 많이 있는데도, 몇 분을 걷기 싫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건물입구에 차를 세워놓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주차 금지’라는 표지판이 서있는데도. 버스나 기차 안에서 주위 사람들이 책을 보든 잠을 자든 큰소리로 통화하거나 떠드는 게 승객으로서의 자유와 권리일까. 이렇게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남에게 손해나 불편을 끼치는 행위는 개인주의가 전혀 아니다. 무례요 병적인 이기주의일 뿐이다. 공공영역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인 것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집단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강한 집단주의 특성을 지닌 우리 사회가 근대화를 이루면서 점차 개인주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경제적으로 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주의 특성이 매우 강한 미국의 영향을 받아왔으니 당연한 변화다. 또한 가족규모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고 주거형태가 방이 많은 아파트로 변하면서, 아이들도 방 한 칸씩 독차지하며 개인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됨으로써 개인주의가 발달한 측면도 있다.

참고로,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집단주의 특성이 가장 잘 남아있는 분야가 언어일 것이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우리’보다 ‘나’라는 말을 자주 쓴다. 예를 들어, ‘나의 가족’, ‘나의 집’, ‘나의 선생님’, ‘나의 학교’라고 부른다. 심지어 ‘나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쉽게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는 ‘나’보다 ‘우리’라는 말을 훨씬 즐겨 쓴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도 ‘우리 집’이라고 말하고, 소속이 다른 사람에게도 ‘우리 학교’라고 부른다. 사람을 가리킬 때는 더욱 심하다. 형제가 없는 사람조차 남에게 ‘우리 부모’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씨가 다르거나 배가 다른 형제가 되지만 이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보다 심한 경우도 있다. ‘우리 남편’이나 ‘우리 마누라’라는 말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라도 함께 관계를 가져서는 안되는 배우자에게조차 ‘우리’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다. 내가 다른 여자에게 말만 걸어도 못마땅해 하는 ‘내 아내’도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우리 남편’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냉정하게 따져보면 일부일처제 (一夫一妻制) 사회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고 도저히 쓸 수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문화가 얼마나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집단주의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화하는 과정에서, 앞에서 얘기했듯 병적인 이기주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치의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같은 한민족이지만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사회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개인주의를 확산시켜온 반면, 북한에서는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사회의 획일성을 강조하고 집단주의를 강화해왔다.

북한에서는 집단주의를 유별나게 강조한다. 집단주의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채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전체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강한 집단주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로동당규약 및 헌법에 집단주의를 명시하고 있을 정도다.

조선로동당 규약을 보면, “당원은 고상한 공산주의적 도덕성을 소유하고 조직과 집단을 사랑하며 조직과 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개인의 리익을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우고 사익보다 공익을 중시한다는 집단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당규약에 못박아놓은 것이다. 따라서 “자신보다 먼저 사회와 집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을 고상한 도덕과 참된 사랑으로” 여긴다.

헌법에는 집단주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놓았다. “국가는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며 온 사회를 동지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든다”고 했다. 모든 인민은 결속력이 강한 하나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민의 권리와 의무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에 기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에 나오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북한 집단주의의 특성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구호다. 이 구호에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앞부분만 있으면 집단의 이익만 내세우는 전체주의를 상징하겠지만,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뒷부분은 개인의 이익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한의 집단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전체주의는 집단의 이익만 강조하고 개인의 이익이나 자율성을 무시하지만,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조화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아무튼 왜곡된 개인주의와 병적인 이기주의가 만연한 남한 사회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을 정도로 집단주의적 특성이 강한 북한 사회가 통합을 추구하며 민족의 동질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외국어의 남용과 오용

요즘 우리 사회 지식인들 가운데 영어단어 몇 개 사용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끝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신문 잡지엔 외국어나 외래어투성이다. 유치원생부터 영어를 배우도록 하는 가운데 아예 영어를 공용화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듯하다. 나야 미국생활 10여년 했으니 큰 불편 없이 영어를 말하고 들을 수 있지만, 쉽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우리말을 놔두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더욱 심각하고 한심한 문제는 이들이 영어단어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거나 국적 불명의 잡탕말을 영어로 착각하고 쓰면서 순수한 우리말을 촌스럽다고 비웃고 있다는 점이다. 기막힐 노릇이다. 몇 가지 사례만 아래에 소개한다.

