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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뜬 채 숨진 아들... 아버지는 37년간 싸우고 있다

 

'군 의문사' 허원근 일병 아버지 허영춘의 마지막 투쟁

17.01.12 07:22l최종 업데이트 17.01.12 07:22l

 

 

 의문사 법 개정을 촉구하는 아버지 허영춘 님의 1인 피켓시위. 피켓을 목에 건 분이 허영춘 님이다.
▲  의문사 법 개정을 촉구하는 아버지 허영춘 님의 1인 피켓시위. 피켓을 목에 건 분이 허영춘 님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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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제가 참 궁금한 게요. 어떻게 지난 33년간 그렇게 싸울 수 있으셨는지 싶어요. 1984년에 장남 잃고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 오셨는데 도대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시는지. 사실 어머니들은 모성애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못하지만, 통상의 아버지들은 하다 하다 안 되면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데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시잖아요?" 

그렇게 해서 듣게 된 허원근 일병 아버지의 사연은 참 슬펐다. 시작은 1984년 4월 2일, 아버지의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장남 허원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군 입대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이었다. 4월 3일에 첫 휴가를 받아 나온다던 아들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으니 아버지는 당연히 기뻤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자신을 보며 '아버지'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그 사건, 그리고 전해진 비보
 
아들의 목소리에 아버지는 놀라 꿈에서 깨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시각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후 아버지는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장남이 절규한 '아버지' 소리가 내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일이면 집에 온다고 했으니 그저 개꿈이겠지 싶으며 위안 삼던 그때였다. 4월 2일 밤 10시경, 마을 이장 집에서 전보가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듣게 된 소식, 아들의 사망 소식이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빨리 아들의 부대로 달려가 아들의 생사를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 외엔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남 진도를 출발하여 낯선 강원도 화천까지 내달려 도착해 보니 시각은 4월 3일 아침이었다는 것이다. 무작정 검문소에서 사망한 군인 부대를 물으니 안내를 해주어 해당 부대에 도착하니 아들이 연병장 담벼락 아래 놓은 탁자 위에 눕혀 있었다고 한다. 

사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아들 허원근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장남으로서 늘 아버지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었던 아들. 착하며 성실했고 공부도 매우 잘해 집안의 기대를 받았던 아들이었기에, 그런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금 저 탁자 위에 숨진 채 누워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누군가가 덮여있는 흰 천을 벗기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현장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은 아버지에게 "군의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막아섰다고 한다. 정말 내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막아서는 그들 앞에서 아버지는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한참을 기다리니 오후가 되어서야 군의관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내 벗겨진 흰 천 안에서 드러난 모습, 아버지는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믿고 싶지 않았던, 믿을 수 없었던 그 사실, 내 아들 허원근이 거기에 숨이 끊긴 채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숨진 아들 허원근의 눈이었다. 아들이 두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의 눈에 손을 대며 마음속으로 빌며 쓸어내렸다. 훗날 아버지는 이때 자신이 한 아들과의 약속을 여러 탄원서에 적었다. 특히 198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에게 보낸 탄원서에서 아버지는 그 마음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의 영전에서 꼭 불명예를 씻어 너의 영혼을 잠들게 하겠다 하고 다짐했습니다. 지하에서나마 (아들이) 편히 잠들게 하여 주십시오." 
 
 아들의 사인 규명을 위해 싸워온 지난 33년간의 아버지 전쟁. 허원춘 님이 의문사 법 개정을 위해 농성중 언론과 인터뷰하는 중이다.
▲  아들의 사인 규명을 위해 싸워온 지난 33년간의 아버지 전쟁. 허원춘 님이 의문사 법 개정을 위해 농성중 언론과 인터뷰하는 중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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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밝히기 위한 아버지, 허원춘의 전쟁

