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1/12/01 10:50

성모송 묵상 4-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모친 되신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총알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집 앞에서.

이 사진을 찍고 4년 후에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2000년동안 우리의 교회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선포해 왔다.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처럼 신체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스쳐가는 시간에 의해 조각되고(어느 시인이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의해 주조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 안에는 그 사람 개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그녀를 스쳐간 체험들과 그/그녀가 거했던 공간들이 뒤엉킨 채로 공존한다.

 

  예수의 경우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신앙을 기독교인들은 2000년가량 지켜 왔다. 우리가 전해받은 거룩한 책은 예수가 완성된 채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우리의 책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루가 2:52)

 

  그 또한 우리처럼 이 땅의 것들을 양식으로 삼아 자랐다. 단백질,  지방, 칼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있었을 것이다. 마리아를 둘러싼 환경과 같은 것들. 예를 들어 로마제국 군대의 폭력, 헤로데(헤롯)의 언론통제, 배고픔, 저항운동들과 그것의 실패로 인한 잔인한 죽음들, 회당에서 드렸던 예배. 이런 체험들이 예수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을 것이고, 예수가 할 수 있는 말,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이것들의 조합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선언한 우리 신앙의 의미이다. 예수는 처음부터 완전한 그래서 자기 안에 갇힐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고, 관계를 통해 형성된 인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을 애타게 기다린 가난한 이들의 환유라면, 예수를 잉태하고 낳은 이는 마리아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모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께 나신 예수'가 복되다는 말은 다른세계를 위해 애써온 이들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를 향한 복의 선언을 통해 우리는 민중의 희망을 지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는 투쟁의 덧없음으로 좌절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희망이다.

 

  성모송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 선물을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하느님의 다정한 속삭임이 아닐까.

 

2009.11.1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2/01 10:50 2011/12/01 10:50

트랙백

https://blog.jinbo.net/rev_pr/trackback/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