첫째, 2014년 여름 익산시내에 걸린 현수막들과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았다. “The 2th OOO 걷기대회.” 쉽고 편하게 ‘제 2회’ 또는 ‘제 2차’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영어로 쓰면서 무식을 자랑한 것이다. 꼭 영어로 써야겠다면 1회는 1st (first), 2회는 2nd (second), 3회는 3rd (third)로 줄여 쓰고 4회를 4th (fourth)로 줄여 쓸 수 있다. 모든 숫자 뒤에 ‘th’를 붙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둘째, 무슨 행사의 시간을 알리면서 ‘오전 9시’나 ‘오후 3시’ 등을 표기할 때 ‘A.M. 9:00’나 ‘P.M. 3:00’으로 쓰는 경우를 아주 흔히 보게 되는데 꼭 영어로 써야겠다면 순서를 바꿔야 한다. ‘9:00 A.M.’이나 ‘3:00 P.M.’으로 말이다. 반대로 ‘500 $’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 500’이라 쓰고 ‘500 달러’로 읽는 게 옳다. 책이나 서류 쪽수를 가리킬 때도 ‘7 p.’가 아니라 ‘p. 7’로 써야 옳다. 쉽고 편한 우리말을 놔두고 영어를 잘못 쓰며 무식을 드러내는 이유가 무얼까. 될수록 우리말을 쓰되 꼭 영어를 쓰고 싶다면 제대로 쓰기 바란다.

셋째, 명함 등에 성명을 영어로 쓸 때 성과 이름 순서로 써도 된다. "Lee Jae-Bong"이라고. 한국인들은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나중에 쓴다는 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외국인들이 성과 이름을 혼동할까봐 걱정스럽다면 성 뒤에 커머 (,)를 붙이면 확실하다. 이름이 아니라 성 뒤에. 예를 들면 “Lee, Jae-Bong”이라고. 그런데 “Jae Bong, Lee"라고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재봉’이 성이고 ‘리’가 이름이란 뜻이다. 굳이 영문으로 성명을 밝혀야 한다면 이런 무지는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넷째, 농촌에 사는 사람으로서 몇 해 전부터 부쩍 널리 쓰이고 있는 ‘로컬 푸드’라는 말에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대개 농민들이 관여되기 마련인데 ‘지역 음식’이나 ‘토속 음식’ 등 그들이 쉽게 알아듣고 쓸 수 있는 정겨운 우리말로 바꿀 수 없을까. 영어 ‘local food’은 발음하기도 까다롭다. 앞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려면 혀를 입천장에 대야 하고, 뒤 단어를 올바로 소리 내려면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시피 해야 한다. 그러나 ‘로컬 푸드’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의 발음을 영어로 옮기면 대충 ‘rocal pood’가 될 것 같다. 누구나 쉽고 정겹게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제쳐놓고,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해 미국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할 영어단어를 고집하는 이른바 먹물들의 속내가 어떤 지 궁금할 뿐이다.

다섯째,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외국어는 당연히 ‘외래어’로 만들어 써야겠지만 그게 너무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한국처럼 현수막을 많이 쓰는 나라를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현수막’이라는 말이 촌스러워 영어로 쓰고 싶다면 ‘플래카드 (placard)’로 쓰는 게 좋다. 왜 ‘프랑카드’나 ‘플랑’ 같은 국적 불명의 잡탕말을 만들어 쓰는가. 자동차 운전대 위에 걸린 거울을 대개 ‘빽밀러’라고 부르는데 ‘후사경’이란 한자어가 어렵다면 ‘rear-view mirror’라는 올바른 영어는 어떨까. ‘back mirror’라는 영어는 없지만, 이런 영어가 있더라도 뒤 단어가 ‘밀러’로 발음되지 않는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미뤄’ 비슷하게 소리 난다. 젊은이들이 즐겨 먹는 ‘돈까스’는 ‘얇게 저민 돼지고기로 구운 요리’라는 뜻의 ‘pork cutlet’에서 ‘pork’는 돼지 돈 (豚)자로 바꾸고 ‘cutlet’은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옮겨 섞어놓은 것이니 도대체 이것도 말인가.

여섯째, 요즘 아파트 이름에 무슨 영어단어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부르기도 어렵고 주소 쓰기도 복잡하다. 시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그런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리는데 미국에서 10여년 살았던 나에게도 불편하니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의아하다.

이와 관련해 인사도 영어식 말투로 바뀌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예를 들어, “좋은 아침 되세요” 또는 “좋은 시간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말은 어색하다. 사람이 어떻게 아침이 되고 시간이나 하루가 될 수 있겠는가. “부자 되세요”는 어법에 맞지만. 영어의 “Good morning”이나 “Have a good time (nice day)”을 옮긴 것 같은데, ‘좋은 아침’이나 ‘좋은 시간’을 ‘되세요’가 아니라 ‘보내세요’라고 해야 옳다.