그랬다. 아들이 죽은 1984년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아들 허원근에게 한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말 처절하게 노력해 왔다. 사건 당시 45살이었던, 전남 진도에서 김 양식 사업에 몰두하며 살아왔던 촌부 아버지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진도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자살로 처리된 아들의 진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아버지가 글을 쓰고 관련 자료를 정리한 방을 들어가 보니 책장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책장에 꽂혀 있던 법의학 전문 서적 6권.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이 아버지가 의학 전문 영어가 가득한 이 책을 독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전태일 열사가 1970년 11월 노동자의 권익을 외치며 분신하기 전 늘 외쳤던 말씀은 "나에게 서울대 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였다고 한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전태일 열사가 한자로만 쓰여 있던 근로기준법을 독해하는데 어려움이 커 그런 소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것처럼 이 아버지 역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영어를 모르니 읽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배운 게 인터넷이여. 거기에 영어 스펠링을 한 자 한 자 쳐서 그 뜻을 해석하면서 공부했지. 참 돌아보면 미치지 않고서는 못할 일이여." 

그렇게 해서 밝혀진 지난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의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진상규명 발표.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이 타살되었으며 가해자는 해당 부대 상관에 의한 오발 사고 후 사인을 조작하기 위해 추가로 두 발을 더 발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러한 발표에서 아버지가 더 놀라웠던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사건 당시 군 헌병대는 아들 허원근은 자살했으며 그 시각은 4월 2일 아침 10시경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의문사위가 사건 발생 시각을 새롭게 밝혀낸 것이다. 아들이 숨진 시간은 4월 2일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였다는 것. 

그랬다. 아버지는 그제야 1984년 4월 2일 새벽 4시에 자신이 경험했던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꿈속에서 아들 허원근이 찾아와 자신에게 '아버지'라며 절규했던 바로 그 시각, 새벽 4시였던 것이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얼마나 억울했으면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를 찾아와 울었을까. 

포기할 수 없는 이 아버지의 전쟁

하지만 여전히 진실은 멀리 있다.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며 국방부는 다시 그들만의 특조단을 구성하여 허원근 일병이 다시 자살했다고 번복했다. 그렇게 번복과 번복을 거듭하며 최종적으로 내려진 대법원의 판결은 너무도 끔찍했다. "허원근 일병의 사인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며 다만 부실한 수사로 인한 유족 피해를 인정하는 위자료 3억 원만 인정하는 판결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용하지 않았다. "아들을 잃고 돈을 벌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며 아버지는 위자료 3억 원 수령도 거부했다. 그러면서 '아들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 진실을 찾아달라'며 다시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지난 2016년 12월 29일, 대법원이 다시 한번 이 사건 재심청구에 대해 최종적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이었다. 
 
 2016년 12월 29일 대법원에서 재심청구가 기각 결정된 날, 아버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  2016년 12월 29일 대법원에서 재심청구가 기각 결정된 날, 아버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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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법적으로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지금, 나는 최종 기각 결정이 난 후 아버지에게 여쭸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냐고.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 상황에서 과연 아버지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 그날따라 12월의 찬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서초동 대법원 건물 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마침내 눈을 뜨며 나에게 던진 말씀은 뜨거웠다. 

"다시... 검찰에 진정서를 낼 거야.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끝까지, 끝까지...싸울 거야. 도와줘." 

아버지가 바라는 꿈은 지난 2009년 12월에 해체된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예산 낭비'라며 강제 해체시킨 군 의문사위를 다시 발족시켜 공정하고 객관적인 수사로 모든 사망 군인의 진실을 밝히는 것. 왜 그날 내 아들이 3발이나 총을 맞고 죽었는지, 그게 말이나 되냐는 의문에 상식적인 답을 들려줄 조사기구가 다시 만들어질때까지 아버지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연극 <이등병의 엄마>가 이 꿈을 만드는 힘이 되고 싶다. 그 꿈을 응원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기다린다. 허원근 일병을 애도하며 '진실은 끝내 침몰하지 않음을' 이 연극, <이등병의 엄마>가 약속하려 한다. 함께 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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