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칼럼 2011/12/01 11:01

성모송 묵상 6-"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께 나신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느님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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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1일 종각.

이 곳에서 나는 보좌 앞에 서서 정의를 위해 탄원하는

요한의 묵시록(계시록) 6장의 성인들을 만났다.

 

 

 

  성모송의 전반부가 새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선언에 대한 동참이라면 후반부는 그 하느님 앞에 선 우리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우리가 개인으로써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앞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마리아로 대표되는 성인들, 그리고 그들로 대표되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와 함께 하느님 앞에 선다.

 

  성서의 마지막 책은 우리가 서 있는 곳-하느님의 보좌(옥좌)앞-이 정의를 향한 외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말 해준다.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 당했다고 명시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외치는 소리는 다음과 같다.

 

  "언제 세상을 심판하시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겠습니까!"

 

  창세기에서 묵시록(계시록)까지의 모든 성서가 일관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하느님이 억울한 희생을 당한 이들에게 공감하시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역사에 뛰어들기도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간 이들과 함께 서 있는 시공은 바로 이 선택이 일어나는 곳이다.

 

  성모송의 마지막 문장은 하느님이 '죽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공감하시고, 이들의 희생을 끝내기로 결단하시는 순간, 그 분 앞에서 우리가 마음 속으로 되뇌이는 말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 서 있기를, 그리고 도둑처럼 우리 앞에 다가올 임종시에도 그런 사람이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주변사람들의 행위를 모방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는 포유류인 인간은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을 둘러싼 환경-물리적인것과 함께 문화적인 것도-을 자신을 지배하는 '권세'로 삼고 살아간다. 하느님보다 주위 환경들을 더 실제적인 권세로 체험할 때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어 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모든 소외된 이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시나 세상의 권세는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의 길을 따라 우리의 걸음을 낮은 곳으로 향하기 원하시지만 세상의 권세는 우리를 고지를 향한 경쟁의 길로 향하게 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달력을 버리고 교회력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기 원했으며, 성찬례(주의만찬, 성찬식, 미사)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이탈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기를 원했다. 예수와 성인들의 삶에 대한 기억들로 채워진 교회력을 통해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 교회력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시간의 질서는 우리의 현재를 둘러싼 과거와 미래가 되어 우리를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새 피조물'이 되게 한다. 성찬례는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천상의 그것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서 예수를 발견할 때에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은 이전 세대와 현 세대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하는 하늘보좌 앞으로 변화된다. 마리아와 성인들은 바로 그 시공에서 우리의 손을 잡고 연대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의 정의에 대한 목마름도 그치지 않도록, 그들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이들로 남도록 돕는 것이 성인들의 역할이다. 이 연대 밖에서 세상과 싸울 때의 우리는 얼마나 고독했던가. 그들을 잊고 살았던 때의 우리는 얼마나 세상 앞에 무력했던가.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싼 증인들이 있다.

 

  성모송은 우리가 항상 그들과의 교제 안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마리아를 부를 때에 우리는 가난과 힘없음으로 고통받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만나고, 또한 그들에게 공감하시는 하느님을 만난다. 그래서 성모송은 마치 골리앗과도 같은 세상 앞에 싸우려고 서 있는 당신을 위한 기도이다. 싸움을 촉구하는 민중가요 소리와 이길 수 없다는 탄식이 뒤섞여 소음이 되어버린 현장에서 당신은 당신을 지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 음성을 들을 때에 당신은 더이상 투사가 아닌 예배자가 될 것이다. 동시에 당신이 선 공간은 전쟁터가 아닌 성전이 될 것이다. 그 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더이상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세상이 감히 막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다시 세상 앞에 설 것이다.

 

  앞서간 이들을 기억함으로, 또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되어 세상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곳으로 만드는 날이 곧 오기를 소원하며, 나는 오늘도 작은 목소리로 성모송을 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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