한편, 영어만 잘 못 쓰는 게 아니다. 한자어로 된 우리말을 오용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에서 왔다니 순수 우리말과 한자어의 구별조차 하기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쉬운 우리말을 쓰면 될 텐데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쓰다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몇 가지만 꼽는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마다 졸업식을 전후해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학위수여식’이라는 말 때문이다. ‘수여 (授與)’는 증서나 상장 또는 훈장 따위를 ‘주는 것’이다. 증서나 상장 또는 훈장을 ‘주는’ 사람보다는 ‘받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 졸업식의 주인공은 졸업하는 사람들이지 졸업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위수여식’이라는 말이 관례가 되어버렸지만 이를 고쳐 쓰는 것을 고려해보자. ‘주고받다’는 뜻의 ‘수수 (授受)’라는 말에서 보듯 ‘수’로 발음되는 한자어엔 ‘준다 (授)’는 글자도 있고 ‘받는다 (受)’는 글자도 있지만 ‘수여’라는 말엔 ‘줄 수 (授)’자만 붙을 뿐이다.

따라서 이보다 더 언짢게 하는 게 있다. 졸업식 안내문이나 신문 등에 ‘학위수여자’라는 말을 거꾸로 쓰는 것이다. 수여자는 ‘주는’ 사람이니 총장이나 학장일 텐데, ‘학위수여자’ 명단에 학위를 ‘받는’ 졸업생들 이름을 나열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그것도 최고의 학부라는 대학에서. ‘학위 받는 사람’이라는 우리말을 쓰기 싫거나 한자어를 써야 대학의 권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면 ‘수여자’라는 말이 아니라 ‘수득자’나 ‘취득자’라는 단어를 쓰는 게 어떨까. 쉬운 말을 쓴다고 권위가 깎이는 게 아니라 말을 잘못 쓰면 권위가 훼손될 수 있다.

졸업식을 비롯한 무슨 행사를 치를 때 사회자가 “자리에 착석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되는데, 이 역시 유식함을 뽐내려다 무식함을 드러내는 꼴이다. ‘착석 (着席)’이란 말이 ‘자리에 앉다’라는 뜻이니 소박하게 우리말로 “자리에 앉아주십시오”라고 하든지 굳이 한자어를 써서 유식함을 자랑하고 싶다면 ‘자리에’라는 말을 빼고 그냥 “착석해주십시오”라고 해야 옳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회의나 선거를 할 때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나 “과반수 이상 득표”라는 말을 쓰는 것도 잘못이다. ‘과반 (過半)’이 ‘절반 이상’이라는 뜻이므로 ‘이상’이란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아니면 ‘반수 이상’이라고 해야 옳다. 국회에서도 자주 나오고 언론에도 흔히 등장하는 말이니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이 언어 오용에 앞장서는 셈이다.

몇 년 전부터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과 관련해 “잔반을 남기지 말자”는 표어를 붙여놓은 식당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냥 “밥을 남기지 말자”고 누구든지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맞는데, ‘먹고 남은 밥’을 가리키는 ‘잔반 (殘飯)’이라는 어려운 한자어를 굳이 쓰느라 틀리게 된다.

이렇듯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나 외래어는 틀리더라도 못 써서 안달을 부리는 한편 우리말을 애용하면 ‘종북’으로 매도당하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는 ‘동무’라는 순수하고 정겨운 우리말을 쓰기 어렵다. 북한에서 즐겨 쓰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잘 쓰지 않는 ‘친구’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해방 이전부터 널리 써왔고 영어의 ‘people’을 가장 정확하게 옮긴 ‘인민’이라는 말 역시 쓰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 많이 쓰기 때문이다. 일제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국민’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1996년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꿔 쓰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랄까.

우리는 또한 ‘노동’이란 쉽고 일반적인 말 대신 좀 어렵고 애매한 ‘근로’라는 말로 바꿔 쓰는 경향이 있다. ‘노동’이란 말을 사회주의의 ‘노동계급’ 또는 마르크스의 ‘노동착취’ 등과 연계시켜 반공의 대상으로 삼아 금기시하는 것이다. 5월 1일 ‘labor day’를 ‘노동절’이라 하지 않고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하기야 ‘근로 (勤勞)’라는 말은 ‘힘써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이니 자본가 쪽에서는 ‘근로자’ 즉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진짜 노동자로 삼고 싶을지 모르겠다.

2001년엔가 한완상 교육부총리가 ‘창발성’이란 말을 썼다가 생뚱맞은 공격을 당한 적이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총)는 “북한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라며 “교육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비판했다. 교육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정도였다.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은 “친북.좌파적 편향이 명백하게 드러났다”며 부총리직 사퇴를 요구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던가. 보수 신문 역시 가만있을 리 없었다. “속 들여다보이는 일”이라며 비판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남한의 보수 극우적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민족의 언어마저 ‘종미 반북’으로 몰아가고 있다. 천벌을 받을 사람들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당찮은 ‘종북’몰이가 기승을 부리는데, 나는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언어생활에서야말로 남한 사람들 모두 ‘종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진정 통일을 바란다면.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겪는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가 외래어투성이의 우리말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가.

이에 북한의 언어정책을 소개한다. 1998년 평양 방문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이다. 중국의 한 조선족 교수에게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며 그곳 관계자에게 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남북지역 사이에 자매결연을 추진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고 싶으니 초청장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남한에서는 영어를 많이 쓰듯, 중국과 가까이 지내온 북한에서는 한자를 많이 사용하리라 생각하고 한자로 편지를 썼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유학 (遊學)하느라 부모님께 가끔 편지를 보냈는데, 한글보다 한자에 익숙한 아버지에게 효도한답시고 옥편을 찾아가며 한자로 편지지를 메웠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토씨 (조사) 빼고는 거의 모든 단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중계자가 내 편지를 조선글 (한글)로 바꾸어 평양에 전달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해방 이후 조선글과 한자를 같이 쓰다가 1947년부터 문맹퇴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한자폐지 및 조선글전용 정책을 실시해왔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북한의 언어정책은 한 마디로 말해 민족 고유의 말과 글을 잘 지키며 인민이 쉽게 쓸 수 있도록 다듬는다는 것이다. 이는 헌법에까지 반영되어 있다. “국가는 우리말을 온갖 형태의 민족어 말살 정책으로부터 지켜내며 그것을 현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킨다”고 명시해놓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1964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해방 직후부터 힘든 말을 쓰지 말고 쉬운 말을 쓸 것을 주장하여 왔으나 아직도 대중이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남이 모르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것을 유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이런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쉬운 말을 하고 쉬운 글을 쓰는 것이 더 유식하고 고상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리론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책에서 문구를 따기 좋아하며 힘든 말을 늘어놓아 남이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아가 남한에서 쓰는 말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964년 교시에서 “지금 남조선 멋쟁이들은 영어와 일본말을 망탕 섞어 쓰면서 우리말을 못 쓰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1966년 교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의 강도를 훨씬 높였다.

“문제는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에 있습니다. 지금 남조선 신문 같은 것을 보면 영어나 일본말을 섞어 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한자말은 중국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까지 망탕 쓰고 있습니다. 사실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에는 한자말과 일본말, 영어를 빼버리면 우리말은 ‘을’, ‘를’과 같은 토만 남는 형편입니다. 언어는 민족의 중요한 징표의 하나인데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이 이렇게 서양화, 일본화, 한자화되다 보니 우리말 같지 않으며 우리말의 민족적 특성이 점차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두다가는 우리 민족어가 없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평양에서 1988년 출판된 <조선개관>에서는 “오늘 남조선에서는 우리말과 글이 엄중한 위기를 겪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우리말의 순수성이 점차 사라지고 잡탕말로 변하여가고 있으며 우리글은 한자와 외래어에 뒤섞이여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9년 4월 <로동신문>은 그 무렵 남한에서 외래어와 한자어의 남용으로 순수한 민족어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남북 언어의 단일성마저 상실되어가고 있다며 남한의 언어실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 민족어가 외래어에 질식되어 없어질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특히 거리의 간판과 광고 그리고 상표 등이 온통 외래어투성이라고 지적하고 신문과 방송에서도 문법에 맞지 않고 뜻도 모호한 잡탕말을 많이 쓰다 보니 도무지 어느 나라 글인지 분간 못할 정도라는 혹평이었다.

그러나 북녘 사람들의 언어 사용엔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말투가 거칠고 전투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혁명의 수도 평양말’을 강조하면서 혁명을 추구하는 가운데, 언어를 혁명의 무기, 선전 교양의 수단, 투쟁의 도구 등으로 삼으면서, 바람직한 언어법으로 ‘문체의 간결성, 정확성, 명료성’을 통한 ‘말과 글의 전투성 및 호소성’을 들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남한의 말과 글에 대한 북한의 비판이나 혹평에 대해 우리는 상투적 비난이라고만 치부할 게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이질성을 키우지 않기 위해, 외래어의 남용과 오용에 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사월혁명회가 2015년 4월 17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한국사회의 외세 예속성”을 주제로 주최한 <4월혁명 55주년 특별토론회>에서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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